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달빛

1.

by 신성화

그런 날이 있다. 스쳐간 서늘함에 온 몸의 신경세포가 곤두서지만 이유는 모를 때.


나는 으슬으슬 떨려오는 어깨 위에,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쳤다. 진동벨이 붉은 빛을 번쩍이며 울리고, 주문해두었던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은은한 카페 조명 아래서, 청포도 주스의 옅은 초록빛이 혼자 튄다.


하지만 커피는 사양. 이미 오늘 두 잔이나 마셨고, 이 시간에 또 커피를 마신다면 밤새 이불 위에서 뒤척여야 할 테니.


스트로를 따라 상큼함이 입안에 번져간다. 의외의 선택이었던 청포도주스의 맛은 나쁘지 않다.


약속 시간인 8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사람과 차가 엉켜 뒤죽박죽이었고, 카페로 오던 태준과 진우에게서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후였다.


빗물이 맺히며 잠시 머물다 주르륵 흘러내리기를 반복하는 창문에, 거리와 내가 함께 새겨져 있다. 빗물에 번진 불빛이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재킷을 끌어당겨 다시 몸을 덮었다.


청포도주스가 반쯤 줄었을 때 “누나!”, 하고 부르는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본 진우의 얼굴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


“살아는 있으셨네. 태준이 아니었으며 얼굴도 못 볼 뻔 했어.”


내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진우를 반겼다. 가까이 살면서도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에이. 내가 미안해. 요즘 작업하는 게 너무 바빠서.”


진우가 살갑게 굴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많이 바빠?”


“그냥 열심히 사는 거지. 바쁜 사람들 속에서 조금 더 바쁘게 살아볼까, 하고.”


나는 진우의 표정에서 지친 기색과 창작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읽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꼬물거리는 핏덩이였을 때부터 옆집에 살던 동네 꼬마. 내가 대학에 진학하며 본가를 떠나기 전까지는 늘 함께였다. 성장하는 걸 다 지켜봤으니, 외동인 나에게는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동생이었다.


진우는 지금 학교만 졸업하고 각종 아르바이트와 음악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입버릇처럼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하던 아이였는데.


진우는 수능 시험을 한 번 망치고 재수 끝에 교대에 갔다. 그때만 해도 진우가 당연히 선생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군대에 다녀와서 학교를 잘 다니기에 임용고시를 준비하겠거니 했는데, 진우는 갑자기 음악이 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의외였다.


진우와 음악가라는 직업은, 진우를 20년 넘게 본 내게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으니까.


고향에 있는 진우네 집은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다. 꿈을 지지하는 아버지와 임용고시나 준비하라던 어머니의 대립으로 시끌시끌했으니. 결국 진우 아버지가 승리. 그것도 뜻밖의 일이었다. 오히려 진우의 아버지가 반대하고, 어머니가 찬성하실 줄 알았는데.


2년 전쯤의 그 날, 나의 아버지는 전화 통화를 하며 이런 말을 하셨다.


“이 놈이 자기 아버지가 반대해서 가수가 못 된 걸 평생의 한으로 여기더니, 자식 놈이 음악을 하겠다니까 엄청 좋아하네. 덕분에 내가 소주 한 잔 얻어먹고 있지.”


술이 얼큰하게 취하신 아버지의 곁에서 “선아야. 우리 아들놈이 음악을 한단다. 그것도 가수 말이다.”하는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나는 가끔 나에게 어떤 책임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진우가 가수를 꿈꾼 건 내 남자친구인 태준을 만난 이후였으니. 처음으로 진우에게 태준을 소개시켜줬던 날,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잘 통했다. 학교는 달랐지만 두 사람 다 교대를 다녔던, 다니고 있다는 부분에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미 선생님의 길을 걷고 있는 태준을, 진우는 유달리 따랐다.


그 이후로 진우는 몇 번이나 태준이 취미로 활동하는 음악 모임에 함께 참석하더니, 어느 날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나도 진우의 어머니처럼 진우를 말렸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닌 진우의 모습은 상상도 안 해봤으니까. 나는 태준의 영향을 받은 진우의 충동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우의 눈빛은 확고했다. 이미 결심이 단단히 맺힌 그 눈빛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겠다고 했을 때, 대입 재수를 결정하면서 반드시 교대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자그마한 일들까지도. 그때마다 진우는 해냈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다짐이 뿜어져 나오는 눈빛. 열정이 강하지 않은 내게 진우의 그런 눈빛은 일종의 경이로움이었다.


긴 대화 끝에 나는 진우를 응원하기로 했다. 그것이 진우의 결심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가끔 진우의 얼굴이 전과 달라지는 걸 볼 때면 마음 한 구석에서 온갖 상념이 일었다. 어떨 때는 좋아 보이고, 어떨 때는 안 좋아 보이는 인상이 나를 갈팡질팡하게 했다.


진우가 택한 길이고, 진우의 인생이지만, 일종의 원인 제공자라는 쓸데없는 죄책감 비스 무리한 감정이 생길 때. 그 순간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장난스런 응원이었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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