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육수 코인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쌀뜨물 붓고 반으로 자른 양파와 파 흰 밑동 그리고 마늘을 넣어 국물을 낸다. 요리하는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으니 육수는 자연스레 야채다. 독일에선 아무래도 멸치와 다시다까지는 사게 되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육수쯤은 대충 먹자고 생각해서 그렇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뭐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는 품목이 바로 멸치와 다시마다. 한인 마트에서 가격 대비 그리 싸지도 않고. 그래도 멸치 몇 마리가 빠졌다 나온 국물은 감칠맛이 다르다. 그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작년 12월에 한국에서 보낸 택배가 배 타고 4개월 걸려 독일 찍고 돌아가(이 이야기는 차후에 쓸 예정) 신묘한 육수 알갱이를 싣고 다시 왔다. 그 택배가 다시 돌아갈 무렵, 보낸 당사자인 언니는 어떻게 부친 택배인데 트라우마라고 손사래 쳤고, 눈 빠지게 기다린 우린 허무했다. 먼길 돌아가느라 너덜너덜해진 택배 상자를 바꿔 다시 꾸리면서 언니는 무슨 ‘시크릿 코인’을 아냐고 물었다. “시크릿 코인? 시크릿 쥬쥬는 아는데, 그건 또 뭐야?” 비트 코인도 아니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었더니만. 언니는 육수 내는 건데 엄청 편리하고 신기하단다.
“야, 동전 크기인데 된장찌개에 하나만 넣으면 국물이 끝내준다. 멸치도 다시마도 필요 없어. 맛도 멸치 육수 낸 거랑 똑같이 맛있는 거 있지”
“와, 그런 게 다 있어? 대박이다”
“너한테 보내면 아주 요긴하게 쓸 거야. 다른 건 살 시간도 없고 이거라도 보내야겠다”
"그래 이왕 돌아간 거 할 수 없지. 브로셔는 안 급하니까 빼도 돼"
이런 얘기를 한 게 8월인지 7월인지 모르겠는데 넉 달도 안 걸려 왔다.
육수 종류도 다양했다. 시원 육수는 멸치를 베이스로 팽이버섯에 느타리까지 무려 17가지 재료가 들어갔다. 어쩐지 국물 맛이 예술이다. 매콤 해물은 청양고추로 매운맛을 더한 해물인데 떡볶이에 두 알을 넣었더니만 단번에 칼칼하고 시원한 게 분식집 저리 가라다. 시원 육수 뚜껑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멸치 향이 확 난다. 과연 놀라운 맛을 낼 것인가. 물 200ml당 한 알씩 넣으라고 되어 있길래, 네 식구 먹을 한 냄비 끓이는 미역국엔 네 알을 넣었다. 처음엔 이렇게 비싼 줄도 모르고 좀 과했다. 벌써 때깔부터 다르다. 국물은 우리가 아는 그 맛. 오누이는 국물의 클래스가 다르다고 그러고 남편은 보약 한 첩 쭈욱 마신 사람처럼 들이켜더니 ‘처형 사랑해요’가 절로 나온다.
시크릿 코인 덕분에 '처형을 사랑한 제부'라고 언니한테 바로 알렸다. 언니도 이게 그렇게 비싼 줄 모르고 나한테 다 보내고 다시 살려니 생각보다 비싸단다. 가격을 검색해보니 35알 들이 세 병에 5만 원이다. 헐, 내 돈 주곤 절대 못 사겠다. 나뿐 아니라 주변에 다 나눠주고 사려니 아쉽다고. 언니는 현재 멸치로 육수 내는 중. 끓는 물에 넣기만 하면 녹아 없어지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육수 낸 건더기를 건져낼 필요도 없어서 그 시간만큼 단축이라 요리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매직처럼 알갱이만 넣어도 진한 맛이라 이틀째 미역국을 끓인다. 오누이가 좋아하는 사골 육수도 기대된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고기만 삶아서 넣으면 바로 사골국이겠다. 육수라는 게 그렇다. 별거 아닌 듯싶어도 음식의 전체적인 맛을 결정짓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야채 육수로도 충분하다 괜찮다, 물론 야채 본연의 맛에서 우러나오는 담백함을 좋아한다. 농축된 멸치 육수 알약 풀고 미역국이든 잔치국수든 끓여보니 맛의 품격이 확연히 다르다. 언니 말대로 진짜 대박이다. 독일에 살다 보니 없어도 괜찮다고 체념하고 사는 게 어디 멸치 육수뿐일까. 괜찮은 척 합리화하면서 사는 게 어디 한두 개일까, 싶은 게 이런 결론은 생각 못했는데 갑자기 목이 턱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