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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Dec 07. 2023

성숙아,삼순아,미자야,정미야,은순아,봉남아~



난 어릴 적부터 친구가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을 넓게 많이 사귀는 편이다.

국민학교 때도 끼리끼리 모여 놀던 못난이 친구들이 많았다.

지금은 서로 만나지도, 소식도 모른채 잊혀졌지만 오늘따라 왠지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성숙아~ 삼순아~ 미자야~ 정미야~ 은순아~ 봉남아~"


 (성숙이 이야기)

성숙이는 이름만큼이나 어른스러운 아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바람에 우린 주로 성숙이 집에서 놀았다.

음식솜씨가 어른처럼 깊고 게미가 있어 그녀가 만들어준 개떡과 상추겉절이는 지금도 생각이 날 만큼 맛났다.


성숙이 언니는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했는데 우리는 언니가 입다 보내온 서울 옷을 요리 저리 입어보며 어설픈 아가씨 흉내를 내곤 했다.

특히 '새마을바지'라 불렀던 통이 넓고 길이가 긴 바지는 정말 입어보고 싶었는데 언니 덕분에 원 없이 입어볼 수 있었다.


"야~ 니도 이거 한번 입어 봐라... 어쩌냐~ 나 이것 입으니까 서울 가시나 같지 않냐?"


참 친하게 지냈던 우리도 여느 여자애들처럼 금이 간 일이 당연히 생겼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지만 성숙이와 말도 안 하고 대면대면하고 있을 때 성숙이가 먼저 치사한 짓을 했다.

내가 문방구에서 산 물건을 좀 쓰다 새것으로 바꿔치기했다는 무용담을 친구들에게 자랑치고 있는데 성숙이가 그 소리를 엿듣고 문방구 아저씨에게 낼름 일러바쳐 버린 것이다.

내가 그때 문방구 아저씨 호출을 받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성숙이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야~ 가시내야. 너 문방구 아저씨가 오라 하드라. 얼른 가봐라~"


결국 그 물건 값을 배상하기로 하고 겨우 용서를 받았는데 그 돈을 큰오빠가 내 주었다.

나중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치사한 성숙이다.


(삼순이 이야기)

삼순이는 눈이 사시였는데, 그녀 집은 언니도 많고 동생도 많은 대가족이었다.

한 번은 동생 하나가 죽어버렸다고 학교에서 울기도 했었는데 그 슬픔이 그리 오래가지 않고 예전처럼 웃고 떠들고 다녀서 좀 놀랬다.

옛날에는 자식이 많은 만큼 자식을 잃은 일도 흔했었다.


판자촌이라 불렀던 빈민촌 한편에 터를 잡은 삼순이 집은 그 많은 가족이 살기엔 턱없이 비좁았다.

방이 하나밖에 없었고,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가 주식일 만큼 궁핍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삼순이 집을 들락거리며 식고 불어 터진 수제비를 얻어먹고 다니느라 바빴다.


삼순이는 중학교를 가지 않고 (그때는 중학교 의무교육 아님) 공장에 취직해 뾰족구두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어느날 내 앞에 턱 나타났다.

길 가는 건달 남자애들이 어찌나 휘파람을 불어대며 희롱하던지 난 삼순이랑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창피해 서둘러 헤어지고 말았다.

그때 더는 삼순이와 친구로 지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 후론 두번 다시 그녀 보지 못했다.  


 (미자 이야기)

미자는 내 친구 중 유일하게 미모가 고급스럽고 야리야리했다.

내가 참 부러워하고 질투도 많이 하고 따라 하기도 많이 했던 친구다.

하지만 그 친구도 외모만 그럴싸했지 편모슬하에 빈민촌 쪽방 하나에 살고 있는 소외계층 중 하나였다.

미자가 살고 있은 쪽방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침대도, 커튼도, 소파도 있어 마치 잘 꾸며진 호텔방처럼 근사했다.

항간에는 그 애 엄마가 미군과 이러쿵저러쿵 돈을 번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는데 그것은 난 모르겠다.


미자에게는 늦은 나이에도 장가를 가지 못한 노총각 외삼촌이 한 명 있었다.

외삼촌은 미자 집 근처 오래된 여관방에 장기간 투숙하며 간간히 날품을 팔고 있었다.

한번은 미자가 엄마 심부름을 해야 한다며 외삼촌 방에 가자 따라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방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모델 같은 외국 여자들이 벌거벗은 체 민망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잡지책들이 좁은 방안 발 디딜 틈 없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매~ 이것이 다 뭐다냐?" 우리는 정신없이 그 방을 튕겨나오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참 민망하고 놀랬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미자를 왕따 같은 것을 시켰나 보다.

미자 엄마가 우리를 찾아와 눈물바람을 하셨는데, 작고 힘이 없어 보이는 미자 엄마를 보고 어린 마음에도 엄청 찔려 죽는 줄 알았다.


"애들아~ 우리 미자랑 제발 사이좋게 놀면 안되겄냐?"


(정미 이야기)

정미는 전라도 신안에서 부반장까지 하다 전학을 왔고 나와 친하게 되었다.

그녀는 부모님 모두 일 나가시면 주로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지내는 큰 딸이었다.

난 그 집에서 처음으로 막걸리를 먹어봤고 눈 지그시 감고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타락한 어른 흉내를 내보았다.


"야~ 야~ 우리 아버지가 먹다 남은 막걸리 있는데 한번 먹어보까?"


정미에게는 약간 남성적인 카리스마가 풍겼다.

정미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고 여자여자해지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나를 좀 괴롭히는 못난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녀석은 우리 집 근처 연탄배달집 아들이었다.

고 놈은 나만 보면


"야~ o 씨 집 딸~ , o 씨 딸~ " 고레고레 소리 지르며 낄낄 놀려먹곤 했다.


나는 너무 화도 나고 창피했지만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정미가,


"야~ 연탄집 아들~, 너어~ 콱 죽여분다" 녀석 보다 더 큰 목소리로 좇아가는 바람에 그 녀석 얼굴색이 연탄빛이 되어 줄행랑이 쳤더란다.


 (은순이 이야기)

줄반장이었던 은순이는 내 친구 중 딱 한 명 감투 쓴 친구다.

은순이가 줄반장으로서 숙제 검사를 하는데 난 숙제를 안 해와 집에 공책을 놔두고 왔다며 거짓으로 둘러댔다.

순진한 은순이는 그럼 내일 가지고 오라며 숙제를 해 온 것으로 동그라미 쳐주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은순이가 우리 집에 딱 놀러 와 버린 것이다.

반가움 대신 숙제 공책을 보자 할까 봐 어찌나 긴장했는지 그날 어떻게 은순이랑 놀았는지도 모르겠다.


"오매 은순아~ 니가 우리 집에 웬일이냐?"


은순이 엄마는 새엄마였다.

우리끼리는 은순이 엄마를 '계모'라 부르며 갖가지 이상한 상상을 했다.

은순이 엄마가 학교를 오신 날 우리는 느낌으로 알았다.

은순이가 얼마나 새엄마를 좋아하고 새엄마가 은순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은순이, 잘 부탁합니다... 얘들아 느그들도 우리 은순이랑 친하게 지내라.."


수많은 동화 속에서, 형체도 없는 소문 속에서, 계모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과한 일반화가 얼마나 만연되었는지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봉남이 이야기)

학교 앞 작은 구멍가게 딸이었던 봉남이는 착해도 너무 착한 아이였다.

나는 봉남이를 만만하게 보며 번번이 먼저 잘못하고서도 적반하장 식으로 되려 삐지기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봉남이가 화해하자며 구멍가게에서 몰래 집어 온 사탕을 내 책상에 놔두곤 했는데, 난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던져버렸다.


"필요 없어~~ 누가 이런 거 먹는다 그랬냐?"


봉남이가  벌~건 얼굴로 뒤돌아서가는 모습이 눈에 선해 지금까지도 맘이 불편하다.

혹여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 이런저런 갑질을 사과하고 싶은데 봉남이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딱 한번 우연히, 봉남이 소식을 들은 적은 있다.

그녀는 간호조무사가 되었고 다리가 불편한 언니를 수발하며 집안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근황.

그 뒤로는 그녀가 어찌 사는지, 결혼은 했는지, 집안 형편에서 자유로워졌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을 거야' 라는 내 추측과, '그랬으면 좋겠어' 하는 내 바람으로 그때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고프다.


그 외에도 굳이 친구까지는 아니고 마냥 부럽기만 했던 눈 크고 인형 같은 넘사벽 현미와, 중학교를 가지 않고 안내양이 된 종란이... 그 외 몇몇 친구들이 더 있었다.

 

이제는 우연히 마주쳐도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생사도, 사는 곳도, 행색도 모르지만 나는 오늘 그녀들의 이름을 그리운 마음 가득 담아 소중히 불러보고 싶다.


" 성숙아~, 삼순아~ 미자야~ 정미야~ 은순아~ 봉남아~...."


사진;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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