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깍두기 무 한 조각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ㅡ6

딸내미가 멀리 취업해 급히 방을 구해야 했다.

코딱지만 한 방 하나에 보증금이며 월세가 장난 아니다.

아쉬운 대로 좀 비싸더라도 출퇴근이 가깝고 편리한 시설과 안전성을 보장해 주는 곳으로 급히 계약을 맺었다.

새롭게 월세살이라는 것을 시작한 딸내미에게 엄마에게도 꾸깃꾸깃 감춰둔 셋방살이 옛 시절이 있었노라 말하니,


"엄마 얘기는 끝이 없구만..." 귀를 쫑긋 세우며 내 얘기를 재촉한다.


집주인이 안채를 차지하고 나면, 마당 터에 임시로 방을 놔 여러 채의 단칸방들이 칸칸이 채워져 있는 곳, 집주인보다 객식구가 더 많아 내 집도 아니고 네 집도 아닌 그 당시의 셋방살이 풍경.

우리 집도 아버지의 실직으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방 한 칸 세를 얻어 셋방살이라는 것을 시작해야 했다.

그중 여러 집을 돌고 돌다 유독 길게 터를 잡았던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을 동네사람들은 탱자나무집이라 불렀다.

그곳은 뾰족한 가시 사이로 노란 알이 토실토실 맺혀 그 넝쿨로 담을 이루고 있고, 뒷마당 쪽엔 생활하수가 지나가는 또랑(도랑)이 큼큼한 냄새를 머금어 흐르고 있었다.


탱자나무집에는 3대가 함께 한 집주인 네와 나와 동갑내기인 순자네, 흑인 군인과 살림을 차린 흑인댁네, 그 외 흐릿한 기억의 몇몇 가족이 더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동으로 수도와 화장실을 공유하며 요령껏 비집어 살았고, 끼니때면 수돗가에서 엄마들이 쌀과 보리, 채소를 씻으며 밥 준비를 함께하곤 했다.

아이들은 좁은 마당 구석에 옹기종기 놀며 엄마들이 음식 준비하는 모습을 힐끔거렸고, 그날 자기 집 밥상에 올라올 음식과 다른 집 밥상을 비교하며 침을 꼴딱거리곤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별나게 먹심(먹는 욕심)이 강했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족하다면야 '참 잘 먹는다' 예쁨 좀 받았을 터지만 먹거리가 흔치 않던 그 시절엔 그리 달갑지 않은 아이였으리라~

나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먹을 기회와 장소만 있다면 만사 제쳐두고 기웃거릴 정도로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으로 남의 집 밥상에 숟가락 얹기 부지기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숟가락을 얹었던 곳이 순자네였다.

그 집 또한 우리보다 형편이 더 나을 것도 없던 것이, 그 집 아저씨는 간간히 품을 팔며 생활비를 마련하셨고 아줌마는 그냥 가정주부셨다.

내가 그때 주로 순자 집을 공략했던 것은 순자가 무남독녀여서 그나마 형편이 우리보다 나아 보였고, 수더분한 순자 엄마가 가장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자 엄마가 수돗가에서 보리쌀 한 톨 없는 매끈한 쌀만 씻는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때는 보리가 쌀보다 많이 저렴해서 우리는 보리와 쌀을 거의 8:2 비율로 섞어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삼시세끼 입안을 헛도는 깔깔한 보리밥만 내리 먹어야 했는데 순자네는 달랐다.

끼니때마다 달큼한 쌀밥만 먹는 것이다.

엄마가 수돗가에서 보리쌀을 씻으면,


"그 집은 무슨 보리쌀을 그리 많이 씻어요?" 했던 순자 엄마에게


"불려 먹으려고 미리 많이 씻는 것이요" 엄마는 둘러대곤 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한 끼에 다 놔 먹을 보리쌀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먹고 나면 여지없이 소화를 못 시켜 화장실에 들락거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언제부턴가 밥때가 되면 순자네에 놀러 가 은근슬쩍 그 집 밥상 앞에 앉아있곤 했다.

운이 좋으면 눈처럼 희고 보드라운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순자 엄마가 내 속셈을 눈치채고 선,


"너 집에 안 가냐? 집에서 엄마가 안 찾냐?" 해도, 나는 눈만 껌뻑껌뻑


"괜찮아요. 나 여기 있는지 엄마도 알아요"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럼 너희 집에 가서 니 밥 가지고 와서 먹어라"


보다 못한 순자 엄마의 그 말은, ‘제발 좀 가라’는 뜻이었을 텐데, 나는 진짜로 우리 집에서 꽁보리밥 한 그릇을 냅다 들고 다시 그 집 밥상 앞에 앉았다.

그때 그 순자 엄마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짐작은 간다. 하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순자 엄마가 내 꽁보리밥을 크게 두 수저 떠서 자기 밥그릇에 옮기고, 자신의 쌀밥 두 수저를 내 밥 위에 얹어주어 내가 맛있게 먹었으면 된 거 아닌가?


안채는 집주인 네가 살았다.

어느 날 피부가 뽀얗고 눈·코·입이 오목조목한 새색시가 그 집 큰오빠와 결혼하여 새살림을 들였다.

나는 수줍게, 그러나 항상 상냥하게 웃는 언니가 너무 아름다워 그녀의 행동거지를 자주 힐끔거리곤 했다.

언니에겐 몇 가지 루틴이 있는 것 같았다.

집안일을 끝내고 저녁때가 되면 머리에 똬리 수건을 두르고 얼굴에 콜드크림으로 듬뿍 발라 오랫동안 마사지를 했다.

대신 아침에는 일절 세수를 하지 않았다.

낮에는 머리를 올백으로 묶어 머리카락 하나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야무지게 단도리하며 지냈다.

그런 언니가 내 눈에는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노랑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고, 마법 같은 콜드크림도 발라보고 싶었지만, 언감생심 우리 집에 그것이 있겠는가?

대신 아침에 세수를 안 하고 건너뛰다 괜히 엄마에게 지청구만 듣고 말았다.


대식구 집주인 네는 새 김치를 자주 담갔다.

새색시가 시집온 후론 김치 담그는 일은 주로 그 언니가 도맡아 했다.

어느 날 깍두기를 담그려는지 알통만 한 무가 고무통 한가득 쌓여 있었다.

과일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엔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무가 간식거리 역할을 톡톡히 할 때다.

수돗가 한가운데서 깍두기 무 자르는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고, 아이들은 마당 귀퉁이에서 패를 나눠 공깃돌을 추켜올리고 있을 때 새댁 언니가 큼지막하게 무 몇 조각을 쓰윽 썰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하나씩 먹고 놀아라."


나는 아삭한 즙을 한가득 머금고 있는 무를 베어 물고 나니 더 이상 공기놀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자리를 떠나기도 싫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시 공기놀이하러 가든지 말든지, 짝이 맞지 않는다며 빨리 오라 소리 지르든지 말든지, 나는 잔심부름이라도 할 요량으로 아예 그 언니 옆에 엉덩이를 디밀고 앉아버렸다.

그런 나를 차마 내치지 못한 언니가 몇 번 더 무를 건네주더니 전혀 갈 생각이 없는 찐드기에게


"야! 너도 이제 저기 가서 좀 놀아라" 눈을 있는 힘껏 흘기는 것이다.


헉~. 나는 그 언니에게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나는 눈물이 날 만큼 놀래서 후다닥 엉덩이를 들고 마당 대신 방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 버렸다.


지금 그 언니는 유명한 갈빗집사장님으로 큰 성공을 거두셨다.

우린 지금도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종종 그 맛집에 찾아가 옛 얘기를 나누며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소싯적에 '깍두기 무 한 조각'을 얻어먹기 위해 그런 짓까지 했다는 얘기를 우스개 삼아 전하니 언니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오매~오매~" 박장대소하신다.


그리고 깍두기 한 접시를 주방에서 그득 담아 오시며


"많이 먹으소~" 내 앞에 쓰윽 내놓는다.

탱자나무집은 미군 부대가 인접해 있어 가끔 주한미군과 기간을 정해 살림을 차리는 여자들이 있었다.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여서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시작한 그녀들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사랑인 듯 타협인 듯 미군과 신방을 차렸다.

대문 바로 옆 문간방에도 흑인 군인과 사는 흑인댁(그 당시에는 ‘양색시’라고 했다)이 살았다.

같은 지붕 아래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살림을 오픈하곤 하는데 문간방 흑인댁네는 항상 방문이 닫혀있어 꼭 '비밀의 방' 같았다.

흑인댁은 최소한의 활동만 밖에 나와서 했고 엄마들도 그 집과는 거의 말을 트지 않고 지냈다.

대신, 가끔씩 그 방을 힐끔이며 속닥거리곤 했는데 별로 좋은 말들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그 방 가까이 가지 말라는 단도리를 따로 하기도 했는데 난 엄마의 무한 방임으로 특별히 그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냈다.


나는 야리야리한 몸매에 은은한 향수를 머금은 언니와, 가끔 인상 좋게 웃던 흑인아저씨와의 방이 무척 궁금해 그 방 앞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어느 한 날, 언니가 방문을 삐죽 열더니 내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비밀의 방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니 이상한 냄새 같은 향기가 났다.

그리 나쁘지는 않고 그렇다고 좋지만도 않았던 그 잊을 수 없는 냄새. (지금까지도 그런 냄새를 맡아보지 못했다)

조명 또한 특이했다.

불을 켜면 너무 밝고 불을 끄면 너무 칠흑 같았던 우리 집 백열등과는 사뭇 다른 조명들이 방안 군데군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컸던 텔레비전과 보드라운 침대, 식탁과 소파가 발 디딜 틈 없이 방안 가득 메워져 있었다.

언니는 내게 미국 과자인 듯 비스킷과 콘을 가져와 먹어보라며 손에 쥐여주었다.

난 그때 미국 과자는 맛이 참 찐하다 생각했다.

엄청나게 쓰고 엄청나게 달았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맛났다.

그 뒤로도 몇 번 흑인 아저씨가 출근하면 언니는 내게 미국과자를 건네주곤 했다.

딱 한 번이지만 언니가 차려준 식사도 함께했다.

아이비 색 소스가 뿌려진 이상한 야채를 맛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양배추샐러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날, 언니가 흑인 아저씨와 미국으로 들어가게 됐다며 급히 방을 빼줬으면 한다고 주인아주머니께 말하는 것을 들었다.


"갑자기 그러면 어쩐다요? 다른 사람을 들여야 돈을 내주지" 툴툴대던 주인아주머니 뒤에서는 엄마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함께 미국은 무슨. 깜둥이 근무가 끝났으니 깜둥이 지 혼자 갈 것이고 저것은 그냥 여기에 내쳐지는 것이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 언니와는 특별한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70년대 중·후반이었던 그 시절.

우린 그렇게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살았다.

사는 집도 집이지만 먹거리가 풍족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성장기였던 우리는 항상 허기가 져 입맛을 다시며 지냈다.

엄마는 먹을 것만 보면 게 눈 감추듯 먹어대는 자식들 먹성 때문에 음식 내놓기가 무섭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니 어쩌겠는가?


나는 아직까지도 그 버릇이 남아 있어 먹을 것만 보면 욕심부터 부려 매번 위장을 탈 나게 만든다.

50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뷔페 가는 걸 좋아하고 유튜브 먹방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전혀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진:다음 이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어릴 적 별명은 600원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