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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Dec 11. 2021

당신의 아이를 잘 지켜보겠노라는 말

독일 유치원 적응기


  

딸은 첫 한 달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엄마 얼굴을 그려왔어요. 독일 유치원에 가기 전엔 멋도 모르고 룰루랄라 신나했지만, 하루 만에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두려움에 질려 울었어요. 순차적으로 적응을 도왔지만, 우는 애를 억지로 떼어놓고 말았어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독일에서 겪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어요. 큰 울음은 이틀 만에 멈췄지만 새어 나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는 게 눈에 보여서 더 안쓰러웠죠.      



유치원은 집에서 나와 모퉁이 두 개를 돌면 있어요. 겉에서 보기엔 수수한 보통 독일식 집처럼 보이지만 아름드리나무와 아기자기한 놀이터가 안쪽에 숨어 있어요. 딸이 합류한 무지개 반은 60대 여자인 잉겔Ingel과 30대 남자인 다니엘Daniel이 담임이에요. 한 반 정원은 열다섯 명으로, 4세부터 6세까지 다양한 연령이 반을 구성하는 게 한국과 다르고요. 선생님 복장이 가장 놀라운데, 한여름엔 모두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언제라도 바닥에 널브러져 놀 수 있는 편한 차림이에요.      


무더운 여름엔 2층 테라스에서 다니엘이 호수로 나무에 물을 뿌리고 꼬맹이들은 옆에서 물장난을 쳐요. 그날 친구들이 모두 팬티만 입고 놀았는데 딸은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다고 했어요. 어느 날은 망치로 못을 박는 목공을 하고 호두 껍질에 물감을 칠해 끈으로 다리를 달아 거미를 만들어요. 딱딱하게 말린 옥수수에 털실을 붙여 인형을 탄생시키고요.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돋보였어요.     



교실로 들어가기 전 긴 복도엔 겉옷과 도시락 가방을 걸어둘 옷걸이가, 그 위엔 소지품 놓을 공간이 있어요. 벽면엔 각자 이름이 적힌 사진이 있어서 쉽게 누구 자리인지 보여요. 사진이 붙은 사물함 중간 부분에 안내문을 자석으로 붙여두면 부모가 수시로 확인하니 직접 선생님을 만날 일은 드물어요.      


등원 둘째 날, 엄마와 헤어진 후에 경험한 낯섦이 엄청나게 두려웠다는 걸 기억하고 아이는 그냥 훌쩍이는 정도가 아니라 대성통곡을 했어요.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강한 이라도 눈물이 나는데 다니엘도 눈가가 붉어졌어요. 그 순간엔 구체적인 도움을 주거나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지만 그냥 이 상황을 공감하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했어요.      


그 이후 다니얼은 서툰 영어로 저와 어떻게든 소통하며 자신의 할일을 충실하게 했어요. 언어적 어려움이 가장 컸던 첫 6개월, 몇 번의 고비는 당연했죠. 하루에 한두 시간씩만 유치원에 머물 때도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가시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말해줬어요.      




어디에나 있는 장난꾸러기가 자꾸 때리고 도망을 친다면서 억울해한 날도 있어요. 말을 못 해서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워서 답답했죠. 옆에 있던 애들이 선생님께 알린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요. 이유 없이 공격당하고 언어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속상하다고 했을 때 "내가 당신의 아이를 잘 지켜보겠노라"라는 말이 어찌나 힘이 되던지요. 그 이후 선생님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아서 아이가 불편하다고 할 정도로 지켜봐 주었어요.     


집에서는 "훼어아우프Hör auf(그만 해)" "기벡Geh weg!(저리 가!)" 등 자신을 보호하는 독일어를 연습했어요. 독일어가 어려우면 한국어를 해도 괜찮다고 안심시켰어요. 초반에 독일어 관련 도움을 받았던 한나에게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가 독일어로 뭐냐고 물었어요. 한국에서 입버릇처럼 아무 생각 없이 썼던 이 말은 선생님을 못 믿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내 아이가 부족하니 잘 봐달라는 부모의 걱정 섞인 입말이에요. 외국인이라는 특수 상황인 만큼 제 마음 편하자고 당부라도 하고 싶었나 봐요. 한나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놀랐어요. 선생님이 아이를 잘 보살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고요.      

어느 날은 “독일 유치원 재미없어. 가고 싶지 않아.”라고 담담하게 말해요. 이유를 물으니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없고 세 시간 동안 혼자 퍼즐만 맞췄다면서요. 3이라는 숫자는 체감상 그만큼 오랫동안 혼자 퍼즐을 했다는 걸 거예요. 독일 유치원은 자율이 많이 주어졌어요. 획일적으로 뭔가를 하는 날이 드물고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도 많아요. 아침은 집에서 먹는데 매일 간식 도시락을 싸가서 먹는 건 뻘쭘하고 낯설어요. 자율은 자유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뭔가를 하는 힘인데 자율이 갑자기 주어지면 어른이든 아이든 감당하기 어렵잖아요. 아이가 뭔가를 요청하지 않는 이상 선생님도 크게 개입하지 않으니 이상하고 심심했나 봐요.     


기존의 아이들은 이미 친해진 상태여서 그런지 딸을 잘 끼워주지 않았어요. 다른 애들이 하는 방식으로 '같이 놀자'라는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 친구 할까?" 했는데 "부buh"라며 엄지손가락을 뒤집어서 거절해요. 엄지를 들어 놀자고 했는데 자꾸 거절을 당해서 기분이 나빠요. 독일인들은 어릴 때부터 이렇게 거절을 배우는 건가. 친구가 놀자는데 대놓고 "싫어."라 말할 수도 있다니, 좀 당황스러웠어요. 초반엔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다른 아이 입장에서 오랫동안 놀기에 한계가 있을 거예요. 때로는 특별한 말 없이도 잘 놀겠지만 그래도 언어는 중요하니까요. 그때도 다니엘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언어적 어려움으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안다. 재인이는 늘 단짝 친구가 있었고 친구와 노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친구랑 놀고 싶은데 거절당하니 속상하고 유치원에 가기 싫어한다. 친구와 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세 시간 동안 퍼즐만 했다는, 그 이야기의 맥락은 친구와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슬프다는 뜻이라는 걸 파악했어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길게 노는 게 어렵겠지만 선생님이 도와준다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으니까요. 이때도 다니엘은 똑같이 말했어요. "내가 재인이를 더 잘 지켜보겠다"라고요. 딸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오히려 알려줘서 고맙다면서요. 그러곤 바로 다른 반의 언니 같은 친구와 놀도록 연결해 주었어요.      




힘든 시기에 꼭 필요한 도움을 준 다니엘을 신뢰했어요. 어려움을 느끼거나 불편한 점은 선생님을 믿고 적극적으로 상의하고요. 한 학기가 끝나고 부모 상담에서 딸이 '거절'이란 걸 하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어요. 아이는 독일어의 야Ja(예)보다 나인Nein(아니오)을 배웠어요. 거절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혹시라도 거절당해도 괜찮다는 것도요.      


믿었어요. 다섯 살이라는 나이와 한국에서 처음 유치원 갈 적에 엄마와 충분한 공생기를 보낸 후, 어려움 없이 떨어진 경험과 애착의 힘을요. 다만 새로운 환경에서 겪는 진통이니 어서 지나길 바랐죠.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옮기면서요. 유치원 창가에 매달려서 하염없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노라면 뒤돌아 눈물을 삼켜야 했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자기 목에 둘러준 스카프에서 엄마 냄새를 킁킁 맡으며 참았다고 했을 때는 코끝이 찡했어요. 잘 견딘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워서요. 환경만 낯선 게 아니라 언어까지 생경한 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문화를 익히느라 힘들었지만, 덕분에 부쩍 자랐어요.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친구와 노는 방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두려움을 견디고 짧은 시간 안에 그 어려운 독일어를 익혔고요. 낯선 환경을 이겨내는 것을 몸소 체험한 셈이에요.      



졸업식날 졸리나와 함께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훌륭한 팀워크를 발휘했어요. 집에선 부모가, 유치원에선 선생님이 아이는 아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요. 언어를 배울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이 지나 친구가 생겼어요. 졸업식 날 선물로 받은 앨범엔 1년간의 적응사가 담겼는데 침울했던 표정이 점점 밝아졌어요. 1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한국에서 단짝 친구와 놀던 때와 다름없이 환한 웃음으로 온종일 놀았어요.          



*프리즘에서 연재 중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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