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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짝사랑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사진: 다음 이미지


유난히 길고 지리했던 내 20대 후반 어느 날, 8년 만에 옛 짝사랑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펑펑 내린 눈발로 오소소 한기가 들어 따뜻한 차 한잔이 생각나던 때 오빠의 연락을 받았다.

오빠는 우연히 내 근황을 듣게 됐다며 '한 번 보자~' 했고, 곧바로 장소와 시간을 약속했다.

우린 옛 기억이 머문 대학가 커피숍에서 하얀 머그잔 속 커피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긴 얘기를 나누며 우리의 지난 20대를 추억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더딘 시간을 재촉하던 나에게 ‘다정회 신입생 환영회’가 적힌 타자 엽서 하나가 왔다.

지인의 소개로 대학생 농촌봉사 동아리인 ‘다정회’에 가입을 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터였다.

난 빨강 맨투맨 티셔츠와 진청색 무릎 치마로 차려입고 환영회장 문을 두드렸다.

나의 등장에 낯선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와 환한 미소로 맞이하니 오기 전 가졌던 긴장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다.

난 나만큼이나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새내기들 무리 옆에 조용히 자릴 잡고 앉았다.


환영회는 회장오빠의 인사말과 간부소개, 동아리 안내로 시작됐다.

다음은 새내기들 자기소개 타임인데, 나는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웅얼거림으로 내 소개를 때웠다.

기억나는 건, 어찌나 열렬한 환영을 해주던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기분이 붕~ 떴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설레고 흥분된 순간이었다.

다음은 분위기도 바꿀 겸, 유명 개그맨을 닮은(이홍렬?) 짧달막한 선배가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다.

그는 선을 넘지 않는 고급스러운 음담패설과 위트 있는 말솜씨로 우릴 세상 즐겁게 해 줬고, 처음 접해 보는 다양한 게임도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능숙의 끝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푸릇푸릇 새내기들을 위한 솔로 곡 하나가 하이라이트로 소개되었다.

흰 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차림의 너드한 남자 선배가 등장했다.

그 선배는 기타 반주와 함께 스모키의 ’Living Next Door To Alice‘를 허스키한 저음으로 시니컬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Sally called when she got the word’로 첫 소절이 시작되자, 난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황홀함에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난 거의 넋을 잃어버렸고, 내 마음속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크고 작은 동심원들이 수십 개 그려졌다.

그 순간 난 알았다.

‘아~ 앞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 예감은 적중했다.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짝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실제로 대학새내기 내내 꿈꾸듯 그 짝사랑에 울고 웃었다.

우연처럼 다가온 '다정회'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내게 딱 맞는 슈트처럼 편안했고, 어색함 없이 내가 터를 잡을 수 있도록 선배들이 지극정성으로 이끌어 줬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타오빠 존재가 가장 결정적 이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오빠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호리한 몸매와 작은 얼굴, 안경 속에 감춰진 그윽한 눈빛이 세상 압권인데, 그 눈빛으로 나를 향해 씨~익 웃어줄 때면 난 온통 마음이 쿵쾅거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죽했으면 기타 치는 손가락이 너무 얇고 고와서 그것마저 신비롭게 보일 정도였을까.

한마디로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것이다.

오빠는 가냘픈(?) 외모와 달리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기타를 튕기며 감미로운 감성으로 노래를 부를 때면 그 분위기가 너무 신비로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기 남학생들은 그런 오빠를 재수 없게 생각했지만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먹히는 분위기로, 좋아하는 애들도 몇 있었던 것 같다.

난 그때부터 오빠를 보기 위해 동아리 실에 죽치고 살았다.

그래서 운 좋게 만나면 내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오빠가 말이라도 걸어주면 그날은 나에게 '행운의 날'이 되었다.

나의 일상은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는 날과 보지 못한 날, 딱 두 날로 나눠졌다.

하지만 나는 고백할 마음까지는 없었다.

짝사랑하는 내 마음이 소중할 뿐, 혹여 입을 닫을 수도 없을 만큼 감정이 차오르면 넘치는 마음을 일기장에 쏟아붓는 것으로 내 감정의 유희를 맘껏 즐겼다.

그렇게 오빠에게 온 정신을 빼앗긴 탓에 나를 좋아했던 다른 동기나 선배가 있다는 것도, 오빠가 다른 언니와 썸을 타고 있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정회' 그곳에서 나는 훨훨 날았다.

나에게 날개가 달린 것이다.

그 유명한 '도깨비' 명대사처럼 ‘그곳에서 함께한 시간 모두 눈이 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해가 다 지도록 오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불렀던 노래도 좋았고, 막걸리에 두부김치를 안주삼아 달밤까지 뭉갠 수많은 시간들도 좋았다.

가을 수련회 때 오빠가 내게만 들려줬던 해바라기의 '어서 말을 해'는 별 총총한 가을밤에 오빠의 목소리와 어울려지니 한 폭의 그림처럼 들려왔다.

그때 눈치 없게 나를 찾는 동기 남학생(나를 좋아했던 ㅎ)이 있어 1절밖에 못 듣고 말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1학년 농촌봉사활동 또한 잊을 수 없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와 오빠는 6학년반을 맡았다.

나는 국어를 오빠는 수학을 가르쳤고, 공부가 끝나도 아이들과 피구를 하고, 들로 산으로 꽃과 열매를 따며 까르르 몰려다닌 시간도 그립다.

봉사활동 마지막 밤 장기자랑 시간에 오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 시골꼬맹이들과 함께한 합창도 잊지 못한다.

우리 6학년반이 대망의 1등을 차지해 너무 기뻐 방방 뛰었던 모습도 엊그제 같다.


이렇게 내 대학생활은 '다정회'와 함께 지독한 짝사랑 앓이로 시작됐고 거의 1학년 말까지 쭈욱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티를 내지 않았다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이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 했던가.

오빠가 서서히 눈치챌 때쯤 공교롭게 내 콩깍지가 벗겨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나도 변했고, 상황도 여러 가지 변수가 생겨났다.

동아리에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존재감 넘치던 오빠가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는 초라한 아웃사이더 같은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내 눈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아쉬운 외모와 소심한 행동, 연약함 속에 감춰진 거들먹거림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나에 대한 오빠의 일관된 무심함과 내 일방적인 관심도 점차 빛을 잃어갔다.

2학년이 되자 더 이상 오빠를 향한 내 감정의 널뛰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경험한 짝사랑 그 자체만 가치 있을 뿐, 그 대상이 오빠였다는 것만 팩트로 남았다.

이제 오빠를 봐도 어떤 설렘도 황송함도 느껴지지 않는 흔한 동아리사람 중 한 사람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내 짝사랑은 끝나갔고 오빠도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캠퍼스 은행나무가 노란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듯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학생활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입사했고, 오빠는 몇 번의 고배를 마신 후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긴 회사생활 동안 갖가지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회사라는 울타리 없는 허허벌판에서 혼자 버텨내야 하는 막막함과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풋풋하지만 열정적이었던 동아리 생활과 그때 그 사람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오빠의 연락을 받았고 우리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오빠는 나를 ‘똘똘하고 자랑스러운 후배’로 기억한다 했고, 나는 지독한 짝사랑 상대가 오빠였다는 것을 말하진 않았지만 오빠는 알고(?) 있는 듯했다.

그 후 우린, 이도 저도 마땅치 않는 사이가 되어 영혼 없는 말만 주고받으며 여러 날을 보냈다.


무덥고 지루했던 그해 여름, 오빠가 뜬금없이 휴가를 함께 보내면 어떻겠냐며 내 의향을 물었다.

난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고, 생각 좀 해보겠다며 즉답을 미뤘다.

오빠가 내 결심을 물어 왔을 때,


"회사가 바빠 휴가를 낼 수 없을 것 같아요" 뻔한 핑계를 대며 자연스럽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그럼 어쩔 수 없지..."라는 오빠의 말 줄임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을 때 오빠와 나 둘 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았다.


그때 내가 만약 yes라는 결정을 했더라면 지독한 짝사랑 상대와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을 맞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존재할 때만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환상이 너무 컸기에 그 환상이 벗겨지고 난 후의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지독할 만큼 순수했던 내 20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추억 속 오빠는 더 이상 내게 없다.

다만, 내 청춘의 한 귀퉁이를 소중하게 장식해 준 그 기타오빠에게 마지막 예의를 다하고자 한다.


"오겡끼 데스까? 와다시와 겡기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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