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꽃집을 다시 열었다. 비워둔 공간은 그새 엉망이었고, 나는 바스러진 모든 것을 비워내고 새로 채워 넣었다.
그 동안 왜 문을 닫았었냐는 물음들에 나는 웃으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잠깐 쉴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대답했다.
매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침마다 번쩍 눈을 떴다. 매일 아침 나를 깨우던 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의 빈자리가 헛헛함과 함께 밀려오는 시간. 조금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벌떡 몸을 일으키고 꽃집으로 출근한다. 꽃집에서는 한 순간도 멍하게 앉아 있지 않으려 바쁘게 움직였다. 꽃집 운영 시간이 끝난 다음에도 바로 집으로 오지 않고 한참 밖을 돌아다녔다. 무조건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았다. 원래의 나라면 꺼렸을 시끌벅적하고 정신없는 곳으로.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면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잊기를. 모든 기억도, 모든 추억도 지워지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겪어내지 않은 사람처럼. 나는 매일, 하루를 꾸역꾸역 지나 보냈다.
오늘도 그렇게 저무는 줄 알았다. 검은 클리어 파일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비가 내렸다.
방울진 습기에 축축하게 적셔진 공간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이 점점 어둑해져만 갔다. 내리는 빗방울 소리와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가 섞이며 내 귀로 흘러들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나의 시선이 거실 테이블에 닿았을 때, 그 아래 던져둔 검은색 클리어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내 곁에 남은 유일한 그의 흔적.
그의 집에서 나온 두 개의 상자와 나의 집에서 나온 두 개의 상자는 이미 붉은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흩날리는 연기와 수북하게 남은 재는 바람을 타고 멀어졌다. 그를 전부 털어내고 돌아섰다고 생각했는데,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한 다음에야 보조석 아래 떨어져 있던 검은색 파일을 발견했다.
그는 계속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는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의 흔적을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차마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의 마지막을 거실 테이블 아래 봉인해 두었던 것이다.
나는 검은 파일을 펼쳤다. 그 안에는 악보가 들어 있었다.
검은 파일 안, 투명한 비닐 속에 담긴 악보에는 그가 그려놓은 음표며, 그가 끼적인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파일을 빠르게 덮었다. 보지 말아야 할 금서를 펼친 것 같았다. 창밖에서 쾅쾅 울려대는 천둥과 번쩍이는 번개가 세상을 덮치고 있었다.
시계 바늘이 세차게 움직였다. 내일이 그의 49재라는 사실이, 꾹 담아놓았던 그 날짜가, 불현 듯 스쳤다. 시계 바늘이 똑딱이는 소리가 심장을 울려대는 바람에 얌전히 제 일을 하던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작은 물방울들이 바람의 힘에 얹혀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투둑, 투두둑. 창문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비가 내린다.
나는 가슴께를 꾹 눌렀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나 싶더니 이내 바들바들 떨렸다.
영원한 이별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어떤 예고도 없이. 모르는 징조가 있었나. 꿈자리가 사나웠다던가, 까마귀가 울었다던가.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더듬어도 되돌리지 못할 일은 벌써 일어났는데.
그는 내 곁에 없다.
사실을 명시한 무미건조한 문장이 심장에 자꾸 생채기를 낸다. 쿵. 쿵. 울려대는 심장에 정신이 아득해간다. 이럴 때 너의 손을 한 번만 잡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다시는 너의 손을 잡을 수 없다.
그는 없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곳으로 가버렸다. 나만 놔둔 채.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은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 지금의 나처럼.
나는 찬장에서 캔들 라이터를 꺼내왔다. 검은 파일을 열어 제일 앞쪽에 꽂혀있는 악보를 꺼냈다. 제목이 쓰이지 않은 종이를 꽉 쥐었다. 캔들 라이터에 불을 켰다. 흔들리는 불꽃이 종이와 점점 가까워졌다.
번쩍. 우르르 쾅. 번개와 천둥이 거의 동시에 내리쳤다.
나는 캔들 라이터에서 손을 뗐다. 캔들 라이터가 거실 바닥에서 뒹굴었다. 나는 악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두었다.
나는 검은색 악보파일과 차키를 들고 무작정 빗길을 뛰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에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였다. 짙게 물들어 가는 도시에는 일렁임도 출렁임도 없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린 채 모든 걸 덮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너와 나를 잇던 길 위에 올라, 네가 없는 그곳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