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두 장과 백호당 할머니
남편이 어느 날 조커 카드를 한 장 내밀어요. 새로운 땅에 착륙한 자신과 내게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는 의미로 한 장씩 간직하자고요. 독일 올 때 비행기에서 남편은 얘들과 원 카드게임을 했는데 조커만 몰래 챙겼다면서요. 이런 게 무슨 효력이 있다고 속으로 참 실없군 피식 웃으며 조커를 지갑 안쪽에 고이 챙겨 넣었어요. 동시에 언젠가 만난 백호당 할머니가 떠올랐어요.
평생 처음으로 점집을 찾았을 때 나이 서른일곱이었어요. 절에만 가도 부처임 상이 무섭고 향냄새가 낯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던 내가 점집을 찾는 일은 드문 일이죠. 둘째 아이까지 절대 양육 기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종종 사치로 느껴졌고 점점 사라져 가는 듯한 내 존재를 어떻게든 붙들고 싶어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벌이가 불안정한 남편을 대신해 돈 벌러 나갈 용기뿐 아니라 남편을 집에 들여 앉힐 배포는 더더욱 없었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꾸역꾸역 살다가 큰 마음먹고 점집을 찾았을 거예요.
오누이는 엄마가 곁을 지키니 알아서 잘 자랐어요. 살림이 빠듯해도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지 않으며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다며 애써 호언장담하던 대책 없고 지금보단 젊었던 부부는 시간이 있을 때 떠나자며 자주 여행을 다녔어요. 남편이 대기업을 자발적으로 나와 헤드헌터 전향 후 수입은 들쑥날쑥했지만 십 년간 굶지 않고 살았네요. 대신 고정적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은 자유로운 덕에 남편은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어요. 그러고 보니 우린 한국에서도 이미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았군요. 적게 벌고 조금만 소비하고 저녁은 함께 먹는.
허름한 어느 주택가에서 만난 백호당 할머니는 나와 남편에 대해서 점쟁이 같은 말만 해서 깜짝 놀랐어요. 마침 그 무렵 각자 우리는 영어 과외를 했는데 집에 영어가 둥둥 떠다닌다고 했거든요. 헤드 헌터 5년 차엔 프리랜서로 뛰면서 기본급도 없는 상태라 남편은 독서토론 강사부터 과외 그리고 통, 번역 아르바이트까지 점쟁이 말대로 여러 가지 명함을 가지고 포트폴리오 수입을 창출했어요. 그때 한 창 유행인 1인 기업을 꿈꾸면서요.
포트폴리오 수입이 자리잡기까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얘들은 쑥쑥 자라고 대출 상환금도 갚아야 해서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수입은 불규칙하니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더라고요. 조직을 떠난 지 오래라 재취업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웠어요. 지원하는 곳마다 쓴 잔을 마셨고 그때마다 남편의 낙담은 컸어요. 점점 자신감을 상실하는 남편을 보는 일은 더 괴롭고요. 조직에 미련을 두는 게 못마땅했지만, 남편이 구본형이나 찰스 핸디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더 견디기 힘들었어요.
남편이 언제나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는데 어린아이를 두고 돈 벌러 나가지 못한 내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크면서 틈틈이 과외도 하고 도서관 강의도 하면서 조금씩 수입을 창출했지만, 가계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어요. 그런 나에게 남편은 늘 당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라며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죠. 조직을 떠나 헤드헌터가 될 때도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남편을 원망하기도 뭣했죠. 늘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남편에게만 가장의 무게를 심하게 지우면 불평등할 테니까요.
우리는 가끔 만약 남편이 조직을 떠나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론 풍요로웠겠지만, 오누이를 갖기(남편이 대기업 다닐 때 두 번 유산 되었고)도 힘들었고 어린 시절 충분히 함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돈보다 시간을 충분히 누린 삶에 자족하기로 했어요. 물론 때때로 불투명한 미래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로 많이 싸웠지만요.
가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남편은 생활 면에서나 아이들 교육 면에서 좀 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 방도를 모색했어요. 영어권보다는 독일어만 배우면(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껴요) 진입장벽이 그나마 낮은 곳이 바로 독일이라고. 오랫동안 선망했던 나라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한몫했고요.
새로운 사회에 진입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그 나라 학교에 다닌 후 졸업하고 취업하는 걸 선택했어요. 독일이라고 취업이 잘 될까 의구심을 품은 채요. 한때 유학이 꿈이었던 남편은 마흔 중반에 독일 유학을 준비하며 활력을 되찾았어요. 한국에 살았다면 남편은 가장으로서 끊임없는 자격지심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승승장구했다면 과감히 떠나지 못했을 거 같아요. 외국에서 살면 더 잘 산다는 백호당 할머니 말이 가끔 떠올라요. 독일에서 잘살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