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 아버지라는 이름....
해 같이 달 같이 오랠 이름...
아. 버.지.
1929년생 아버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까지 겪으신 근현대사의 역사적 산증인이시다.
175센티 키에 이목구비 뚜렷하고 머리숱 많은 미남형으로, 나는 어릴 적 신성일 다음으로 아버지가 젤 잘생겼다 여겼다.
총각 때 군청 사무원으로 일하시다 학벌 좋고 부잣집 딸인 엄마와 맞선으로 결혼하셨다.
얼굴 덕을 본 게 틀림없다.
잘생긴 외모만큼 손재주, 말재주, 글재주에도 특출 나셨다.
집에 있는 목공예와 서예 작품, 그림과 장식품은 모두 아버지가 손수 창작하고 제작했다 보면 된다.
아쉬워 죽겠다. 자식들은 그 재능을 충분히 물려받지 못했다.
굳이 나는 말재주 쪼끔, 작은 오빠는 손재주 쪼끔. 그 정도? (위 그림 'by 우기'는 울 작은 오빠다.)
아버지는 머리 좋고 아는 것 많고 언변도 좋아 도움 청하는 주변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당신 또한 불의를 참지 못하고 크고 작은 민원과 송사에 사사건건 관여하셨다.
국민학교 4학년 땐가 보다.
안경 쓴 여자담임이 깨진 교실유리창값을 우리에게 가지고 오라는 거다.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학교 유리창 값을 왜 학생들이 내냐며 항의전화 하겠다 열불을 내셨다.
다음날 걱정을 한가득 안고 학교에 가니, 아니나 다를까 안경담임이 잔뜩 화가 나 학교에 전화한 부모가 누구냐며,
"야! 니들 모두 눈 감아봐. 학교로 전화한 부모가 누구여? 좋게 말할 때 손들어라"
나는 어찌나 가슴이 뛰고 겁이 나던지 마른침만 삼켜질 뿐 차마 손이 올라가지 않는데 같은 반 남자애가 거의 죄인이 다 되어 손을 빠끔히 드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레이저 눈빛이 그 애에게 쏠리는 순간 난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그 외에도 라디오나 신문 등에 틈만 나면 민원을 넣으신 통에 기자들이 빈번히 우리 집에 찾아오곤 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고 했던가?
이렇게 똑똑한 아버지지만 당신 삶은 그리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결혼 후 첫 번째 시련이자 우리 집 고난의 시발점이 된 것은 번듯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한 일이다.
그 후 역전을 꿈꾸며 구직을 향한 아버지의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돌아온 건 고배의 잔 뿐이었다.
아버지의 도전은 거듭된 좌절만 안겨준 체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우리 생활은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신혼 초에 마련한 집부터 처분해 급한 생활비로 융통하고, 전셋집에서 두 칸짜리 월세로, 두 칸에서 한 칸짜리 월세로 옮겨 다니는 메뚜기 생활이 이어졌다.
어렵사리 구한 무료 회관마저 쫓겨나 손때 묻은 세간살이가 길바닥에 나뒹굴 때는 일곱 식구가 비바람 하나 피할 곳 없는 황망한 현실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궁색한 삶에 치를 떨어야 했다.
아버지는 식솔들 누울 방도, 세끼 밥도 먹기 힘든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뭐라도 하셔야 했다.
궁여지책 대서소 대행 업무를 했을 땐, 수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의 뒤 무름과 허술함에 엄마와 하루가 멀다 하고 입씨름만 하셨다.
마음이 급해진 아버지는 철저한 준비 없이 마구잡이로 운송사업, 수박 밭떼기장사, 집장사에 손을 대셨지만 매번 어처구니없이 망하고 말았다.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지지리도 운 없고 풀리지 않은 인생이었다.
평소에도 애주가였던 아버지는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며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셨고, 설상가상 끝도 없는 술주정으로 엄마를 밤봇짐 싸게 만들었다.
우린 허구한 날 눈물바람을 하고 살았다.
암울하고 암담했으며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하루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갔던 때였다.
어렵사리 연수원 관리원으로 취직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집안의 한줄기 희망이 되었다.
우리는 초라했지만 삶의 터전도 마련되고 일정한 수입도 갖게 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관리일은 시간이 자유로워 아버지 손에 술잔이 떨어진 날이 없었다.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헛기침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인기척은 평온한 집안에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처럼 불안하고 서늘해 아버지 귀가가 늘 싫었다.
"아~ 아부지 들어오신다...."
당연히 평온한 집안분위기는 애초에 기대하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맨 정신으로 계실 땐 내 가슴이 다 뛸 정도로 멋진 남자였지만, 술만 드시면 내가 제일 혐오하는 모습으로 나를 분통 터지게 했다.
두 분은 아웅다웅 싸움도 질리도록 하셨다.
감수성 풍부한 아버지는 곰 같은 엄마에게 늘 불만이셨고, 엄마는 가장으로서 능력 없는 아버지가 같잖게 보여 매번 앙앙거리셨다.
아버지는 오직 엄마만 바라보며 시시콜콜 잔소리로 한세월을 허비해 버리셨다.
어린 내 눈에도 참 한심하게 느껴져 원망도 많이 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아버지 건강은 빠르게 나빠졌고 급기야 간경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여러 번의 입원과 치료, 퇴원을 반복하며 술을 끊지 않으면 죽는다는 의사의 사망선고를 받고서도 술잔을 놓지 못하는 바람에 59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는 집에서 임종하셨다.
병원에서 더는 치료할 것이 없다며 퇴원을 통보했다.
아버지 임종날, 나는 아버지 옆에 바짝 누워 뒹굴 뒹굴 TV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반쯤 풀린 눈으로
"야~ 야~ 쩌리좀 가라~ 휴~~"
힘 빠진 목소리로 내뱉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각인처럼 내 뇌리에 박혔다.
그 말 뒤끝에 아버지는 내 옆에서 숨을 멈추셨다.
드라마에서는 유언도 그럴싸하게 하고 감동적인 헤어짐도 하고 막 그러더니만, 아버지는 그렇게 톡톡히 정을 떼고 가셨다.
내 대학졸업식 4일 전에 상을 당해서 난 학창 시절 마지막 졸업식에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도 참 많다.
난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한 유일한 자식이다.
귀여운 막둥이가 애교까지 많아 아버지를 웃음 짓게 했고 학창 시절 내내 속 한번 썩이는 일 없이 수말스럽게 컸다.
동네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
"난 나중에 우리 막둥이랑 살 거요"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신다 했다.
외출할 땐 막둥이 손만 붙잡고 대문을 나섰고, 만들기 숙제도 뚝딱 해주시고, 옛날얘기도 어찌나 실감나게 하던지 난 동화책보다 아버지 얘기가 더 재밌고 유익했다.
내 감칠맛 나는 말재간 또한 아버지 덕분이 아닐까 싶다.
기분 좋을 때는 다 큰 중학생을 어화둥둥 업어주실 만큼 넘치는 사랑을 주셨기에 지금 내 자존감의 원천이 되었음직 하다.
"어이 막둥이~ 아부지한테 한번 업혀 볼텨?"
내 인생 황금기 대학교 시절,
내가 빛나는 청춘에 취해 세상모르게 사방을 휘젓고 다닐 때 아버지는 하루의 긴 시간을 병석에 누워 라디오와 함께 홀로 집을 지키셨다.
가끔씩 들려주는 내 대학생활 최고 애청자가 되어 재미나게 듣고 흐뭇해하신 울 아버지~
내가 졸업반이 되자 아프신 와중에도 내 취업을 위해 애써 주셨지만 역부족인 듯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확히 4개월 후, 난 당당히 내 힘으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기쁨도 잠시 '넉 달만 좀 참으시지~' 생각하니 꺽꺽 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자랑하기를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
기특한 막내딸 취직을 얼마나 기뻐하실까,
기적 같은 내 취직이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준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여러 생각이 흩어지며 주최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내 통곡의 또 하나 이유라면,
한평생 풀리지 않은 삶을 살다 가신 아버지의 한과, 사나이로 태어나 기 한번 펴지 못하고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의 인생이 슬프도록 슬퍼서였다.
더 좋은 날을 맛보지 못하고 너무 일찍 세상과 등을 진 울 아버지 ~
잘난 외모에 범상치 않는 재능, 좋은 머리를 가졌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모진 고생 하셨고,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자괴감과 풀리지 않은 세상에 대한 원망만을 가득 안고 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지금도 아버지 인생을 생각하면 아쉬움 한 가득이다.
혹 어딘가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곳에서 못다 한 영화와 풍류를 그곳에서 맘껏 누리셨음 하는 염원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이름 모를 한 마리 새가 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면 혹시 아버지가 환생하여 우리 곁에 잠시 오신 것은 아닌가 상상해 볼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한 마리 새를 보아도, 가장 작은 존재인 애벌레와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아버지~
오랜만에 엄마 만나보시니 어떠신가요?
첫선 볼 때처럼 설렌가요?
긴 세월 이별 끝에 드뎌 엄마와 영원한 만남을 가지셨군요.
그곳에서는 제발 싸움 그만하시고 알콩달콩 사세요.
엄마 위로도 좀 해주시고요
엄마도 아버지 없이 힘들게 살다 가셨거든요.
울 엄마 잘 부탁드리고, 언젠가 저희와도 꼭 만나요.
사랑합니다. 아. 부. 지.
- 600원짜리 막둥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