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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May 13. 2024

라디오 방송에 사연이 당첨되었다.

뭣을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닌당가?

(몇 년 전 코로나 시절, 딸내미 경험담을 ‘전지적 딸내미 시점’으로 작성하여 라디오 방송에 채택된 사연)

 

제목: 뭣을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닌당가?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3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황당하고 창피한 일이 또 있을까 싶어 용기를 내어 사연을 보내봅니다.   

저는 미래 선생님을 꿈꾸는 다소 덜렁거리는 사범대 학생입니다.

저의 덜렁거림은 학교 다닐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좀 차원이 달랐는데요

덜렁대는 아이들은 보통 학교에 뭘 놔두고 오잖아요. 근데 저는 집에 있는 걸 자주 학교에 가져갔어요.


국어시간이었습니다.

   

국어샘: “다들 책 펴라”


그래서 저도 국어책을 꺼냈는데, 어랏~


국어샘: “써니! 너는 책이 뭐 이렇게 크냐? 이거 가계부 아니냐? 어째 가계부를 꺼내 들고 난리냐?"

써니: : "오매? 엄마 꺼 가계부를 가져와 버렸네요?"

어제 식탁에서 숙제를 하다가 덜렁덜렁 가계부까지 가방에 쏘옥 넣고 가져와버린 거였죠.


국어샘: “아이고~ 내 교직생활 20년 동안 가계부 가져오는 애는 니가 첨이다”

한편 집에서는 엄마가 시장 다녀와서 가계부를 찾으시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더라고요.

     

대학 입학 후 첫 소개팅 땐, 난 한껏 멋을 부리고 핸드백에 손수건까지 챙겨 들고 헐레벌떡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소개팅남: “아 여깁니다. 많이 덥죠?”   

써니: "아~네~ 쫌 덥네요"  

그래서 저는 흐르는 땀을 닦으려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습니다.     


소개팅남: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시네요? 요즘 환경을 생각해서 많이들 가지고 다니더라고요. 앗! 근데 손수건에 고춧가루가?”     

써니: "오매? 이게 뭐지?"

제가 서두르느라 건조대에 널려있는 행주를 손수건으로 착각하고 가져왔지 뭡니까?


소개팅남: “아~아~ 그럴 수 있죠.... 제가 티슈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소개팅남과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방 속에 핸드폰이 울려 꺼내려는데 제 하얀 핸드폰과 함께 하얀색 에어컨 리모컨이 같이 손에 잡히더라고요.

‘오매? 이건 또 왜 여기에?’ 저는 얼른 에어컨 리모컨을 가방에 밀어 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치미를 뗐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 광경을 소개팅남이 그대로 보고 있었던 거죠.    


소개팅남: “아~ 오늘 즐거웠습니다.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써니: “예? 갑자기요? 갑자기 가버리면 저 어쩌라고?”    

 

소개팅남:(통화 내용)“여보세요. 야~ 야~ 난데, 나 오늘 소개팅하는데 우리 엄마 건망증보다 더 심한 애가 나왔드라니까. 우리 엄마는 중년이라 그렇지 쟤는 뭐냐? 지금 나 무서워질라 한다니까"

써니: ‘이 씨~ 나, 너를 저주한다. 통화를 하려면 들리지나 않게 하던지...’     


그랬던 제가 어느덧 올해로 4학년 졸업반이 되었고 저는 한 달간 학교현장에서 교생실습을 해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학교현장은 코로나로 원격수업과 등교수업을 병행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다행히 2주간 학생들의 등교수업이 있어 어렵게 학생들과 면대면 수업실습을 할 수 있었죠.

처음으로 학교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대 반 걱정 반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써니: “엄마 엄마, 나 이 치마 어때?”

엄마: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냐? 색깔도 까만 걸로 해라. 단정해 보이게 “     

써니: “엄마 이 블라우스는 어때?”

엄마: “그건 목이 너무 답답하잖아, 그리고 흰 거 없냐? 흰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로 입어”     

써니: “엄마 그러면 머리는?”

엄마: “아이고 치렁치렁 해라. 차라리 꽉 묶어버려. 그리고 개인 물품은 잘 챙겼냐? 제발 덜렁대지 말고.”

써니: “아 맞다! 학교에서 신을 슬러퍼를 챙겨야 되는데 깜박했네?”

엄마: “어제 엄마가 베란다에 빨아서 널어놨다. 그거 챙겨라"

써니: ‘히힝 그랬어? 앗! 늦었다, 나 갔다 올께 “  

   

그리고 그날 우리 집 강아지 ‘뚜리‘는 유난히 저를 향해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뚜리: “멍멍~ 멍멍~”

써니: “걱정 마, 언니 잘하고 올께”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치마가 구겨질까 봐 자리에 일부러 않지도 않고 서서 가고 있었고요.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사람들이 저를 한 번씩 훔쳐보는 것 같았어요.

‘음,,, 칫! 차창 거울에 비친 제 얼굴,,, 제가 보기에도 뭐랄까, 음,,, 상큼하고 싱그러운 느낌? 쫌 예뻤어요.’

단정하고 우아한 선생님 같은 모습이랄까 ㅎㅎ.   

그렇게 저는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한참 자신감을 뿜뿜 올리고 있었고 드디어 내릴 차례가 되었죠.

그래서 교양 있고 엘레강스하게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 내리자 정류장 의자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또 이상하게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는 거예요.

‘아~ 진짜 오늘따라 뭐야~ 하긴 내가 쫌 어르신들께 사랑받는 그런 스퇄이랄까? 흠흠'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계속 저를 보시며 대화를 하시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 “저 아가씨는 뭘 저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닌당가? 내가 눈이 침침해서 말이시"

할머니: “잉? 뭐가? “

할아버지: “저것이 뭐시당가?”

할머니: “잉? 뭐 갖고 그러시오?"

할아버지: “아니 저 아가씨 가방에 매달려 있는 거 저거 말이여”

할머니: “워메? 저거 브라자 아니여?”

할아버지: “아이고 이놈에 할망구야~ 설마 저것이 속옷이라고? 저렇게 멀쩡한 아가씨가 뭐 한다고 그것을 가방에 달고 다니겄는가? 저거 가방끈 아니여? 요즘 젊은이들 패숑(패션)이 다양항께"

할머니: “아무리 패숑이라고 해도 그렇재 뭔 가방끈이 똥그란 것이 두 개 저렇게 튀어나와 있당가 잉”

할아버지: "그러믄 저것이 진짜 그것이까?”     


설마,,, 에이 설마,,,, 저는 설마 제 얘기는 아닐 거라 생각하고 제 길을 막 가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저를 불러 세우시는 거예요.   

  

할아버지:“이봐요 아가씨~”

써니: “네?”

할아버지: “내가 궁금해서 그런디 가방에 달고 다는 것이 뭐시여?”

써니: "네? 저 가방에 아무것도 안 달았는데요? “

할아버지: “안 달긴... 가방 뒤에 주렁주렁 뭐가 달렸고만”


그래서 제가 제 가방을 살펴보니, 아~악~ 브.래.지.어   니가 왜 거기서 나와ㅠㅠㅠ

설마 했던 그 검은 속옷이 제 가방에 달라붙어 저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써니: “아놔~~ 미치겠네~~ “

  

그때서야 저는 지나온 제 아침 출근길이 생각났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귀염둥이 뚜리가 이리 물고 저리 물고 던져놓은 제 브래지어가 턱 하니 가방에 매달려 있는 것도 모르고 저는 그렇게나 당당하게 구두를 또각거리며 도시여자의 파워워킹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제 다리에 착착 감기던 그 감촉은 저의 긴 가방끈이 아닌 저의 속옷끈이었다는 걸요.

어쩐지 아침에 뚜리가 저를 그렇게나 쳐다보며 짓고, 사람들은 저를 또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 보더라니...


제가 어쩔 줄 몰라 서둘러 제 속옷을 가방에 챙겨 넣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죠.     


할아버지: “아이고 괜찮해. 덕분에 우리는 아침에 좋은 구경 한번 했구만. 크큭 허허허,,,  아참 할멈! 요구르트 한 개 남았재? 그거 이 아가씨 줘 버려”

할머니: “알았소, 여기 있네 아가씨~ 흘리지 말고 묵어 잉? 빈통 가방에 달고 다니지는 말고. 크크 크윽... 아이고 배야... 아 저기 버스 오네,,, 잘 가소잉"  


아~ 정말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제23년 인생의 최고 창피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제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사람들이 제 얼굴을 제대로 못 봤을 거라는 그런 희망 하나 가지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진짜 kf 80 마스크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만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도 감사 말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힐끔힐끔 훔쳐보며 뒤에서 킥킥댔던 사람들과 달리 저에게 이렇게라도 알려주신 그분들 덕택에, 학생들에게 '브래지어를 가방 달고 나타난 교생선생님'으로 영원히 기억될 뻔 한 아찔한 순간은 면할 수 있었으니까요.


청취자 여러분~

이렇게 검은색 속옷을 주렁주렁 달고 출근길에 올랐던 제 학창 시절의 마지막 사건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되겠죠?

그리고 다 잊혀지겠죠?

,,,제발 아무 일 아니라고, 아무도 저를 못 봤을 거라고, 그냥 추억일 뿐이라고 말해주세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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