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3.

by 신성화

영릉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직 어스름한 새벽이었고, 곧 해가 뜰 것이었다. 외투를 꺼내 입고 작업실 뒷길로 나갔다. 차가운 새벽공기에 싸여 바다로 향했다. 핸드폰 불빛이 발아래를 비추었고, 때로는 분홍리본을 비추었다.


여명이 밝아왔다. 어제의 그 자리에서 나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느린 듯 빠르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 뿜어져 나오는 빛이 세상을 덮고 나를 비추었다. 차오르는 햇살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장을 내리꽂는 한줄기 빛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속에서부터 들끓어 오른 눈물을 참아낼 수 없었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나의 목소리가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섞여 마구 터져 나왔다. 나의 의지도, 통제도 벗어난 내 안의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소리가 낯설었다. 꺽꺽대는 소리가 절규 담긴 외침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한 인간의 세계가 고요한 바닷가를 울려댔다.


다이아몬드 성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부서졌다. 밖에서 쏘아대는 광명과 안에서 흔들어대는 음파가 일으킨 파동이 모든 걸 한 순간에 파괴시켜버렸다. 나를 둘러싼 다이아몬드 성은 견고해 보였지만 팽팽한 힘의 긴장상태에 놓여 있던 것이다. 약한 부분을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강해보이는 모든 곳이 나약했으므로. 어느 곳이든 아주 작은 힘을 가하기만 해도 곧 부서져버릴 것이었다. 그 힘이 나비의 날갯짓에 의해 불어온 바람이었어도, 의미없이 허공을 떠도는 먼지의 부딪침이었어도.


모두 부서졌다. 나의 변명과 나약함이 뒤섞여, 나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묵묵히 쌓아올린 성이. 여러 가지 말들로 나를 속이며 숨기만 하느라, 순수한 피난처가 아니었던 그곳이.


해가 뜨고 있다. 스칼렛이 말한 내일의 태양이.


나는 오늘, 지금 이 순간, 스칼렛이 기다린 태양이자 내가 간절히 원했던 밝은 빛을 만나고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사랑했다. 다만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내가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자려고 누운 이불안에서 왠지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셔도, 움직이기 싫어 꼼짝없이 누워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어도, 나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랐고, 행복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불행한 그때도, 지금도.


안팎으로 몰아치던 파동이 잔잔하게 흘렀다. 가루처럼 흩어진 다이아몬드 성의 파편들이 별빛처럼 내게로 내렸다. 반짝이는 잔해들이 바닷물에 녹아내리던 눈송이처럼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나였기에.


나는 다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나를 감쌌다. 내 안에서 솟아난 어떤 힘이 새롭게 나를 지지하고 있었다. 오늘의 오늘은 어제의 오늘과는 다른 날이 될 것이었다.


나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내야만 한다.


삶을 향한 강한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보다 강한 무언가가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떤 것으로도 부술 수 없고,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그런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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