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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Dec 09. 2023
경상도 이쁜이 아줌마
긴 장마가 끝이 나고 뒤늦은 뙤약빛이 자신의 존재감을 옹골지게 뿜어내는 늦여름 즈음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 집에 여자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그녀는 꽃분홍색 원피스와 똑같은 색깔의 양산을 손에 들고 우리가 평소 듣지 못한 억양과 말투로
"안녕하십니꺼~’"
인사
하며 우리 집 판자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우리는
그녀를 ‘경상도 이쁜이 아줌마’라 불렀다.
그녀와의 인연은 아버지와 관련 있다.
아버지는 오랜 실직으로 수입이 없
자 임시방편 서류 작성과 신청을 대행해 주는 일을 잠깐 하신 적이 있다.
그 일로 벌여들인 얼마간의 수수료는 우리 집 생계에 작은
보탬이
었다.
전쟁미망인이었던 아줌마는 문턱 높은 관공서 상대가 어려워 국가유공자로 지정되기를 포기해 버리려다 운 좋게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국가유공자가 되신 아줌마는 나라에서 제공해 주는 여러
혜택을 받으며 막막했던 생계를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줌마는 아버지 덕
에
먹고살 걱정 없게
되었다며 항상 아버지를 은인처럼
말씀하셨
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목적을 달성한 대부분 사람들은 애초에 약속한 수수료를
찔끔찔끔하든가, 아예
떼
먹고 마는 사람들이 허다했는데 아줌마는 예외였다.
"정말 고맙십니더~"
진심 가득 사례하셨고
아버지와의 인연 또한 계속 잇고 싶다 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아줌마가 되려
고마웠을
것이
고, 엄마도 아줌마의 프러포즈를
아무
편견 없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아저씨예~'
엄마에게는 "아지매예~'
부르며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었다.
늦봄 끝자락을 지나 초여름 산들바람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기 시작할 때부터 우린
이쁜이 아줌마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녀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양손 가득 우리에게 줄 선물과 엄마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가 가지고 오는 ‘과자 종합선물 세트’에 완전 매료되었다.
누군가의 집에 어려운 발걸음을 할 때 빈손을 채워줄
선물로 그만한 것이 없었다.
평소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우며 있어 보이는 선물이었다.
텔레비전이나 있는 집 아이들의 자랑거리로만 여겨졌던 고것이 아줌마 손에 들려 우리 앞에 쫘~악 펼쳐질 때면 우리는 그 행복감에 도무지 입꼬리가 내려
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자 선물 세트는 상자 크기와 포장에 비해 내용물이 너무 부실해서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런들 어떠랴?
달콤한 해태껌과 찐한 맛의 가나 초콜릿, 먹을수록 손이 더 간다는 새우깡과 맛동산, 그리고 빠다 코코넛과 몇 가지 이름 모를 과자들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난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맥주 안주로 맛동산과 새우깡을 집어든다)
아줌마 또한 친정 나들이처럼 여름휴가처럼 설레는 맘으로 우리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 집 판자 대문 밑으로 작고 귀여운 채송화가 피어나고 하얗고 빨간 붓끝 모양 나팔꽃이 담 주변에 넓게 퍼질 즈음에 오셔서 대략 일주일 정도 머무르다 가셨다.
우리 집
형편으로 일주일 손님을 맞는다는 것이
참 옹색스럽긴 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아줌마를 학수고대 기다렸다.
"엄마, 지금쯤
아줌마 올 때 안 됐어?"
혹여 못 온다는 기별이라도 오면 크게 실망하여 맥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잔정이 없기로 소문난 엄마도 그 아줌마만은 친정 여동생처럼,
"왔소잉~~"
반기며 아줌마의 짐보따리를 흔쾌히 받아 들었다.
몇 안 되는 이웃들에게는 혹 아버지 세컨드가 아닌가 이러쿵저러쿵 오해의 소리도 들리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지는 법,
걱정할 필요가 1도 없었다.
더구나
아줌마가 있는 동안에는 엄마, 아버지가 싸울 일도 없고 평소 구경도 못 한 기름진 반찬도
올라오고 세간살이도 오밀조밀 정돈되어 있어 우리로선
손해 볼 것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아줌마와의 일주일은 우리에겐 또 하나의 명절처럼 기다리고
설레게 하는 작은 이벤트 기간이 되었다.
옛날에는 부모가 거처하는 방을 큰방, 애들이 기거하는 방을 작은방이라 불렀다.
하지만 우리 집은 정반대였다.
엄마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은 너무 작아서 큰방이라 부르기도 뭐 했지만
큰방이라고 불렀고, 우리 자식들이 기거하는 방은
엄청 컸지만 그냥 작은방으로 불렀다.
그렇게 청개구리 같이 뒤바뀐 방 2개에
일곱 식구가 복작대며 살고 있는데, 어쩌다 손님이라도 와 잠이라도 자버리면 혼돈의 카오스처럼 잠자리 재배치를 급히 해야 했다.
나는 막둥이여서 운 좋게 텔레비전이 있는 큰방으로 배치되고, 언니 오빠들과 손님은 널찍한 다다미방에 이부자리로 경계를 두어 각자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분꽃처럼 수수했던 엄마는 꽃다운 젊은 시절에도 반듯한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사셔서
우리는 엄마 화장품을 거의
구경하지
못하고 살았다.
기껏해야 로션과 루주(립스틱) 그리고 장롱 깊숙이 감추어 놓은 동동 구루무가 전부였다.
나는 한참 미모 가꾸기에 관심이 많아 요리저리 예쁘게 꾸며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엄마 화장품이라는 것이 너무 빈약해서
내 나름 멋 부리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질긴 풀줄기를 뽑아 머리에 똘똘 마는 꼬불 파마
를 하고, 아카시아 줄기에서 나오는 진액을 손톱에 발라 반짝반짝 네일아트도 하고,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빨간 루주를 몰래 훔쳐
바르며 작은 숙녀로 변신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아줌마의 화장품 가방은 마치 요술 가방처럼
눈이 다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요술 가방을 풀어놓고 꽃단장을 시작하는 아줌마를 구경하기 위해 눈곱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아줌마의 화장기술은
실력 좋은 미술가 같았다.
맨 먼저 기초화장품과 동동 구루무를
얼굴에 듬뿍 찍어 바른 후, 흰색 가제 손수건으로 침을 퉤퉤 묻혀 눈과 눈썹, 그리고 입술을 닦아냈다.
검정 연필(펜슬)로 경계가 흐릿한 위 눈썹과 속눈썹을 또렷하게 그려내고, 작은 입술 붓을 꺼내 입술 경계를
표시한 후 그 안에 새빨간 루주를
바르고 덧바르고를 반복했다.
마지막 화룡점정처럼 꽃분홍색 볼터치를 양볼에 툭툭 두드리고 나서야 드디어 그녀의 요술 가방 문이 쓰윽 닫혔다.
아줌마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쳐다보자,
"니도 한번 발라볼끼가?"
몇 개의 화장품을 꺼내 뚝딱 발라주시는데, 나는 그때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요로코롬 이쁜지 처음 알았다.
마치 그리스신화의 나르키소스처럼 나는 나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아줌마는 제일 어리고 붙임성 좋은 나를 앞세워 동네 마실도 나가고 돌산 밑이나 공원 주변 들판을 구경삼아 산책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절로 신이 났다.
그녀는 절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앞세워 볼일을 다 마치고 나면
"니 뭐 먹고 싶고 싶은 거 있나?"
점방(구멍가게)으로 데리고 가 설탕이 듬뿍 뿌려진 도넛을 사주거나 시뻘건 똬리 사탕을 한 움큼 쥐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더더욱 아줌마 옆에 딱 달라붙어 세 치 혀처럼 굴었다.
그럴수록 아줌마의 주머니는 더 자주 열렸고,
언니 오빠들도 더 많은 주전 버리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상냥하고 맘씨 좋은 아줌마에게도 깊은 슬픔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우리 집 마당 귀퉁이 평상 위에 엄마가 만든 호박 부침개와 마늘쫑 조림이 있는 둥그런 두레 술상이 차려진 날이다.
아버지와 아줌마는 그 술상을 마주하고 막걸리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갑자기 아줌마가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엄마를 돕는 척 그 주위를 맴돌다 가슴속 깊이 간직해 온 그녀의 고달픈 인생사를 엿듣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슬픈
영화처럼 코끝이 찌릿 아려왔다.
아줌마는 무능하고 손버릇 고약한 아버지를 피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얼굴 몇 번 본 동네 남자와 도피처럼 살림을 차렸다 했다.
아이가 뱃속에서 잉태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리라 부풀었던 그때 우리의 역사적 비극 육이오가 터지고 그녀의 젊은 남편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했다.
배는 점점 불러와 달이 차고 배 속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 아무런 기별조차 없는 남편은 끝내 전사자 명단에 이름이 올리고 나서야 그녀에게 첫 소식을 전했다.
아비 없이 태어난 아들은 첫울음부터 유복자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줌마는 통곡하듯 울었고 주변에서는 혀를 끌끌 차며 위로인 듯 멸시인 듯 그녀의 기구한 팔자를 탓했다.
몇 번 죽어버릴까 새 남자를 만나 볼까 유혹도 많았지만 결국 이렇게 전쟁미망인으로 살아남아 나라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며 지금은 작은 식당 하나 차려 그런대로 살 만하다 했다.
하지만 일가친척 모두 연줄이 끊기고 여자 혼자 생때같은 아들을 어찌 키워야 할지 솔직히 자신 없다며,
"아저씨예~ 아지매예~ 지가 잘 살 수 있을까예?..’"
젖은 침을 연신 삼키며 물으셨다.
아버지는 이미 정해진 답이라도 제시하듯,
"열심히
살면
다 잘될 겁니다"
대답하셨다.
몇 병의 막걸리 통이 거의 다 비워지고 엄마의 안주도 서서히 바닥이 날 즈음이 돼서야 아줌마는,
"그래도 아저씨와 아지매가 있어 지는 큰 의지가 됩니데이~"
는 말을 잊지 않으시고 그녀의 마지막 술잔을 비워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지만, 우리와 아줌마와의 인연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줌마는 노심초사 그 아들이 잘 되기만을
바랬다
.
하지만 그 녀석은 공부에는 전혀 염사가 없고 설상가상 가출을 밥 먹듯이 한다며 땅이 꺼져라 아버지에게 하소연하곤 했다.
집에 남자가 없으니 더 그런 것 갔다며 아버지에게 ‘아버지처럼...’ 따끔한 훈계를 해달라는 말에
"언제 우리 집에 한 번 데리고 오시오~"
아버지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그러나 그 녀석이 쉽게 우리 집에 등장할 리 만무했다.
나는 딱 한 번 아줌마의 외아들이자 아버지의 그 녀석, 나에겐 오빠뻘인 그를 보았다.
마지못해 아줌마의 손에 이끌려온 듯 그는 칙칙한 여드름 피부에 운동화 뒤꿈치를 꺾어 신은 채 우리 집으로 투덜투덜 들어섰다.
아버지도 그도 첫 대면에서부터 서로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엄마가 그토록 의지했던 아버지와 우리 집 모양새가 너무 별 볼일 없어 실망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커버린 산 만한 덩치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뭐하노~ 큰절 올리지 않고?"
아줌마는
복화술과 함께
눈을 흘겼고 그는 마지못한 듯 풀썩 큰절을 올리고선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후로 아버지의 훈화가 한참 동안 이어졌겠지만, 그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져 갈 뿐 그의 앙다문 입술과 반항 가득한 눈빛을 마주한 아버지로선 사면초가 뾰족한 방법 또한 없었을 것이다.
작은오빠가 군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아줌마는,
"잘 다녀오그래이"
몇 푼의 용돈을 오빠 손에 쥐여 주며 휴가 때 꼭 자기 집에 놀러 오라 하셨다.
오빠는 정말로 첫 휴가를 나와 여행 겸 그녀의 집에 다니러 갔다.
몇 밤을 보내고 천천히 돌아오겠다던 오빠는 어찌 된 일인지 하룻밤만 겨우 보내고
돌아왔다.
그때 오빠가 전해준 그녀의 삶은 우리가 상상해 왔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있었다.
그녀의 식당은 품팔이 아저씨들의 잔술을 채우는 너무나 작은 선술집이었고, 식당 뒤쪽 방 한 칸에는 군식구인지 새로운 인연인지 모를 중년 아저씨의 소지품이 곳곳에 널려져 있었다 했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도 했다.
아줌마는 오빠를 맞을 시간도 여력도 없는 듯 내리 국밥만 말다가 늦은 밤이 돼서야 손님 대접이라며 한 쿠리의 메추리알을 삶아 오빠 앞에 내밀었다
.
" 많이 먹그래이... 미안타,, 내가 쫌 바쁘데이..."
오빠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기 멋쩍어
다음 일정을 핑계로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우리는 그때까지 화려한 차림새 뒤에 감춰진 그녀의 고달픈 생활고를 눈치채지 못했고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기만 했던 아줌마의 주머니 사정은 그 모진 삶의 대가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삶은 시작도 그러했듯 중년의 삶 또한 그러했고 노후의 삶 또한 그러할 것만 같아 가슴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은 여기까지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잊은 경상도 이쁜이 아줌마~
이제 그녀와의 기억은 색 바랜 옛날 사진처럼 사진첩에 갇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회상한다.
그녀는 나에게 보라색 팬지꽃처럼 신비롭고 찔레꽃의 향수처럼 달콤했던 내 어린 날의 ‘기다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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