어느 날 얼굴에 핀 꽃

1.

by 신성화

버스표는 이미 예매해두었다. 서경터미널에서 17시에 출발하는 버스의 7번 좌석으로. 영릉에 가기 전 집에 들러 간단히 짐을 챙겨야했다. 서점 안을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하얀색 작은 메모지를 꺼내 필요한 목록을 적었다.


잠옷 한 벌, 속옷 한 세트, 편하게 입고 있을 옷 한 벌, 여벌 옷 한 벌, 양말 두 켤레, 가볍게 걸칠 얇은 카디건 하나. 심심할 때 읽을 책.


일주일간 여행을 떠날 때 챙기는 짐 치고는 단출했다. 여름휴가 때와 비교하면 짐이 반도 안 됐다. 어차피 겨울바다를 볼 때 말고는 밖에 나갈 일이 없을 테니.


사야할 물건의 목록은 옆에 따로 작성했다.

칫솔, 치약, 작은 사이즈의 샴푸와 린스, 역시나 작은 사이즈의 바디워시와 바디로션.


희정이의 작업실이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먹을거리도 사가야 했다. 라면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즉석조리식품은 희정이가 미리 준비해 둔다고 했으니 간식거리만 몇 개 사가면 됐다. 먹은 만큼 텅 비어버릴 식품들을 채워놔 주고 싶었지만 희정이는 차라리 밥을 한 번 사라고 했다. 그런 사항은 집 주인의 말을 듣는 편이 좋았다.


빠진 물품이 없나 목록을 다시 살피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갑작스런 찬바람이 공기를 훑었다. 바람에 흔들린 머리카락이 오른쪽 볼을 쓸었다.


밝은 인상의 여성이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 갈색 염색모에 세련된 단발머리, 하얀 롱코트 안에 받쳐 입은 아이보리 목티 위에 금색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7cm 굽으로 보이는 검정 롱부츠가 서점의 마룻바닥과 닿아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낯선 얼굴. 처음 서점을 찾는 손님이었다.


손에 든 펜을 제자리에 놓고, 메모지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안녕하세요. OO서점입니다.”


오늘의 첫 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행을 기다리는 마음이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자주 오는 손님들이라면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물어볼 법한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손님은 어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인사를 건네더니 말을 덧붙였다.


“어머, 얼굴에 꽃이 피었네!”


밝은 목소리로 돌아온 대답이었다. 얼굴에 비해 앳된 목소리가 서점 안을 울렸다.


오른쪽 볼에 핀 꽃에 순간적으로 화끈한 열감이 돌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동반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 네.”


잠깐 멈칫한 나의 대답이 이어졌다.


나를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가 내 얼굴에 꽃이 피었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들은 ‘얼굴에 꽃이 피었네.’라는 문장은 최초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내 귓가를 울린 말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나쳐 간 손님은 서점을 둘러봤다. 또각또각. 걸음을 옮기는 구두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걷는 발걸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흐르는 낯선 외국 음악과 낯선 이의 걸음 소리가 새로운 앙상블을 만들어 냈다. 두 개의 소리가 내는 조화가 내게는 어떤 부조화로 다가왔다. 내가 머물던 공간 안에 무언가 쩍, 하고 금이 갔다.


손님은 몇 권의 책을 들어서 살펴보는 것 같더니 곧 가벼운 목례를 전해왔다. 여전히 밝은 얼굴과 함께. 짙은 분홍빛 립스틱이 발라진 입술이 양 끝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안녕히 가세요.”


나도 가볍게 목례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입술의 움직임이 어색했다. 나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균열 같은 것. 미소 띤 입술이 양쪽 볼 사이에 놓인 조각배 같았다. 닻으로 고정되어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문이 열렸다. 서점 안의 공기 일부가 밖으로 훅 끌려 들어가고, 서점 밖의 공기 일부가 그만큼 딸려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다시 한 번 오른쪽 볼 위를 쓸어내린 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느 날 얼굴에 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