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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l 27. 2019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독일어 어학원 VHS


*A2, B1 수업일 수 40일 :  하루에 4시간 수업에 각 390유로(브레멘 기준)


사람 나름이겠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독일어도 이왕 할 거면 빨리 시작하는 게 당연히 좋다. 독일어 수업에서 이것저것 물어볼 때 꼭 나오는 질문이 "독일에 얼마나 살았어?"인데 이때 난 2년 살았는데 3년 산 사람보다 좀 잘하면 이상하게 안심이 되기도 한다. 물론 같은 반이라도 수준이 천차만별이지만. 외국에 살면서 그 나라 언어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은 하기 싫은 이유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알면서도 쉽게 못하는 건 그만큼 시작도 유지도 어렵다는 거다.


저렴한 수업료로 집중적으로 독일어를 배울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곳은 VHS(Volkshochschule)다. 평생 교육원 같은 곳인데 독일 어느 지역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진작부터 알아봤지만 우리 동네엔 매번 자리가 없었다. 독일어 배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매번 놀란다. 결국 브레멘 VHS까지 가야 해서 미뤘었다. 일주일에 3번 오전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네 시간 수업을 듣기 위해서 브레멘까지 왕복 두 시간까지 확보하려면 초등 2학년인 아이가 방과 후를 해야 한다. 작은애 등교 시간보다 먼저 집을 나가야 하는데 아침 7시 반, 칠흑같이 깜깜한 겨울엔 형광 조끼에 형광 불빛을 들고 혼자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도 걱정됐다. 무엇보다 황금 같은 오전 시간을 몽땅 독일어에 바쳐야 한다는 게 싫었다. 게다가 나의 개인 독일어 선생, 쇼팽이 있어서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은 받고 있었다. 어학원에 가지 않아도 될 이유는 넘치고 넘쳤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반끼리 학교에 모여 그릴 파티를 했는데 담임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독일어 취약한 엄마로서의 고뇌를 잠깐 내비쳤다. 그런데 글쎄 브레멘 VHS 강좌 리스트를 출력해서 아이 편에 보내주셨다이렇게 친절할 수가! A2, B1코스에 형광 마크까지 해서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조금만 이끌어주면 마음이 동하고 실행력이 발동되기도 한다. 이건 누가 봐도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집중적으로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즉시 아이 방과 후를 신청하고 바로 어학원 A2에 등록했다. 그게 작년 9월이다.



시작하기까지가 어려웠지 일단 시작하니 A2부터 B1까지 쉬지 않고 들어서 올 4월에 B1이 끝났다. A2 반은 모두 18명인데 같은 나라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첫날 자기소개를 하면서 선생이 각 나라를 칠판에 적었는데 세 줄이 꽉 찼다. 밑에서 셋째 줄 오른쪽 맨 위가 자랑스러운 Süd Korea!  인도 콜롬비아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스페인뿐 아니라 남자 친구가 독일인이라는 영국인 조와 스웨덴에서 온 루이스도 만났다. 남자 친구가 독일인이라도 집에서 독일어 할 일은 거의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연령은 20대 학생부터 30대 40대까지 고루 분포했다. 마흔 살 아줌마인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게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 



A2를 다닐 때는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마음을 터 놓고 친해지기엔 시간이 짧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독일어 실력이 부족했거나. 대신 선생 미카엘과 클라우디아는 꽤 마음에 들었다. A2  선생이 그대로 B1 수업을 한다는 걸 알고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교재 외에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말을 많이 시켜서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발음 교정은 또 얼마나 꼼꼼한지. B1수업 중간쯤에야 내 발음이 독일어스럽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 전엔 숱하게 지적을 받았고. 각 나라별 축제 발표(강요는 아니라 용케 하지 않았다)를 시키고 주로 작문 숙제를 내주고 첨삭해준다. 고통스럽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다. 하루에 몇 문장이라도 독일어로 생각하고 써보라고 종종 제안하고. 문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미카엘은 무척 친절하고 잘생겼다.    


하지만 클라우디아의 B1 첫 수업을 다녀와서 이렇게 썼다.


제길슨! 첫 수업을 끝내고 나서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이다. 첫날부터 너무 시켜서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소그룹으로 본문을 이해하고 몇 개의 질문에 답을 발표했다. 보고 읽지 말고 말하듯이 하라고 강조했다. 헝가리에서 온 20대 초반의 존과 같은 조였는데 참고로 존은 초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독일 대학에 들어가려고 독일어를 독학으로 엄청 열심히 하고 있었다. 독일어를 막힘 없이 줄줄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존 외에 나포함 둘은 들러리로 나갔다가 몇 문장 겨우 말하고 들어왔다. 얼마나 수치스럽던지! 내가 어디 가서 말 못 해서 주눅 들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 독일어 덕분에 자긍심에 스크레칭 났다. 선생도 ‘여기는 B1’이라고 정확히 언급했다. 나 들으라는 듯이.




감정형답게 첫날의 분노로 부르르 떨던 긴장감은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느는 것 같지도 않고 끝이 보이지도 않는 독일어로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을 드나들었다. 괴로움과 그럼에도 불구한 즐거움을 찾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각 코스별 40일 중 겨우 3일 빠지고 출석한 것만으로도 정신 승리다. A2 만 해도 쉬는 시간에 부러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다. 수업만으로도 뇌가 늘 포화상태여서. 그러다 B1 수업에선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친구를 사귀면 수업이 좀 더 즐거울까 싶어서. 쉬는 시간까지 독일어를 해야 하는 게 영 피곤했지만 친구들을 피해 혼자 베저 강까지 걸어갔다 오는 일은 최대한 자제했다.


덕분에 독일어 A2반에서부터 알던 친구지만 말은 많이 안 했던 아르헨티나에서 온 탱고 선생 로르디고와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종종 했다. 주말이면 함부르크나 드레스덴으로 탱고 수업 다녀온 일을 들려주곤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벌고 춤추는 걸 가르치는 일은 즐겁다면서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은 행운이란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한 번 앉은자리엔 지정석처럼 앉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로르디고는 수업 시간엔 유독 피곤한 내게 "괜찮냐고?" 늘 입버릇처럼 묻고 배려심이 많았다. 


로르디고 외에도 유독 잘 웃는 친구 몇몇과도 친하게 지냈다. 크게 잘 웃는 친구 세 명은 따로 만나 밥도 먹었다. 웃음소리와 제스처가 나만큼이나 큰 살리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친구다. 독일 남자와 결혼해서 독일에 산지도 2년이 되었고. 아이도 없고 일도 못하는데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지루하단다. 서아프리카에서 온 버지니아와 스페인에서 온 앙겔라는 이십 대 친구인데 오페어를 한다. 각 나라 음식을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먹기로 했는데 그전에 수업이 끝났다. 어찌 되었든 시간은 흐른다. 괴로운 시간도 행복한 시간도 동일한 속도로 성실하게. 인상 팍팍 저절로 써지는 수업을 그나마 이 친구들 덕분에 끝까지 들었다. 


어학원을 다닌 후 얻은 것은 뭐라도 독일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멸치 똥만큼은 생겼다는 거. 대가를 치른 딱 그만큼 잘 들리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주 연습한 만큼 말하기에 자신감이 붙어서 의사소통이 예전보다는 훨씬 잘 된다는 거. 하지만  B1정도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거. 이젠 쇼팽이랑 B1를 복습해야겠다 싶은데 이게 또 느슨해진다. 방학이라고 3주를 쉬었다. 고로 독일어 공부를 밀쳐둔지 3주째다. 하기 싫은 걸 알아서 잘하긴 참 어렵다. B2 수업을 들을 실력은 안되니 B1을 다시 복습하더라도 수업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멀거린다. 고통스러운 독일어 샤워 속으로 자발적으로 걸어갈 것인가 그냥 이 정도로 안주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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