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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Jul 22. 2024

누가 기타 값을 물어줘야 했을까?

                                                          사진: 다음 이미지


내게는 특별히 애정하는 모임 하나가 있다.

스무 살에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 농촌봉사활동과 야학을 함께 했던 동아리 동기 모임이다.

졸업 후 각자 삶의 터전으로 흩어져 소식을 전하지 못하다, 약 10여 년 전쯤 연락이 닿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0년 전 청춘들이 반백이 되어 다시 뭉쳤지만 여전히 우린 그때처럼 웃고 까불고 마시고 투닥거린다.

혹 지나가다 만났더라면 몰라봤을 터,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서 20대의 우리를 보았다.

12명의 남녀로 구성된 이 모임은 내 일상에 작은 설렘이 되었고, 매일 카톡으로 아침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애경사를 챙기며, 1년에 한 번씩 정규모임도 갖는다.

이번 여름에도 내 방학을 맞아 부산 광안리에서 정모를 하기로 이미 준비 완료된 상태다.


동아리 동기 중 유일하게 연락이 닿지 않는 남학생이 있다.

국어국문학과생 B, 사내답지 않은 수줍음과 감성이 살아 있던 B는, 처음엔 비호감이었으나 알면 알수록 괜찮은 구석이 보였다.

B의 문학적 소질과 필력은 동아리에 여러모로 쓸모가 되었고, 감수성과 공감력은 여학생들에게 더 먹혔고, 툭 내뱉은 그의 말들은 우리의 웃음포인트를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여기서 잠깐! 내가 이 타임에 B를 등장시켰나?)

사실, 난 B에게 빚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20살 그때로 돌아가 보자. 슝~


우리 동아리는 봉사를 위해 모인 단체지만 음악 동아리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기타와 노래를 즐겼다.

시간만 나면 장소 상황 불문하고 기타를 치며 노랠 불렀고, 때문에 회원들 대부분은 기타를 잘 다뤘다.

당연히 신입인 우리도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선배들에게 건너 건너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명, 막걸리를 먹으며 어깨너머 배운다는 ‘막걸리 기타~’

A마이너, G마이너, E마이너, A7, C, F코드와,  슬로 고고, 슬로 락 정도의 주법만 알면 웬만한 유행가는 치고도 남는다. (이 정도면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무난하다)

나도 열심히 기타 강습에 참여했고, 여학생 중  친다는 축에 속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우리 과에서 MT를 가게 되었다.

과대가 MT 계획을 짜면서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기타반주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맹세코 그때 진짜 가만히 있었다. 내 실력을 내가 아니까~기타도 없고..)

근데, 오지랖 넓은 내 친구 정숙이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OO이가 기타 잘 쳐야~. OO아~ 니가 기타 가져와서 쳐라”

“잉? 내가? 나 기타도 없는데?”

 “빌려서라도 가져와야~”


이놈에 과대는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빛의 속도로 준비물 체크리스트에 내 이름을 적어버렸다.

'아이쿠야~ 그럼 기타를 누구에게 빌려야 하나?'


나는 우연히 동아리실에 들렀다가 기타를 자가 보유하고 있는 B를 만났다.


“ B야~ 너 참 잘 만났다. 너 기타 있지? 나 기타 좀 빌려주라”

“기타? 언제 필요한데? "


너무도 쿨하고 흔쾌히 승낙한 B에게 난 출발 시간과 장소를 미리 일러두었다.

MT당일, B는 이른 아침부터 중앙도서관 주차장 앞에서 기타를 둘러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무튼 고맙다야. 잘 쓰고 돌려주께”

"그래~ 잘 갔다 와라~"    


그날 밤, 우리는 MT의 하이라이트, 캠프파이어를 위해 모두 모닥불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과 남학생이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맡고 내가 옆에서 기타 반주를 했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길가에 마주 않아 ~ 딩가딩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 실력이 좋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냥 몇 개 코드로 피스를 위아래로 지그작 지그작 그으면 웬만한 대중가요는 대충 맞게 돼있다.)


즐거운 오락시간이 끝이 나고 우리는 남녀로 구분된 숙소에 각자 짐을 풀었다.

나는 여학생 숙소 귀퉁이 벽에 내 가방과 기타를 세워놓고 늦은 잠이 들었다.

한참 꿈나라 삼매경에 빠져 있던 그때, 갑자기 빠삭~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질듯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야~ 이 일을 어쩐다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 과에 재수해서 들어온 떡대 언니였다.

언니의 망연자실한 얼굴과 함께 우리나라 38선처럼 허리가 두 동강 난 기타가 처참한 몰골로 내 눈에 들어왔다.

언니는 화장실을 가다 벽에 기대져 있는 기타를 발로 차버렸다며,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표정으로 엉덩이까지 덥석 주저앉아 말했다.


“아악~ 나 몰라~ 이거 내 기타도 아니란 말이야~” 나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목소리로 꺼어꺽 소릴 질렀다.


.,.. 우린 한동안 이미 운명을 다한 기타를 사이에 두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를 보다 못한 정숙이와 과 친구들이 급기야 솔로몬 중재자로 팔을 걷어붙였다.


" 야~ 야~ 그러지 말고 둘 다 잘못이 있응께 5:5 반반으로 책임지는 것이 어쩌겠냐?"


그 당시 세고비아 기타 값이 대략 10만 원 정도였다.

난 5만 원도 억울해 죽을 판인데 되려 떡대 언니는 자기가 더 억울하다며 쌍심지를 켰다.


"야! 나는 그렇게 못해! 나는 삼만 원만 낼란다, 나머지는 너하고 기타 주인하고 책임져! 어차피 그 기타 새것도 아니잖아? "

? 그게 또 뭔 소린가? 그럼 과연 이 기타 값은 누가 물어줘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소송으로 갈 수도 없고...  


아~나는 뭐 한다고 치지도 못한 기타를, 그것도 빌려까지 와서 간수도 못하고 이 사달이 나게 했단 말인가?, 정숙이 고것은 웬 오지랖으로 나를 추천했고? 좌우지당간 나는 이 얘길 어떻게 또 B에게 하나?

생각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져 왔지만, 되려 억울하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떡대 언니에겐 일말의 타협선이 더 없는 듯했다.

나는 이미 사망해 버린 기타를 숙소 쓰레기장에 버려두고 주인 잃은 케이스만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더 미안시럽게도, B는 우리가 출발했던 중앙도서관 앞 그 자리에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B가 나에게 맘이 있었다고 본다 ㅎ)


“잘 갔다 왔냐?”

“응? 으응... 근데 잠깐, 나 할 얘기가 있어~”     


난 학생회관 휴게실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B에게 건네며 그간의 사고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니까,,, 니 기타가 요래 저래 그리 되부렀응께,  내가 4만 원 내고 니가 3만 원만 더 보태서 새로 사믄 어쩌겄냐?”


B는 아직 사태파악이 안 되는지, 아니면 그게 말이냐 막걸리냐 싶은 것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 막힌 정적이 조금 흐른 후, B는 뭐에 홀린 모양으로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하더니 '어쩔 수 없지~' 그 한마디를 남긴 체 내가 건네준 기타 케이스를 들고 조용히 돌아서 갔다.


'야~ 니가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 하잖....아.... 가 아니고, 휴~ 다행이다아~' 싶었다.

그렇게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니, 되는 듯했다.)


몇 달 후, B가 자신의 생일에 우리 동기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나도 착한(저렴한) 선물 하나를 챙겨 들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룰루랄라 B의 집을 방문했다.

나는 그 집에 가서야 알았다.

B가 누나가 3명이나 있는 시스터보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일케이크를 자르고 생일음식을 나눠 먹고 노래까지 부르며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누나들이 방문을 벌컥 열더니,


“누가 OO이냐? 내 동생 기타 빌려간 OO이가 대체 누구냐? ”

“헉! 왜~요? 제가 OO인데요~”     


그날 난 누나들의 레이저 눈빛에 온몸이 화상을 입은 줄 알았다.

'니가 순진한 내 동생의 호의를 그리 짓밟아 놓은 가시나란 말이냐? ‘ 는 눈빛으로 나를 지려 보던 누나들....

나만큼이나 B도 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어쩔 줄 모르는 것 같긴 했다.

아~ 내가 B를 너무 과대평가했었나? 생긴 것과 달리 과묵한 진짜 싸나이라 믿고 있었는데, 그 일을 누나들에게 홀라당 일러바치다니...


그 후 우리의 관계는 180도 역전되었다.

B는 나만 보면 죄지은 사람처럼 쩔쩔 메었고, 나는 제대로 삐진 티를 팍팍 내며 되려 본체만체 B를 투명인간 취급해 버렸다.

도대제 B가 뭔 죄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기타도 잃고 친구도 잃었던 비운의 주인공 B는 지금 우리 중 유일하게 잠수를 타고 있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그때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그러나 사람일은 모른다.  

문학적 소질이 참 특출 난 B였으니, 이 브런치 어딘가에서 멋진 필명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짧은 메시지 하나 남겨본다.


B야~ 행여, 이 글을 보게 되거들랑 연락 좀 주라.

나 지금은 기타 값 다 물어줄 만큼 돈 많이 있다.

니가 연락하믄 새 기타도 사주고 밥도 사주께.

그리고 너 혹시 그때 나 좋아한 거 아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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