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하재영 지음
하재영의 책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엄마를 유심히 지켜봤거나 혹은 엄마가 된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이야기가 도처에 가득하다. 여자라서 혹은 엄마라서 한 번쯤은 생각했던 문제의식을 '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감정을 걷어내고 담담하게 썼다. "엄마만 홀로 다른 성을 갖는 것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주체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피가 섞이지 않은 여성을 가족 안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e북 22쪽)" 독일에서 나만 가족과 다른 성을 갖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빠르게 밑줄을 그었다.
편안한 안식처라 인식되는 '집'이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히 정돈되고 때마다 따뜻한 밥이 차리는 사람에게 자기만의 공간이 없고 가족 구성원 누구라도 쉽게 접근 가능한 반경에 늘 대기하며 가족과 다른 성을 갖는다. 그런 위치의 여성은 내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으로 존재하기 위해 엄마는 집을 비워선 안 되었다(24쪽)”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 라는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된 글은 나를 수시로 멈춰 내가 살던 집으로 데려갔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곳. 떠나면 돌아갈 집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이라는 공간에 머물면서는 수시로 벗어나고 싶다고 때때로 생각했다. 가족의 안식처일 뿐 내 안식처는 아니라는 생각도 물론 했고. 5분 대기조처럼 가족의 요구에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곳 어디에나 나는 산다. 수많은 집을 거쳐 현재의 내 공간을 갖기까지 끊임없이 내 존재의 무거움을 이야기했던 시간들.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인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고요함에 머무를 권리, 타인에게 침해당하지 않는 자기만의 온전한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이들일지라도 함부로 불쑥불쑥 나의 자유 시간을 침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하는 일의 집중력을 함부로 깨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인 고독은 내가 가 닿고 싶은 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고 꿈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는 토대가 된다. 때로는 분노를 삭이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내 목소리를 또박또박 말할 힘을 기른다.
내 욕망의 많은 것들이 전부는 아니라도,
적어도 일부는 내가 살았던 곳에서 비롯되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욕구, 고정된 성 역할을 거부하는 마음,
자기만의 방과 나의 자리에 대한 애착처럼.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중에서
독일어 수업 시간 단골 주제는 ‘자유시간‘. 자유시간이 생기면 주로 뭘 하냐는 질문이다. 대부분이 운동이나 요리를 하는 등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야기를 나눈다. 난 대번에 아이도 남편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제일 중요한 자유시간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이런 속뜻을 이해하는 사람의 웃음소리가 비대면이지만 느낄 수 있다. 결혼 후 아니 정확히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 혼자만의 시간은 늘 간절한 자유다. 새벽과 요가 그리고 글쓰기와 걷기가 모두 혼자만의 시간 속 자유로움과 맞닿아 있다.
오랜 시간 자리의 투쟁은 곧 권력이 투쟁이었다. 가부장제 아래 할머니가 가장 큰 방을 차지한다는 건 아들을 가진 자의 권력이고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만 다른 성을 사용한다는 건 '영원한 이방인'이어서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4인 가족, 평균적으로 방 세 개인 집에서 산다고 가정했을 때 엄마에게 방이 돌아올 확률은 지극히 낮다. 자녀의 성별이 다르다면 더더욱. 성별이 같아서 한 방에 자녀가 쓴다고 해도 대부분은 아빠의 서재라는 이름은 자주 들었지만 엄마의 방, 혹은 엄마의 서재는 여전히 낯선 단어다. 버지니아 울프가 경제적인 독립과 자기만의 방을 그 오래전에 언급한 이유는 오랫동안 여성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독일에 오기 전까진 계속 아파트 생활을 했다. 신혼 땐 충주의 17평, 다음엔 익산의 23평 둘이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편은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집착이 없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 나 혼자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잠자리 독립까지 나만의 공간은 늘 중요했다. 아이가 어릴 땐 집안의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어려워서 틈만 나면 카페로 나갔다. 어린아이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 일도 할 수 있으려면 거실에 책상을 놓기도 했고. 지금의 집에 살기 전엔 피치 못하게 부엌을 내 공간으로 삼았다. 아이들 방과 떨어져 있고 거실과도 분리된 독립된 공간이라 식사시간 외에는 널찍하게 이용했다. 양주 카페 꽃피다 2층 다락에선 첫 책의 초고를, 슈바니비데 스타케 2층에서 퇴고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독일에서 두 번째 사는 집은 4인 가족이 각자의 공간을 쓸 수 있어서 갈등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다른 층에 있다는 게 퍽 좋다. 비싼 월세가 아깝지 않을 만큼. 남편은 집을 구할 때부터 온전히 독립된 방을 아내의 서재로 쓰기에 딱이라고 점찍어 둘 정도로 나의 공간을 존중한다. 문칸방처럼 현관에서 가깝지만 안채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방이라 제일 마음에 든다. 결혼 이후 가족과 분리되는 걸 경험하지 못해서 자주 괴롭던 마음이 보상받을 만큼. 가족은 '한 팀’이라는 명제는 가끔 부담스럽다. 가족도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할 때 건강한 관계로 오래 잘 살겠다.
저자의 가족 중에 유일하게 책을 읽었지만 자기만의 방은 없었던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만을 위한 자리를 점한다는 건 많은 걸 의미한다는 걸 깨닫는다. 집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여러 마음의 부침을 거쳐서 집필 노동자가 되고 79년생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자신이 있어도 될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 자신이 머물렀던 과거의 집과 방을 거쳐 현재의 자신이 되기까지 어떤 시절을 겪고 지났는지 민낯을 보여준다. 자전적 이야기지만 글 전체가 다 자기 얘기는 아닌, 가독성 좋고 읽는이 스스로 공간과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와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글. 쓰기를 욕망한 사람답게 통과한 시절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유한 흔적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