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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 결혼 성공기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대학동아리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건만, 2학년이 되니 상큼이들에 밀려 찬밥 신세로 전락하고 짝사랑 오빠와도 끝이나 하루하루가 침울했다.

새롭게 마음 틀 곳이 필요했던 나는 친구 진선이와 작고 아담한 고향성당을 찾아갔다.

시골마을의 작은 성당이었지만 청년회가 활발했고, 귀엽고 예쁘장한(ㅎ) 여대생이 등장하자 청년들이 눈을 번뜩이며 격한 환영을 해준다. '앗싸~'

그중 유독 키가 크고 머리 길쭉한 1학년 후배 남학생이 보였다.

브라운 색 체크코트를 걸쳐 입고 작은 눈을 감추기라도 하듯 큼지막한 잠자리안경을 쓴 채 인상 좋게 웃고 있는 한 남학생, 짐작하겠지만 그가 바로 지금 내 남편이다.


나는 그곳에서 신앙생활보다 청년회에 더 열심히 활동하며, 편집위원으로서 주보 발간을 맡았다.

청년회 부회장인 그도 레지오 단장이나 교리교사, 각종 행사와 레크리에이션 진행까지 이곳저곳에서 바쁘게 써 먹히고 있었다.

재주 많고 감초 같은 그의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넘쳐나 인간성 하나 좋은가 보다 했더니, 오 마이갓, 그의 오지라퍼 인맥이 나중에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술과 친구를 엄청 사랑한 남자였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청년회 주관으로 일일찻집이 열린다.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도 돕고 청년회 살림에 보태곤 하는데, 찻집이 마무리되자 신부님이 청년들 고생했다며 특별히 뒤풀이를 허락해 주셨다.

우린 그날 속도 없이 '극장식 나이트클럽'으로 달려가 음주가무를 즐기며 늦은 밤까지 정신없이 놀아버렸다.(나중에 신부님에게 엄청 깨짐)

그때 그가 내게 부르스 신청을 했는데 ‘나 아무 하고나 부르스 치는 여자 아니야~’ 거절하자, 그는 능청스럽게 다른 자매님을 붙들고 '돌리고 돌리고' 난리부르스를 쳐댔다.

그는 나를 ‘선배 또는 자매님’으로 깍듯이 모셨고, 나는 말을 놓는 듯 만 듯 ‘****(세례명)'라 부르며 후배대접을 했다.


세월이 흐른 후, 우린 차츰 청년회 활동이 뜸해졌다.

난 취업을 했고, 그는 군에 입대했다.

그 후 나는 마음이 생길 때만 미사에 참석했고, 가끔 청년회실을 지나칠 때마다 길쭉한 얼굴이 대표적으로 떠올랐지만 '그때 그런 후배가 있었지' 정도가 다였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섭디 서런 노처녀 길로 입문했다.

회사생활도 연애사업도 엉망으로 꼬여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나도 모르게 성당을 찾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냉담한 탓인지 교적이 사라져 성당사무실에 들렀다.

그곳에서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쭉한 얼굴과 마주쳤다. 그였다.

그도 타 지역 근무일정이 끝나 오랜만에 고향성당에 들렀던 참이라 했다.

우린 너무 오랜만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반가워 손까지 부여잡고 인사를 했다.

그는 검정양복에 빗살무늬 넥타이를 맨 상남자가 되어 나타났는데, 더 이상 그에게 말을 놓아선 안 될 것 같아 최대한 예의껏 대했다.

마침 그도 p회사 연수팀에 근무하고 있어서(나도 연수팀에서 근무함) 우린 겸사겸사 명함을 교환했고, 교육 정보나 강사를 소개받고 싶을때 통화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통화 뒤끝엔 그가 빈말인 듯 진심인 듯 ‘언제 소주나 한잔 하시죠’ 해서, 우린 정말로 소주도 몇 번 같이 마시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소주나..'란 말은 그의 습관적 인사말 중 하나였다)


난 단둘이 만나는 것이 어색해 꼭 진선이를 대동했다.

우리 셋은 모두 '나는 솔로'여서 상부상조하듯 소개팅을 서로 품앗이하기도 했다.

나는 내 동아리후배를 그에게, 그는 직장동료를 진선이에게 소개했다.

치사하게, 나만 소개받지 못해 엄청 억울했다.

나는 틈만 나면 '왜 나는 소개 안 시켜주냐? 언제 소개해줄 거냐? 난 이런 남자가 이상형이다' 그를 달달 볶았다.

둘 중 하나다. 내가 소개해줄 만한 사람이 못되든가, 아니면 소개해주기 아깝거나~


우리는 셋이서 노래방도 가고 맥주도 마시다 어느 때부턴가 단둘이만 만나게 되었다.

그가 회사 앞으로 와 나를 기다려 주면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고, 그가 차를 가져오면 포도밭에 가서 닭백숙을 먹으며 포도도 한 상자씩 사들고 오기도 했다.


옛 사찰에 놀러 갔을 때, 내가 10센티 하이힐 땜에 넘어질 뻔 하자 그가 나를 붙잡아주려 손을 내밀었는데 내가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사정없이 패대기쳐버렸다.

그때 우리가 손이라도 잡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성격에 바로 결혼하자 했을 것이다. (고지식한 사람!)


어두운 영화관에 들어갈 때도 우린 손 한번 잡지 않고 씩씩하게 각자 걸어갔다.

영화관이 북적거려 밀릴 때조차 어떻게든 서로 몸이 닿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통에 집에만 오면 배로 힘이 들어 녹초가 다 되었다.(그땐 영화관이 예약제가 아닌 선착순 입장이었다)


이런 어정쩡한 만남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연락이 뚝 끊기고 말았다.

나도 딱히 아쉬울 것 없어 부지런히 다른 청춘사업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엇갈림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더 늦기 전에 결혼이라는 탈출구를 찾고 싶었지만 운명은 내 바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뜨겁던 여름날, 우리 노처녀 3인방(진선, 남순)은 지리산 산자락, 하늘아래 가장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심원계곡’으로 휴가를 떠났다.

계곡물은 눈치 없이 활기차게 흐르고 밤하늘의 별들은 유별나게 총총거리던 그 여름날 밤, 나는 민박집 편상에 大자로 누워 내 전매특허인 술주정을 하고 말았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썰어준 회 한사라에 내 주량 이상의 소주를 마셔대면서 ‘나 이제 어떡하면 좋냐~, 인생 뭐 이러냐~ ’며 내 초라한 청춘을 향해 펑펑 울었다.

내 울음을 시작으로 우리 노처녀 3인방은 밤새 꺼이꺼이 그곳을 눈물의 계곡산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민박집 아줌마가 우리 달래느라 애 좀 먹었다.)


그런 진상 휴가를 마치고, 짐도 풀지 않은 채 한참 넋 놓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와 연락이 끊기고 어림잡아 1년 후, 그의 목소리였다.

그는 '회사로 전화했는데 집인 거냐' 했고 '마침 휴가여서 집에 있었노라' 했더니 '다행이다' 말했다.

나는 깔깔 오버해 웃었고, 내 초라한 모습이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은 듯 하이 톤으로 응대했다.

그는 1년 공백의 미안함과 어색함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너무 편케 대하니 좀 안심하는 듯했다.


그 전화를 계기로 우리 만남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변함없이 좀처럼 진도를 빼지 않았다. (세상 답답하고 무심한 사람!)

나는 별 수 없이 또 선을 봤고 내게 적극적으로 청혼해 온 사람이 생겨났다.

결혼 조건으론 나쁘지 않아 나름 노력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그 선남과의 미래가 낯설고 망설여졌다.

나는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로서 고민 상담을 신청했다.

선남과 썸남(성당후배) 중 누구와 만나면 좋겠냐 물었을 때, 엄마는 어찌 된 일인지 후배를 선택해 주었다.

엄마는 한 번도 그를 만나보지 않았는데 왜 그를 택했을까?

그것은 내 마음이 그에게 더 있었기 때문 아닐까?

나도 모르게 내가 그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남이 내 확실한 결심을 요구했을 때 '여기까지가 인연인 것 같다'며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회사동료들과 변함없이 거나하게 술자리를 하고 있다 내 호출을 받았다.

그날 저녁 10시가 다 된 시간에 그는 벌건 얼굴을 하고 나타나셨다.

나는 급해 죽겠는데 그는 센스 없이 또 자기 회사얘기만 주절주절 하고 있었다.

난 ‘됐고! ’ 하면서 ‘우린 어떤 사이냐? 왜 나를 만나느냐?’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내 다그침에 그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 작게 내리 깔면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말했다.

아~ 난 기어이 내가 원하던 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것도 반쯤 취한 그에게서....

'그럼 우리 결혼하는 겁니다' 내가 확실한 다짐을 시키니 그는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네~' 라고 착하게 답해 주었다.

딱 맞추어 그때 마로니에 음악다방에서는 문을 닫는다는 시그널 음악인 ’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 가 흘러나왔다.


"엄마~ 나 드디어 결혼할 것 같애~"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계신 엄마는 내 승전보를 듣고 너무 기뻐 나를 부둥켜안으셨다.

나는 그가 취중에 엉겁결에 뱉은 약속이었을지라도 한 치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책임감과, 진중함,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먼저 청혼이라는 것을 했다.

이후 우리의 결혼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작은 시골 성당에서 혼배미사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나 얼떨결에 청춘을 함께 보낸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우리는 성당커플이 되었다.


우리는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존재를 알고 지냈지만 실제 사귀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2년 정도 썸을 타다 3개월(결혼준비과정 포함) 정도 사귀고 결혼했다.

그와 나의 결혼은 절묘한 타이밍의 결실이다.

만약 20대 초반에 그와 친구가 되었더라도, 20대 중반에 그와 사귀었더라도 우리는 결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내 코가 하늘을 뚫고 지나갈 정도였다ㅋ)

하지만 결혼이 너무 절실했던 순간에 그를 다시 만났고 그는 내 어려운 용기에 기꺼이 응답해 주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인간 길쭉이 ooo선생을 남편으로 만난 것이다‘ 라고 내가 말해 준다면 그는 아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좋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어허 이 사람이~‘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려 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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