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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추억한다
80년대, 대기업에서 살아남기(2)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Feb 11. 2024
* 80년대, 대기업에서 살아남기(1) 이어진 내용입니다 *
'내가 왕년에는~’은 ‘라떼는 말이야~’처럼 우리 애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엄마의 왕년을 들을 의무가 있고 나는 말할 권리가 있다.
10
년의 회사생활 동안, 나는 과분할 호사를 누렸다.
무엇보다 안정된 급여를 받았고, 기대와 부러움도 넘칠 만큼 받았다.
사내교육에 필요한 강사나 교육기관을 섭외할 권한이 생겨, 내 추천으로 채용된
많은 사람들도 생겨났다.
각종 사내시험을 주관하다 보니 나를 보조할 개인비서 같은 알바생도 끼고 일했다.
교육과
세미나, 출장을 질리도록 다니며 회사의 대외적인 얼굴마담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본사회장님은 물론 사장님, 본부장님 앞에서도 당당히 내 존재를 과시했고, 실제로 내 이름 석 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끝 무렵엔, 여자라는 이유로 결혼과 함께 강퇴
(강제퇴사)당하는 고질적인 회사 풍토를 바꾸고자 결혼하고도 몇 년 더 남았다.
그 결과, 나는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러 번 갱신했다. (거의 최초...)
대졸여사원 입사 최초,
여자대리 승진 최초, 유부녀 재직 최초....
(이제 힘든 이야기 다시 시작....)
대리가 되자,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내 회사생활은,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기대와 끝도 없이 쏟아지는 업무량, 더 나올 것도 없는 내 능력의 한계치를 절감하며 무너져갔다.
처음으로 결혼과 퇴사를 생각했다.
이곳을 자연스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결혼’이라는 울타리 뒤에 숨어 푹 쉬고
싶을 뿐.
허나, 그때까지 썸 탈 남자 하나 없는 내게 결혼은 언감생심이었다.
이후부터 난 부지런히 선 시장에 내놓아졌다.
푹 쉬어도 모자랄 주말에 꽃단장하고 이 다방, 저 호텔커피숍을 쇼핑하듯 낯선 남자들을 탐색해 나갔다.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인 나도 할 말 없지만 선남들 하나같이 수준미달, 매력 없음, 어처구니없는 투성이었다.
나중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습관적으로 만났고 여지없이 맹탕으로 돌아오기 부지기수, 어림잡아 50번도 넘게 선을 봤을 것이다.
지칠 대로 지쳐, '아~ 나는 결혼도 못하고 이곳에 파묻히고 마는 것인가?'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
입사할 때만 해도 연애와 결혼은 모두 이곳에서 해결하리라 자신했고, 남들도 그리 말했다.
가장 유망한 신랑감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최소 한 명이라도 득탬 할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난 단 한 사람도
사로잡지 못했다.
수많은 신입들이 나를 거쳐 갔고 그들을 호령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교관이나 사감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치부되었다.
나 역시 사감과 여자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몫을 못하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았다.
강하고 쿨한 척 항상 씩씩해 보인 나지만, 마음속엔 한없이 사랑스럽고 예쁜 여자이고 싶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들은 잔인하게도, 내겐 어떤 여지도 주지 않고 늘 주선자 역할만 요구했다.
난 한 번도 주인공이지 못하고 친구나 후배, 심지어 동료 여사원까지 연결해 주는 들러리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내 척박한 회사생활에 한줄기 빛이었던 은인들이 그곳에 있었다.
내 갑장 선화와 미경이, 후배 원이...
그녀들은 내게 든든한 빽이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었다.
점심을 함께 먹고 퇴근 후 대패삼겹살에 소주 한잔씩 걸쳐주는 그 사소한 배려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그녀들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능력이 좋아 너무 빨리 결혼해 나를 버리고 퇴사해 버렸다.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주었던 선화마저 결혼한다며 회사를 정리했을 때 난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아~ 이제 나는 누구와 밥을 먹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나?’
그 뒤, 나는 성인이 다 된 나이에, 학교도 아닌 직장에서, 나에게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못 한 ‘직장 왕따’를 뒤늦게 경험했다.
대리가 된 후 본격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여사원 무리들이 생겨났다.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공격하는 일에는 의외로 큰 결속력이 생겨나나 보다.
평소에 잘 지냈다고 생각했던 그녀들마저 등을 돌렸고 그 많은 쪽수에 밀려 옴짝달싹하기 힘들 지경이 돼 버렸다.
그때 주동을 했던 이가 후배 M이다.
여사원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실세역할로 군기반장을 하던 M이, 이제 나에게 등을 돌리고 비수를 꽂으니 그 공격이 가히 살벌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처럼 최악의 발악을 쏟아냈던 M은 내가 퇴사하던 날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언니에 대한 내 마음은 애증이었다’" 개뿔~.
2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M과 그때의 고통이 악몽 속에서 불쑥 나타나 내 베갯잇을 적시우곤 한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
영화도 해피엔딩보다 새드엔딩이 더 오래 남듯, 고단하고 퍽퍽했던 순간은 괴물처럼 커 보이고 행복한 순간은 찰나처럼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20~ 30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었던 그곳에서의 9년은, 내게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더 많이 준 것은 확실하다.
덕분에 집안경제에 보템이 될 수 있었고, 다시 못할 경험도, 능력도 인정받으며, 내 반쪽인 신랑에게 안착할 수 있도록 자극제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준비되지 않은 미흡한 능력으로 과분한 대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숨이 턱 막힐 만큼 고군분투했던 내 젊은 날에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끝내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텨준 내 저력에 박수를 보낸다.
‘짝! 짝! 짝!’
* 사진: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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