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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반 아이가 선도부 학생이 되었어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사진: 다음 이미지


녀석들은 사춘기라 하고, 나는 천지가 개벽한다는 갱년기라 외친다.

60줄이 낼 모레인 아줌마 선생과 열대여섯 살 사춘기 녀석들과의 공생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

'사춘기가 뭔 벼슬인가?' 싶다가도, 내 사춘기 시절도 생각나고 해서 이해하자~애써본다.


"하지만 얘들아~ 살살 좀 하자. 선생님 목표는 정퇴(정년퇴임)다. 협조 좀 해주라~"


누구나 인생의 터닝포인트 순간은 있을 것이다.

미처 인지하지 못했거나, 미처 허망하게 흘러 보냈거나~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 순간은 언제였을까?


사춘기와 함께 시작된 내 중학 시절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내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에 물음표가 생기면서, 어려운 형편에서 오는 초라함보다 공부를 못하는 내가 미치도록 싫어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난 공부를 왜 지지리도 못할까?'


- 우리 국민학교 때는 세종반(우수반), 은하수반(보통반), 개나리반(하위권반), 옥돌반(학습부진반: 이름 한번 노골적이다 ㅎ)으로 학생을 분류해서 교실 뒤편에 이름을 붙여놓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수업이 끝나고도 구구단이나 한글공부를 더 해야 하는 '개나리반' 학생이었다-


중학교에서 첫 담임은 남자 수학선생님이었다.

인상은 훈훈했지만 강한 카리스마로 우리를 초반부터 벌벌 기게 만들었다.

그분은 공부 잘하는 애들에겐 금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웃어주었고, 못하는 애들에겐 사사건건 엄격하셨다.

당연히 내게는 엄격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이런 이분법적 처우가 부당하고 억울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때부터 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길은 오직 공부뿐이라 생각하며 (거짓말 많이 보태서) 자나 깨나 공부만 했다.

다행히 그땐 공부 양이 많지 않았고 경쟁 또한 심하지 않아 조금만 노력해도 눈에 띄게 성적이 향상되던 호시절이었다.

내 성적이 서서히 상승곡선을 타게 되자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이 놀라워했고 내 자신감에도 불이 붙기 시작하자 절로 신이 났다. '그래~ 난 더 더 더 잘할 수 있어!'

난 학교가 끝나도 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냅다 달려갔다.

그곳에서 공부도, 사색도 , 꾸벅 졸기도 하다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어스름 도서관 문을 나설 때 가슴 한가득 차오르는 충만감은 그야말로 짜릿했다.

영란이는 집안 형편으로 1년 휴학하고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다.

늦은 입학만큼 학구열에 불탔던 영란이는 일요일만 되면 나를 보챘다.


"야~ 학교 가자~거기서 숙제도 하고 놀고 그러게야~"


우린 텅 빈 교실에서린 숙제도 하고, 1인칭과 3인칭 바꾸는 영어문법도 공부하고, 영어단어도 외우고, 간단한 수학공식도 풀며 학교에 대한 적응을 빠르게 해 나갔다.

입이 출출하면 책상서리도 좀 했는데, 잘 뒤져보면 라면수프며 올벼쌀, 심지어 칡뿌리까지 나왔다.

올벼쌀... 청소시간만 되면 왜 그렇게 쌀이 많이 쓸려 나오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 절친 진선이 소개로 영어과외도 짧게 몇 달 다녔다.

엄마에게 몇 날을 졸라 겨우 허락받은 나의 첫 과외였다.

가정교육과를 다녔던 과외샘 집은 오래된 소나무가 정원 가득 심어져 있는 전통 한옥으로 꽤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완전 TMI 긴 하지만, 과외선생님 아버지는 교장선생님, 남동생은 서울대생이었다.

방학이었을까? 휴학 중이었을까? 가끔 서울대 오빠와 마주치곤 했는데 나는 괜스레 얼굴이 벌게지고 몸이 비비 꼬여 얼른 과외방으로 도망쳐 버리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나나를 맛봐봤고(그땐 바나나가 엄청 비쌌음) 평소 못 먹었던 음식들도 얻어먹었다.

과외비가 5,000원이었는데 내가 돈이 없어 관두겠다 하니 그 착한 선생님이 나만 특별히 3,000원으로 깎아주시는 인정도 베푸셨다.

하지만 같이 과외했던 슈퍼집 희연이가 마지막 과외비를 통째로 떼먹어버리는 바람에 우리까지 뵐 면목이 없어 다시는 선생님 집에 놀러 가지도 못했다.


공부에 대한 열의가 극에 달하니 그리 좋아하던 노래와 춤도 딱 끊어버렸다.

'모두들 춤꾼 *랑이를 잊으시라~'

심지어 1박 2일 수학여행 가서도 나만 꿋꿋하게 일어나지 않고 버텼는데,

카세트녹음기 틀어놓고 얌전한 애들도 모두 일어나 사정없이 흔들고 소리 지르던 그 시간,

공공연하게 허락된 광란의 시간마저도 난 꿈쩍하지 않았다.

'왜냐? 난 공부해야 하는 아이니까 '


작은 감투지만 선도부 완장까지 차게 되었다.

개나리반 출신으로 줄반장 한번 못했던 내게 그 완장은 훈장 이상으로 빛나고 의미 있는 물건이었다.

주로 등교시간에 교문을 지키며 학생들을 지도, 감독하는 일을 했다.

명찰을 달지 않거나, 교복이 불량하거나, 규정보다 머리가 긴 아이들이 완장찬 나를 보면 엄청 쫄고 그랬는데, 그때 나도 미처 몰랐던 파워감이 드러나 나도 좀 놀랬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구만'


선생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특권도 누렸다.

그 당시는 선생님에게 인정받아야 심부름도 할 수 있었다.

학생들 하교 후 선생님들이 친목배구대회를 자주셨는데 몇몇 차출되어 도우미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선생님들 음식을 차려드리고 남은 떡이랑 과일, 과자들을 몽땅 먹을 수 있는 행운도 좋았고, 한 번도 심부름을 하지 못했던 내 짝꿍 숙자의 부러운 눈빛도 싫지 않았다.


아버지 유전자 덕에 갖게 된 내 말빨은 친구들에게도 통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하이틴 로맨스나 아버지에게 들었던 여우 괴담까지 수많은 얘깃보따리를, 민방위 훈련 시간에 운동장에서 비닐포 뒤집어쓰고 쫘악 풀어놓으면 그 주변이 다 조용해질 만큼 친구들은 초집중해서 들었다.

'천상 이야기꾼'으로 소문난 나는 당연히 친구들도 많게 되었다.

나는 특히 시골출신 아이들과 더 친하게 지내며 그녀들 집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시골에서 과수원이나 과일밭을 하는 애들과 친해지면 원 없이 과일도 먹고 돌아올 땐 한 움큼 얻어올 수 있어 무조건 땡큐였다.

참외밭집 순이도, 복숭아집 미선이도, 수박밭을 했던 경순이도 다 내 친구가 되었다.

포도밭을 했던 쌍둥이 희순이 희숙이, 딸기밭을 했던 오경이 와도 가깝게 친분을 쌓았다.

그녀들과의 친분의 대가는 참 풍성했고, 그 덕에 난 성장기 배를 채워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친구들도 두루 사귀고 존재감도 생기면서 '자신감'이라는 세 글자가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고, 잠재된 나의 능력이 발현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회를 준 그 시절이었다.

누군가 '네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터닝포인트 순간이 언제였냐' 묻는다면, 아웃사이더 같은 나를 인싸로 전환시켜 준 그때라고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그때의 삶의 조각들은 지금도 내 기억 창고에 켭켭히 쌓여 있다.

그러다 내 마음속 에너지가 고갈될 때, 삶이 힘들고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과 마주할 때 훅 떠오른다.

그럴 때면 오래 묵혀둔 졸업앨범을 꺼내 놓고 귀밑 1센티 단발머리에 앙당문 입술로 앞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한 소녀와 눈을 맞추어 본다.

그러면 소녀가 내게 다정스레 말을 건네온다.


‘당신 잘 살아왔군요, 그럼 됐어요, 앞으로도 잘 살아가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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