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달빛

3.

by 신성화

“할머니!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부르며 1층 초인종을 요란스레 눌러댔다. 인터폰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이 엉망이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철컥.


“할머니…….”


잇새로 내뱉은 나의 옅은 부름에, 할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나의 옷차림과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를 살피고, 손에 쥔 검정 파일을 바라봤다. 할머니는 말없이 나의 손을 잡아 나를 집안으로 들였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수척해진 나의 얼굴 위로 빗물 섞인 땀방울이 흘렀다.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비에 젖은 한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할머니는 내게 방에서 꺼내온 옷가지를 쥐어주시고,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킨 다음,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표고버섯과 찹쌀가루를 꺼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았다. 나의 살갗에 닿아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욕실 안을 메우고 있었다. 방울방울 흩어진 물기가 내뱉는 뿌연 증기가 나를 감쌌다.


죽이 뭉근하게 퍼졌을 때쯤 나는 달칵, 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차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악보파일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다행이 번지지는 않았네요.”


할머니가 악보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네.”라는 대답과 함께 쭈뼛댔다.


“와서 앉아요.”


머뭇거리는 나에게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할머니의 미소에 나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할머니에게 찾아온 일이 새삼 민망했다. 할머니는 내게서 젖은 옷을 받아가 세탁기에 넣었다.


“앉아 있지 않고. 어서 들어요.”


주방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말했다. 내 옷은, 곧 새로운 향기를 입은 채 깨끗하게 내게로 올 예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조심스레 식탁 의자에 앉았다. 죽을 한 술 떠먹었다. 묽게 퍼진 죽이 심심하면서도 끝 맛이 달큰했다. 그제야 나는 며칠 동안이나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는 걸 인지했다.


“천천히 들어요.”


“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죽이 담긴 그릇을 바라보는 나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묵묵히 죽을 떠먹었다.


“저기……. 죄송해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죽 그릇을 비워낸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고 했으니.”


할머니가 미소 지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부드럽게 접혔다.


“비가 내리는데…….”


입술을 옴짝대던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날이 눈앞에 상상돼서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이곳에…….”


나는 말을 흐렸다. 다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에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옷이 제법 어울리네요.”


할머니가 내가 입고 있는 꽃분홍색 꽃무늬 원피스를 보며 말했다.


커다란 꽃 장식과 곳곳에 뿌려진 반짝이까지. 내가 입을 일이 없을 법한 옷이었다. 나에게는 살짝 작아서 손목이 짤막하니 올라가 있었다. 나와 할머니는 마주보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웃어요. 아직은 힘들겠지만.”


할머니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이 곡.”


할머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악보 파일을 넘기며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악보를 볼 줄 몰라서…….”


내가 말했다.


“처음에는 악보도 없애려고 했어요. 그 사람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내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못 하겠더라구요. 라이터를 켜고, 불을 악보에 가져다댔는데……. 그랬는데……. 안 되겠어요. 못 하겠어요. 미련 같은 것도 다 버리고. 날 두고 먼저 떠난 사람, 나도 다 잊어버리겠다고, 그렇게 되뇌어도 안 돼요. 못하겠어. 그를 지울 수가 없어요. 전부 다 비워버리고 싶은데……. 흔적도 없이. 사랑한 적 없던 것처럼. 처음부터 내 옆에 없었던 사람처럼. 이름조차 모르고, 그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몰랐을 때처럼……. 기억도, 추억도, 함께한 시간도 모두……. 그를……. 그 사람을 지우고 싶어요.”


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끅끅대며 겨우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에 해갈되지 못한 감정이 엉겨 붙어 있었다.


“울어요. 울면 어때.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둔 눈물인데. 맘껏 울어요. 지금 안 울면 나중에는 울지도 못해요. 그땐 완전히 고장난거지. 마음이.”


툭. 툭.


한껏 숙이고 있는 나의 얼굴 아래서 눈물이 비꽃처럼 내렸다. 나는 지금껏 울지 못한 울음을 울었다. 평소에는 조그만 감정의 요동에도 쉽게 울곤 했는데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방울도 울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죽음 이후 눈물이 나지 않았으니.


이미 고장이었다. 울 수 없는 건. 눈물이 말라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고장 나 버렸다. 그는 시작도, 끝도, 나를 내가 아닌 사람처럼 만든다. 미웠다. 그래서 더 사랑했다.


한참을 울던 나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어때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평소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일이지만 주인집 할머니의 제안에는 부담스럽지 않은 배려가 담겨있었다. 그것이 왠지 나를 끌어당겼다.


“네.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나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나의 대답에 할머니는 작은 방으로 가서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나를 데리고 작은방으로 갔다.

더블 사이즈 침대 위에 새로 가져다 둔 침구가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시간이 오래 담긴 원목 서랍장이 있었고, 위에 놓인 앤티크한 조명등이 옅은 빛을 냈다.


“원래 손님방으로 쓰는 곳이니 편하게 있어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모습에 할머니가 온화한 표정으로 웃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할머니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방 불을 껐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어렴풋한 빛이 불투명한 유리창에 번졌다.


눈이 뻑뻑했다. 평소에 반밖에 안 떠지는 걸 보니 퉁퉁 부은 게 분명했다.


나는 빳빳한 향기가 풍겨오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이불 속이 체온으로 덥혀져 점점 따뜻해졌다. 나는 모처럼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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