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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Nov 24. 2023

성호네에 입양된 여자아이


                                                (사진: 다음 이미지)


공원 위에 달랑 한 채 서있는 우리의 보금자리 밑자락에 어느 때부턴가 무허가 비탈 집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문도 없이 일렬로 쫙 펼쳐져 있는 그곳은 안방 세간살이가 다 들춰 보일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그들은 아쉬운 대로 길쭉한 덧마루를 놓아 거주 공간을 늘렸고 그러다 보니 덧마루 바로 앞은 사람들이 나다니는 길과 바로 인접해 있었다.

차츰 그 길은 지름길이 되었고 사람들 왕래 또한 잦아졌다.

나도 예외 없이 등하교 때 그 길을 오가며 무방비 상태로 풀어헤쳐진 그들의 사적 보금자리를 훔쳐보았고, 그것은 나에 작은 볼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비탈 집에 우리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성호네가 있었다.

나는 성호네가 왜 그곳에 사는지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다.

비탈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성호 아버지는 중학교 수위(스쿨지킴이) 셨고 엄마는 항상  화장을 곱게 하시는 멋쟁이 셨기 때문이다.

성호 또한 가난한 아이들 특유의 지질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도도하고 시크해서 나를 가끔 설레게 했다.

나는 귀공자처럼 매꼬롬한 그 녀석과 좀 친해지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아 안달복달이었다.

그 녀석 또한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학교 갈 준비로 정신 없는 나에게 성호 엄마가


"아야~ 성호가 이것을 놔두고 가부렸다~ 니가 쫌 갖다 줄래?" 하시는 거다.


난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꽤 크고 무거운 것만은 확실하다.


"앗싸~" 나는 냅다 그 물건을 받아 들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변함없이 멀고도 멀고, 다리도 짧고 째깐한 내가 내 가방까지 짊어지고 그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간다는 것이 보통의 정성과 사랑이었겠는가?

그렇게 나름 성의를 다해 녀석 손에 건네 줬건만 그 괘씸한 놈은 거의 뺏다시피 낚아채서 교실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내 달콤한 시나리오는 그 순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오매~ 이 xx 같은 놈... 이제 내가 너랑 다시는 말한가 봐라잉"


그 후부터 나는 녀석만 보면 부러 쌀쌀맞게 굴었는데 고것은 내가 그러는지 어쩌는지조차 모른 체 지 길만 묵묵히 갔더란다.


어느 날 성호네에 큰 변화가 생겼다.

내 또래 여자아이 하나가 그 집에 등장한 것이다.

주변에서는 여러 말들이 돌고 돌았다.

성호 아빠가 밖에서 낳아 데려왔다는 말도 있고, 친척 아이를 데려왔다는 말도 들렸다.

며칠이 지나 그녀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졌다.

성호 엄마가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성호가 혼자라 외로울 것 같아 고아원에서 착한 애 한 명 데려와 딸처럼 예쁘게 키우려 입양했다 했다.

나는 그때 처음 ‘입양’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고 입양에 대한 환상 또한 갖게 되었다.

나보다 두 살 어렸던 그 아이의 첫인상은 한눈에 봐도 볼품없고 주눅 든 듯 맥없는 모습이었다.

몸도 그리 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는 누가 뭐래도  예쁜 신데렐라가 될 것이니 얼마나 러키 한 아이인가?

나는 온갖 상상을 하며 그런 그녀를 부러워했다.


러나 내가 성호네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아이는 부엌에서 살다시피 일을 하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거의 매일 그곳에서 목격되었다.

한겨울에는 항상 손등이 터서 빨간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코감기를 달고 사는 듯 연신 코를 찡찡거리며 콧물을 집어삼켰다.

나는 비록 형편은 어려웠지만 막둥이 특혜를 누리며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고 있는데, 나보다 어린애가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하며 우리 언니들보다 살림 솜씨가 더 좋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조금씩 그 아이의 부엌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가 부엌에서 보이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몸이 아파 누워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딱히 누구와 친하게 지내지도, 특별히 관심 가져 주는 이도 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오지랖 넓은 내가 가끔 그녀를 찾아가 말도 시키고 밖에 나가 놀자며 조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가 학교에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성호 가족이 외출할 때도 함께 하지 않았고, 세끼식사도 따로 하는 듯했다.

그녀의 아지트였던 부엌 부뚜막 위 네모난 라디오만이 유일한 그녀의 친구이자 가족처럼 그녀는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나도 몇 번 그녀가 틀어놓은 라디오 연속극장 사랑 얘기에 동참하며 킥킥거렸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그녀의 생활이 동네에서 입소문으로 떠돌시작했다.


엄마는, "입양해서 딸처럼 키우겠다드만 식모로 써먹으려고 데려왔구먼~. 오매 고 가시나~ 불쌍해서 어쩌까잉~ 몸도 째깐해갖고 비실비실 하드만" 혀를 끌끌 차셨다.


그리고, 그 아이와 가끔씩 내통하고 있는 당신의 막둥이에게


"야 야 고것 오늘은 어쩌고 있더냐? 뭔 말이라도  한테 하더냐? " 묻곤 하셨다.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뭘 물어도 그저


"몰라.."라고만 했던 그녀는 거의 AI처럼 감정이 없어 보였다.


연수원 관사에 터를 잡은 지 몇 해가 지나자 나는 그곳에서도 내 세상을 만난 듯 사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쑥쑥 자랐다.

따스한 봄날이 되면 파릇한 새싹이 불쑥 돋아나 온 천지가 꽃들판으로 물들여질 때까지 싸돌아 다녔고, 한여름엔 작은 창문을 열면 항상 우리를 푸르르게 맞아준 플라타너스 밑에 기대앉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무더위를 피하곤 했다.

울긋불긋 색동옷을 입은 가을이 오면 끝내 떨구어져 낙엽이 되어버린 나뭇잎을 하나둘 모아 만들기 숙제도 하고 책갈피에 꽂기도 하며 낭만 소녀가 되기도 했다.

유독 눈이 많은 긴 겨울밤에 밤새 내린 함박눈으로 온 천지가 새하얗게 변신해 있으면 나는 내 발자국을 제일 먼저 남기고 싶어 아침 일찍 대문을 박차고 나가 눈밭에 벌러덩 누워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재밋거리가 없을까 항상 눈을 번뜩이며 살아 가고 있는데 그 아이는 계절의 변화에 관심도 기대도 없는 듯 그저 그 자리 그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보드라운 햇살이 우리 집 평상 안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어느 봄날, 딱 한번 그 아이와 돌산 밑 들판으로 나간적이 있었다.

내가 바람난 봄처녀처마냥 좀처럼 가만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엄마는 성호 엄마에게


"그 집 가시나랑 우리 저 막둥이랑 쑥이나 캐오라고 내보낼깨라우?"


우리는 성호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칼을 바구니에 꽂아 넣고 쑥과 나물을 찾아 들판으로 나섰다.

나는 가는 길에 봄꽃 내음도 맡고 한 움큼 들꽃을 손에 줘보기도 하고 토끼풀도 뜯고 삐비도 뽑고 말 밥풀도 캐며 느린 걸음을 걸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오직 쑥과 나물에만 온 눈을 집중했다.

나는 바구니가 설렁설렁 채워지자 토끼풀로 꽃반지도, 꽃시계도 만들며 농땡이를 치고 있는데 그녀의 바구니는 그득히 눌러 담은 봄나물로 넘쳐나고 있었다.


 "아따 가시내야. 그만 좀 캐라잉. 좀 놀면서 해야. 안글믄 내가 니 꺼 다 가져가 분다"


내가 협박 같은 유혹을 하자 그녀는 자신의 바구니와 내 바구니를 비교해 보더니 잠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 들어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낯섦을 보았다.

오랫동안 말문이 막혀있다 가까스로 이 트일 때의 어색함처럼 그녀의 눈빛 또한 세상에 대한 낯섦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로 나는 그녀의 그런 눈빛도 두 번 다시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소문 없이 그 집을 떠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파양’이라 수군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호네에 새로운 여자아이가 또 한 명 나타났다.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크고 힘이 장사처럼 쎄 보였다.

나는 이제 성호와 그 아이에 대해 더 이상 관심 쓰지 않기로 했다.

엄마도 성호네 새 식구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거의 상관없이 지냈다.

하지만 내가 공원 놀이터를 우리 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닐 때 한 대야의 빨래를 머리에 이고 가는, 가끔은 무거운 물건을 양손 가득 들고 가는 그 아이가 보이면


"어? 저 가시나도 있었지?" 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저 가시나는 저리  힘이 세니 몸이 시원찮다고 쫓겨날 일은 없겠구나" 그때 잠시 잠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우리는 공원 위 연수원 관사에서 11년이라는 세월을 크고 작은 인연들과 함께 보냈다.

그곳은 우리 가족에게 애증의 삶의 터전이 되어 울게도 웃게도 만들었고, 내게는 어린 시절 여러 얘깃거리를 제공해 준 소중한 곳도 되어 주었다.

구순을 갖 넘기다 올해 세상과 작별하신 울 엄마도 살아생전 그곳 얘기를 종종 하시며 한번 가보고 싶다 하셨다.

지금 그곳엔 그때를 기억할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곳엔 엄마에게는 젊은 날의 아련함이, 나에겐 어린 날의 순수함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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