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6살, 한국 나이로 7살에 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특별히 내가 똘똘해서라기보다 언니, 오빠들 따라가겠다고 마냥 떼쓰는 내가 귀찮아서 내린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또래 보다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았던 내가 더구나 한 살이나 더 어렸으니 얼마나 쪼매만 했을까?
항상 제일 앞줄 1번이 내 단골 자리였다.
입학식날 맨 앞에서 무용을 어찌나 예쁘고 요시랑스럽게 따라 했던지 선생님들이
'"아따 고것 참 잘 하네잉" 한 마디씩 하더라는 얘기를 입학식날 오신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국민학교 1학년 담임은 박o석 선생님, 짝꿍은 약국집 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력이 좋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담임 선생님은 정말 내 생애 첫 번째로 좌절과 당혹감을 주신 분이어서 잊을 수가 없다.
그때만 해도 차별이 좀 노골적 이였다.
약국집 짝꿍은 화분도 사 오고 부모님도 자주 학교에 얼굴을 내비치시는 데, 나는 부모님은 커녕 꼴랑 면걸레 하나 만들어 오지 못할 만큼 궁색스러웠으니 얼마나 비교가 됐을까?
난 그때 너무 볼품없었고, 어리바리했고, 선생님 말씀이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어 항상 놀란 토끼처럼 굴었다.
심지어 숙제가 뭐였는지, 오전반 오후반(그 당시에는 학생 수가 많고 교실이 부족하여 2부제 수업을 했었다)이 언제인지도 몰라 매번 허둥댔고, 혼났고, 틈만 나면 질질 짰다.
한 번은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며 박선생님이 내 책과 공책을 교실 밖으로 사정없이 패대기치며 화통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쩌어기 가서 손들고 서있어! "
나는 어찌나 무섭고 창피하던지,
"언니야~ 언니야~ " 잉잉 울면서 5학년 작은언니 반으로 뒤도 안보고 도망쳐버렸다.
언니 무릎에 앉아 한참동안 5학년 수업을 들으며, 학교에 무섭지 않은 예쁜 선생님도 계시다는 것과 5학년 수업도 그런대로 들을 만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당시 반장의 위세가 참 대단했는데, 우리 동네 유지의 딸 정주가 반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앙칼지고 사나운 아이에게 선생님이 완장까지 채워줬으니 그 권세가 오죽했을까?
선생님만큼이나 드높았다.
선생님에게 쥐어 박히기도 다반사였지만 툭하면 정주에게 벌도 서고 혼도 났으니 얼마나 학교생활이 싫었을까?
반장은 우리만 보면 얼굴을 위로 치켜들며,
"야~ 니들 내 말 잘 들어야 한다잉, 안글믄 국물도 없다잉" 우리를 한 없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내 국민학교 시절은 찌질함의 극치를 달렸다.
공부는 당연히 못했고 자신감도 없었으며 존재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못난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학교만 가려하면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려 거의 반은 결석을 할 정도로 학교기피증이 심했고, 학교에서는 점점 쫄보가 되어갔다.
대책 없이 학교를 보내놓고 자식교육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없는 부모님, 최소한의 지원조차 못해주는 가정형편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선 화가 좀 난다.
혹,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가 언제였냐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국민학교 시절이였다 말할것이다.
그렇게 나의 최초 조직생활, 국민학교는 혹독하고 서글프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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