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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Aug 04. 2018

지금은 간신히 아무렇지도 않을 무렵

애도 과정과 비슷한 적응 기간


롤랑 바르트는 <애도 일기>에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부르던 ‘나의 롤랑, 나의 롤랑’ 이 환청처럼 들리고 집 곳곳에 엄마의 손길이 느껴져 괴로워요. 집을 떠나 어딜 가나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을 떨칠 수 없죠. 소중한 이가 곁에 없는 고통과 슬픔이 어떤 것인지 그의 글에서 만져졌어요.   


독일로 오면서 경험한 헤어짐이 '짧은 죽음'에 비유한다면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과정은 바르트가 말한 ‘애도의 감정’과 비슷했어요. 18개월이라는 애도의 한도는 어떻게 산정된 건지 모르겠지만, 낯선 곳에서 정서적, 신체적으로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데 걸린 시간이에요. 엄마를 잃은 슬픔은 사계절을 오롯이 한번 겪는 것으로는 당연히 부족할 테지만요. 


얼마 전부터 알람에 의존해 일어나는 것 말고 몸이 알아서 깨는 새벽 기상이 가능해졌어요. 한국과 8시간(혹은 7시간) 차이 나는 곳에서 한국 자정 시간인 독일 오후 3시엔 눈이 무거워서 저절로 감겼거든요. 배꼽시계만큼 정확한 몸이 신기할 정도였어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습관적으로 한국 시각을 확인했는데 늘 일어났던 새벽 5시라 왠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죠. 새벽형 인간이 되려고 들인 공이 생각나서요. 




밥도 좋지만 빵도 먹을만해요. 딸이 ‘어두운 빵’이라고 부르는 딱딱한 통밀빵(Vollkornbrot)이 어느 순간 맛있다고 느꼈어요. 남매가 배고픈 빵(Hunger)이라고 부르는 부드럽고 촉촉한 하얀 빵 대신 몇 쪽만 먹어도 배가 든든한 빵을 자주 먹어요. 간단한 독일 식단이 준비하기도 편하고 의외로 몸에 부대끼지 않아요. 하루에 한 끼도 밥으로 먹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얼큰한 국물이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생각나지 않아요. 겉절이나 깍두기를 마지막으로 담근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네요.  


친구 집에 초대받으면 생필품인 휴지나 세제 대신 꽃이나 와인을 준비해요. 하긴 한국에서도 집들이가 아닌 이상 생필품을 사 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일요일엔 문 여는 마트가 없으니 토요일엔 꼭 장을 보고 크리스마스엔 3일이나 상점이 문을 닫아도 불편하지 않아요. 24시간 편의점은 물론이고 자장면 한 그릇 배달시키지 못해서 세끼 꼬박 뭔가를 차려내는 수고로움이 억울하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주문을 걸고요. 그래야 덜 불행할 테니까요.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가 싫지 않아요. 가끔은 빗소리가 정겹고 폭우로 퍼 붇지 않고 수시로 가는 비가 내리는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중얼거리고 외출하면 어김없이 비를 맞지만 그러려니 해요. 여름엔 한국보다 덜 덥고(올해는 지난주부터 36도까지 오르는 날이 많아 덥지만요) 겨울엔 덜 추운 날씨가 괜찮다, 라고도요. 겨울엔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손에 꼽지만 오후 4시면 어두워지고 해가 어찌나 귀한지 해가 얼굴을 보이면 감사가 절로 나오고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려고 밖으로 뛰쳐나가요. 


카페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마시는 커피가 얼마나 달콤한지 자주 생각해요. 한국어로 떠드는 말들이 다시 내게로 쏟아져 폭포처럼 맞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죠. 첫 해엔 친밀한 사람, 알던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어요.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일뿐 아니라 이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만큼요.  


조금씩 마음을 여니 좋은 친구도 만났어요. 종종 만나 거친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의외로 진지한 대화가 가능해요. 새로운 친구에게도 시간을 들이면 언젠가는 친밀해지리라 믿으며 마음을 내어주는 중이에요. 독일어만 들리는 곳에 있다가 오면 멀미가 나서 돌아와선 여전히 갈 길이 먼 영어에 더해 독일어까지 해야 한다는 게 형벌처럼 느껴져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요. 돌아보니 독일어에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때도 신기하게 일 년 반 될 즈음이에요.

 

절망, 어딜 가나 지루할 뿐, 무기력, 건조한 외로움 등 바르트가 애도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면서 느낀 감정과 흡사해서 놀랐어요. 기후뿐 아니라 음식 그리고 만나는 사람과 신체 리듬까지 적응되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가시고 살만해지기까지요. 지금은 간신히 아무렇지 않을 무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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