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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기업에서 살아남기(1)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내 취업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경제활동이 없던 벼랑 끝 우리 집에 큰 경사였다.

나는 감정 표현이 무던한 엄마 품에 안겨 원 없이 축하를 받았다.

“오매. 먼일이당가. 내 새끼가 취직을 해부럿네. 막둥아~. 엄마가 한번 안아줄란다. 이리 와봐라~”


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입사해 맨 처음 기획연수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특별한 O/T도 신입사원교육도 없이 곧바로 업무 현장에 투입되었다.

3,000명이 넘는 생산직 사원과 가족, 그리고 500명이 넘는 사무직 사원의 연수를 담당하는 업무를 일부 분장받았다.

사원교육부터 가족교육, 본사와 연계된 교육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업무들이 내게 주어졌고, 믿기 어렵겠지만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내 능력 이상의 대단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았고, 내가 잘 해내고 있는지 뒤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눈뜨면 회사에 갔고 회사에서는 닥치는 대로 눈앞의 일들을 해치워 나갔다.

그때 내 나이 만 23세. 대학을 갓 졸업한 나에게는 엄청나게 휘몰아치는 허리케인 같은 생활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때, 쏟아지는 업무를 감당해 내느라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도 몰랐다.

조직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주변사람을 살피며 어떻게 관계 맺음 해야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그 결과, 내 곁에 사람은 없고 일만 남았다.

'어디 한번 니가 얼마나 잘 해내는지 보자~' '저 정도도 못하면 직급 반납해야지~.....'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견제와 시기 또한 만만치 않아 톡톡히 신고식을 치러내야 했다.


영광과 시련은 동전의 양면처럼 내게 다가왔다.

입사 4년 차, 년수가 차고 자격을 갖추니 나도 승진대상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여자대리를 탄생시켜야 하는 나의 존재는 뜨거운 감자였다.

남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승진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이리저리 밀쳐지는 불합리한 현실에 놓여진 것이다.

첫해는 미끄러지고 그 다음 해, 우여곡절 끝에 나는 우리 회사 최초 여자대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생산직 사원들의 반감과 여사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한꺼번에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죄인이 아닌 죄인이 되어 한없이 몸을 낮춰야 했다.

남자의 승진은 능력이고, 여자의 승진은 아부와 운으로 치부했던 전형적인 남성위주의 조직풍토가 만연했던 80년대였다.

'여자대리'라는 영광과 '외로움'이라는 시련은 그렇게 갈래머리 땋듯 엮여 내 삶에 들어왔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통장에 찍히는 적지 않은 월급을 10년 동안 고스란히 우리 집에 바쳤다.

그런 막내딸 덕분에 엄마는 시집간 딸들에겐 보탬이 되는 친정엄마로, 아들들에겐 든든한 어머니로, 동네에선 현금을 융통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모로 계실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삶은 오히려 더 편안해 보였다.

가끔 내가 회사 행사에 초대하면 기꺼이 참석해 즐기셨고, 동네 사람들과 계모임도 하고 꽃놀이도 다니며 나름대로 인생을 누리며 사셨다.

갈수록 엄마의 안색은 환해졌고, 우리 집 형편도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만큼 내 행색은 찌들어 갔고, 매일 피로에 지쳐 집에만 오면 죽은 듯이 시체놀이를 해야 했다.

집에서는 내 이런 상황을 알아챌 사람도, 알았던들 별다른 방도를 보텔 사람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리 화장한 날이라도 안개가 낀 듯 암울하고 뿌연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난 또 그렇게 몇 년을 버텼다.


(잠깐! 엄마와 에피소트 타임- 회사생활 동안 내가 엄마에게 가장 크게 화내고 난리 쳤던 2꼭지 이야기)

(하나) 내가 기획한 교육행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본부장에게 엄청 깨지고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 날,

엄마는 저녁이라며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소박한 밥상을 차려내 오셨다.

김치쪼가리와 짜디짠 젓갈, 그리고 아침에 봤던 몇 가지 반찬들...

나는 그 밥상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이 쳐 올라왔다.

'내가 어떻게 일해서 벌어온 돈인데,, 내가 꼭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식구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할까? 왜 내가 소녀가장처럼 살아야 되는 데?' 오만가지 생각들로 가슴이 메었다.

나는 수저를 들다 말고 "반찬이 이것밖에 없는 거냐, 나 밥 안 먹겠다" 소리소리 질렀다.

"뭐 해주까? 말을 해라 말을. 잉 잉?" 쩔쩔매신 엄마 목소리에서 쉰소리까지 새어 나왔다.

평소 반찬투정 한번 없고 힘들다 내색 한번 없던 딸이었기에 어지간히 놀래셨을 것이다.

나는 소심한 마음에 고기반찬 하나 요구하지 못하고, "햄 하고 시금치 반찬 해줘" 주문했다.

부랴부랴 준비한 햄과 시금치를 김에 싸 먹으며 엄마와 난, 그날, 눈물의 저녁밥을 먹었다.


(둘) 회사와 우리 집과는 버스 2코스 정도여서 나는 뚜벅이 출퇴근을 했다.

나는 한 겨울에도 멋 내느라 미니스커트에 10센티 하이힐을 신고 나다녔는데, 그날은 특히 더 추웠다.

변함없이 힘들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종종 집으로 들어선 날, 엄마는 안 계시고 방문마저 꽉 잠겨 있었다. (그때는 번호키 아닌 쇠자물쇠였다)

뜨뜻한 아랫목 생각에 거의 뛰다시피 집으로 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엄마를 기다리다 추위를 피할 겸 부엌으로 들어가 연탄부뚜막에 언 몸을 녹이는데, 정말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 퇴근 시간을 뻔히 알면서 도대체 어디 가신 거야? 열쇠라도 놔두고 가든가..'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씩씩 거리며 뜀박질로 들어오셨다.

"오매 내가 니 오는 시간을 깜빡해 붓다. 춥지? 얼른 들어가자"

내 눈치를 살피며 열쇠를 꽂는 엄마의 손이 조금 떨리는 듯했다.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도 속상했지만 춥고 배고픈 나를 몇 시간씩 방치한 엄마가 더 미웠다.

"몰라. 도대체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이야? 나 오는 시간도 모르고 어디 갔다 온 거야 ? 뭐 하는 거냐고오~"

나는 엉엉 소리쳐 울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도 따라 울었다.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닐 것인디~, 저것이 그럴 애기가 아닌디~. 내 딸이 많이 힘든가보네~'

그때 엄마가 그리 생각했다면 좀 나았겠는데,,,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엄마이니 이젠 물어볼 수도 없다.

- 다음 이야기(80년대, 대기업에서 살아남기 2)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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