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릴은 추억으로 남기고
바야흐로 독일엔 그릴의 계절이 왔다. 집집마다 단체로 그릴 파티를 하는지 걷다 보면 자욱한 연기와 함께 고기 구워지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코를 벌름거리며 오늘은 또 누구네가 고기를 굽나 부러워한다. 마트엔 그릴용 숯부터 그릴용 소시지와 치즈까지 그릴에 필요한 모든 용품이 대폭 늘었다. 남편은 매주 전단지를 보면서 그릴 용품에 눈독을 들인다. 난 그릴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고 어떻게든 철벽 수비 중이고. 물론 햇살 좋은 날의 그릴과 맥주는 낭만이고 즐거움일 테지만.
식탁에서 고기를 제거하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혼자 살면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이 또한 인식의 변화를 겪으며 시행착오를 거쳐 완전히 끊기까지의 시간은 걸린다. 과거의 식생활을 돌아보니 난 그렇게 육식을 즐기진 않았더라. 그래서 어쩌면 쉬울지도. 순댓국, 족발, 곱창, 돼지껍질 등 보기에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건 솔직히 한 번도 먹어본 적도 없다. 최애 고기 아이템은 묵은지 삼겹살 정도.
<기적의 밥상>을 읽고 동물성 단백질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서서히 줄였다. 익숙한 무언가와 안녕을 고하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억지로 끊은 건 아니고 가족에겐 고기 요리를 해주면서 가끔 먹었다. 그러다 신기하게 어느 날은 미역국에 넣은 쇠고기에 코를 막는 순간이 왔다. 치킨가스를 만들려고 닭가슴살을 만지는데 그 물컹한 느낌에 소름이 쫙 돋은 날 이건 아니지 싶었고.
스테이크를 사랑하는 남편의 금단 현상이 제일 심하다. 아이들은 그나마 어릴 적부터 습관을 들이니 쉽고 작은 아이가 큰 아이보다는 훨씬 채식 위주의 식단을 좋아한다. 고기 식감을 알기 전에 딸은 이미 채소와 과일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알아버렸다. 거기에 더해 엄마의 변화된 인식의 힘을 보탰다. 큰아이는 가끔 치킨이나 돈가스를 원하면 해주곤 했는데 오히려 가끔 먹어서 그런지 속이 좋지 않다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설사를 하더라도 먹겠다면 오케이, 요리된 걸 사다 준다. 그러던 아들도 어느새 고기가 좋지 않다는 걸 깨닫는 듯 보인다. 두부가 고기보다 훨씬 맛있다는 걸 보면.
채식 이후, 남편에겐 1년 동안 원하면 고기 요리를 해줬지만 칼자루 쥔 사람 마음대로 고기 사는 빈도수를 현격히 줄였다. 요리엔 전혀 관심이 없고 해주는 대로 먹는 남자라 가끔은 두부 요리의 신공을 발휘하며 지혜롭게 대처한다. 두부 카레, 두부 숙주 덮밥, 두부 김밥, 두부 김치찌개 등 두부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단백질 식재료 중 두부가 떨어지지 않게 사두는 편인데 어느 날 마트에 두부가 없다. 남편이랑 고기 코너를 지나면서 "김치도 있는데 삼겹살 김치찜 해줄까" 슬쩍 떠본다. 거절해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마음대로 채식을 고집하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고기 요리를 하지 않는 것에 한동안 묘한 죄책감이 들면서 마음이 약해질 때가 있다. 약해진 마음으로 삼겹살 한 근을 샀고 그날 저녁은 삼겹살 말이 김치찜을 했다. 솔직히 수미네 반찬에서 본 영상은 군침이 돌기에 충분했다. 묵은지에 핀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들은 엄마답지 않게 어쩐 일로 고기 요리냐며, 감격했다. 오랜만에 푹 익은 묵은지에 곱게 싼 삼겹살을 먹으니 고향의 맛이 따로 없다. 그런데 후회는 금세 몰려왔다. 요리 후 냄비를 정리할 때 보니 기름기가 덕지덕지. 세제로 닦아도 쉽게 없어지지 않고 수세미에 엉겨 붙는 느낌이 영 기분 나쁘다. 이 기름이 내 몸 어딘가에 쌓인다고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바로 오누이와 남편에게 보여줬다. 그날부로 아무래도 고기 요리는 힘들다고 선언하고 먹고 싶으면 요리된 걸 사 먹던가 직접 요리하라고. 솔직히 이 선언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난 자주 가족의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휩싸인다. 식생활에 있어서 만큼은 타협하지 말고 단호하고 싶지만 흔들린다. 내가 확신을 가질 때 가족도 설득할 수 있을 텐데..... 건강뿐 아니라 동물 연대와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다. 제발 협조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