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시작되는 첫 번째 집은 어느 회관 사택이었다.
큰 방 1개와 작은방 2개, 마루가 있었고 넓은 마당 한가운덴 펌프물이 있는 샘터와 주변으로 텃밭이 빙 둘러 실하게 가꿔져 있었다.
그곳이 여느 집과 다른 것이 있다면 회의실 몇 개와 여러 칸의 화장실이 집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6살부터 8살 정도까지 살았던 집으로, 넓었지만 참 아늑했던 느낌을 준 곳이다.
난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입학했고, 동네 친구들도 사귀었고, 사랑도 듬뿍듬뿍 받고 자랐다.
엄마 말씀으로,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언니, 오빠들이 학교 가려고 대문을 나설 때마다 따라가겠며 마구잡이로 떼를 썼다 한다.
나는 혼자 집에 남아 있는 것도 싫었지만 가방 메고 소풍 가듯 집을 나서는 언니, 오빠들이 마냥 부러워 참기 어려웠다.
유치원이 귀했던 시절, 아무 재밋거리 없이 혼자 집에 방치되듯 남겨져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지루한 하루하루였겠는가?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만 6살인 코흘리개를 국민학교에 일찌감치 입학시켜 버리셨다.
이후 내 국민학교는 파란만장,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지만 말이다.
그 집 앞에는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한 부잣집이 턱 버티고 있었다.
잉어가 사는 연못과 작은 아치형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그 집은 한눈에 다 보이지 않을 만큼 넓어서 매번 공원에 와 있는 착각을 들게 했다.
언젠가 동화책에서 봤음직하게 안채와 별채가 따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본부인이랑 둘째 부인이 함께 살기 위해 마련한 집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 부잣집에는 나랑 동갑내기인 미숙이가 살았다.
눈이 조그맣고 오동통한 몸매의 수더분한 아이다.
나는 주로 그 아이 집에서 삔 치기랑 인형놀이, 소꿉장난을 하며 놀았는데 부잣집 여자애 치고는 텃세 없이 나에게 참 잘해준 고마운 친구다.
미숙이랑 삔 치기를 했을 때, 반들반들한 새 삔이 한 움큼 있었던 미숙이와 달리 녹이 잔뜩 쓴 삔 몇 개를 밑천 삼아 호기롭게 덤볐던 나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가까운 구멍 안으로 못 넣고 몽땅 털려버린 적이 있었다.
가진 자의 여유 앞에서 본능적으로 주눅 들고 말았던 내가 바보멍청이 같아, 집으로 오면서 빈손을 하염없이 내려보며 찔끔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웃프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미숙이랑 마주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서로 어색해 모른 척 지나쳤던 것이 마음에 좀 걸린다.
그런 저런 추억이 담긴 그 무료 회관 집도 우린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집이 귀한 시절에 우리보다 더 그곳이 절실했던 누군가에게 속수무책으로 빼앗겼고, 우리는 하루아침에 갈 곳도 대책도 없이 거리에 나앉은 꼴이 돼 버렸다.
대문 밖을 빙 둘러싼 탱자나무 열매로 구슬치기를 하고 군데군데 심어진 꽈리며 목때깔 열매로 배고픔을 달래 왔던 그 동네와는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그때는 내가 어릴 적 거처했던 집 중에서 그곳이 가장 고급스럽고 사람답게 사는 집이었다는 것도 미처 몰랐다.
내 유년시절을 그렇게 따뜻하게 보듬어준 그 집터는 지금까지도 회관의 모습으로 그 자리 그대로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