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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10(?)번 옮겨 다닌 그녀의 자취방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사진: 다음 이미지


내 다섯명의 여고 친구는 모두 시골출신이다.

그녀들은 나만 빼고 모두 자취생 신세였는데, 내가 자취생들과 친해진 이유는 자유분방하게 나다녀도 특별한 제재가 없는 부모님의 방임 때문이었다.

우린 그때를 시작으로 청춘을 함께 보내고 결혼해서 새 안식처를 찾을 때까지 주야장천 어울리며 말 많고 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주 아지트는 정미 자취방이었다.

정미는 영광 와룡리에서 올라온 내 첫 짝꿍이며, 3년 내내 나와 가장 친한 친구다.

그녀의 첫인상은 촌스러운 느낌에 히죽히죽 잘 웃는 상으로 처음엔 내가 좀 만만하게 봤다.

하지만 매력적인 보조개와 여성스러운 자태를 지닌 참 예쁜 친구다.

정미 집 형편은 그닥 좋지 않은 듯했다.

하여 그녀는 구하는 자취방마다 궁색하기 그지없었고, 3년 동안 10번(사실 정확지는 않음-걍, 많았다는 느낌으로 이해하기 바람)이나 자취방을 옮겨 다닐 정도로 파란만장한 자취생활을 겪어내야 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우리 무리들은 그녀 뒤를 족족 따라다니며 그녀의 삶 웅덩이에 함께 발을 담갔다.


그녀의 첫 번째 자취는, 복덕방 아저씨의 꼬드김으로 일면식도 없는 초등학교 여선생과의 동거로 시작되었다.

아저씨는 마땅한 방이 없자 방을 구하러 온 여선생과 정미에게 돈도 굳을 겸 함께 살면 어떻겠냐며 다리를 놓았다.

정미와 여선생의 동의하에 그녀들의 동거가 시작됐는데, 우리는 그런 상황임에도 그곳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지냈다.

어느 한 날, 우리가 정미 자취방에서 놀고 있는데 여선생 애인도 찾아와 한 공간에 합류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인 정미가 평소에도 늘 여선생에게 밥을 대령했는데, 그날마저 공주처럼 굴었던 여선생 대신 정미는 그 애인 밥까지 차려냈다.

선생과 그 애인이 익숙한 듯 밥상을 받아먹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했고 우린 분노했다.

이후 여선생은 애인이 들락거리기 불편했는지 혼자 살고 싶다 해, 정미가 급히 다른 방을 구해야 했다.

우리는 또 한 번 분노했다. 본인이 나갈 것이지...

정미 나가고 그녀는 밥도 못해 먹고 쫄쫄 굶었을 것이다.

정미는 방만 딸랑 있고 부엌 같지 않은 부엌을 억지로 만들어 놓은 두 번째 집을 계약했다.

그곳은 부엌을 통과해야 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인데, 연탄구들장과 부엌살림을 놓을 수 있는 시멘트 덧마루가 전부였고 수도도 따로 없어 물을 길어와 큰 통에 담아 사용해야 했다.

그런 부엌에서도 정미는 손수 김치를 담그고, 멸치도 볶고, 계란프라이도 부쳐 도시락 반찬을 해왔고 나는 그것이 그렇게 맛있어 날름날름 뺏어 먹기 바빴다.

신 김치에 콩기름을 둘러 계란까지 풀어 볶은 김치는 아직도 생각이 날 만큼 군침이 도는데, 그 얘길 하면 정작 정미는 생각도 안 난다 한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난 참 염치없는 아이였다.

그렇게 얻어먹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우리 집에서 반찬거리를 챙겨다 줄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정미는 그런 나를 군소리 없이 맞아주며 항상 언니처럼 따뜻하게 챙겨주었다.

나 같으면 진즉 발로 차고도 남았을 것이다. '야! 엔간히 좀 껄덕대라잉~' 하면서.


또 하나의 정미 자취방은 코딱지만 한 크기의 작은 방으로 기억한다.

그때가 크리스마스이브였을까?

우리는 그날도 각자 집에서 이리저리 뒹굴다 크리스마스이브에서 오는 기대감과 이번만은 뭔가 해보자는 각오가 하늘땅 만땅으로 차올라 하나 둘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범생이 같은 우리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어 입맛만 쩝쩝 다시고 있을 때, 그나마 능력자인 정순이가 실력발휘를 하고 나섰다.

고향 남학생이 자취하는데 '좋은 스케줄이 있으니 별일 없으면 놀러 오라` 했다며 우리에게 의향을 물었다. 의향은 무슨~


"야 뭔 소리냐 당장 일어나야~ " 우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확실한 집 위치도 몰라 이 골목 저 골목 그 녀석 이름을 불러가며 겨우 그 애가 사는 2층집을 찾아냈다.

우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그 남학생과 일행들은 ‘진짜 온 거야?’라는 듯 대략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매너라곤 없는 그 녀석들 반응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기분이 좀 상했지만 우린 그것도 모른 척했다.

일단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때서야 그들이 왜 그렇게 난감해했는지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곳엔 이미 다른 여학생 무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한껏 물이 오른 체 놀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 선수를 치고 앉아 있는 그녀들의 여유를 보면서, 아무리 절실하고 고픈 우리였지만 합석하여 놀자는 그들의 인사치레를 뿌리치고 씁쓸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명분도 없고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다시 컴백하여 우린 정미의 코딱지만 한 자취방으로 몰려갔다.

얼마나 작던지.. 나는 책상 위에서, 한 친구는 책상 밑에서, 또 한 명은 의자에 앉아서, 나머지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부엌 부뚜막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고, 정미만 주인 특혜로 모로 누워 발을 뻗을 수 있는 방바닥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누울 수도, 몇 명 들어앉을 수도 없는 좁디좁은 정미의 자취방에서 날밤을 새야 했던 그 지질한 순간을 난 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설상가상,

한 번은 정미가 새 자취방에 입주도 못하고 돈만 떼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동산 아저씨가 어리고 물정 모르는 여학생을 상대로 사기를 것이다.

그 시절엔 계약이 허술하고 구두 약속이 많은 터라 아저씨 말만 믿고 보증금을 미리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정미 연락을 받고 가보니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짙은 쌍꺼풀이 풀어질 정도로 퉁퉁 부어 내 가슴이 다 메었다.

정미는 짐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며칠 우리 집 신세를 졌다.

나는 그때 순진한 여학생을 상대로 나쁜 짓을 한 어른 같지 않은 아저씨에게 울화통도 치밀었지만, 한편으론 그동안 신세 진 정미에게 최소한의 답례 기회가 생긴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가벼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나는 항상 정미가 짠하고 만만한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미의 진가를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녀는 그 시골에서 처음 도시로 입성한 유일한 여고생으로, 시골 친구들 사이에서는 넘사벽이었다는 것을 그녀의 시골집에 가서 알았다.

고3 여름 방학 때 우리는 여고시절 마지막 추억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미 시골집에 놀러간적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동네가 들썩들썩 난리가 났고 동네 남자애들은 대문이 닳을 지경으로 들락거렸다.

정미 부모님은 안방까지 내주며 큰손님 대접을 해줬고, 동네어르신들도 한 마디씩 알은체를 하며 우리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마지막 날 저녁에 동네남학생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빈 방을 준비해 놨다며 함께 놀자고 우리를 초대했고, 우린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승낙했다.

막상 남녀가 초면이다 보니 서로 어색해 한참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 카세트 녹음기를 꾹 눌렀다.

녹음기에서 신나는 댄스곡이 흘러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방방 뛰며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버렸다.

섹시뮤직, 원티드, 원 웨이 티켓, 헬로 미스터 멍키 같은 신나는 팝송이 팡팡 울리니 가만히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나 뛰었으면 나중엔 그 시골방 구들장이 다 내려앉아 버릴 정도가 돼 버렸으니 정말 할 말 다한 거다.

난 그 시골바닥에서 처음으로 이성과 어울려 놀면서 이성에 대한 내 취향을 알아갔고 내가 호감을 가졌던 아이와 나에게 호감을 주었던 아이를 각각 경험했다.

하지만 그때의 주인공은 단연 정미였다.

남학생들 모두 정미만 바라보며 그녀의 눈빛과 관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정미'라는 높은 벽은 도저히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떠나는 날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왔던 남학생(내가 호감을 가졌던 아이)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애가 과연 누구를 보기 위한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였고 난 그 주인공이 나이길 바랐다.

약간의 건들거림과 카리스마가 풍겨났던 내 스타일의 그 애마저 결국은 정미에게 맘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구불구불 시장 통 안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막다른 집, 대문이 따로 없어 쥐구멍 같은 곳으로 출입해야 하는 집, 담이 없는 낭떠러지 같은 곳에 걸쳐져 있는 집, 집주인의 양아치 아들이 있어 위기의 자취방이 된 집 등, 그녀는 여고 3년을 보내면서 10번이나 자취방을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해야했다.

그럼에도 나는 정미만 있으면 그 어떤 곳이라도 먹고 자고 뒹굴며 내 집처럼 편안하게 둥지를 틀었다.

우리는 부모님 감시 없는 자취방에 모여 친구들 뒷담화부터 소심한 작당모의, 자신의 미래와 앞으로 펼쳐질 청춘을 원 없이 얘기하며 한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열약한 환경 속에도 꿋꿋하게 버텨냈던 80년대 여고생 다섯은 지금 각자의 삶을 찾아 가장 젊고 충만한 중년을 보내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정미와 숙이도, 간호사 된 민이도, 영양교사가 된 순이도, 중학교 교사가 된 나도 지금 모두 행복하다.


사진: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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