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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그레이스 Nov 24. 2020

디트리히 본회퍼

타인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9)

네 번째 메시지 :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을 수 있을까?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이 아이는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의 교회와 첫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만남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상들과의 연관성을 수긍한다거나, 소중한 기독교적 가치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소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러한 가치가 우리 앞에 매우 약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례라는 형식을 통한 오늘의 만남은, 우리의 모든 소원이나 행위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질서의 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우리가 소위 기독교 전통과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이 깨어지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무너뜨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십니다. 그분의 교회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장차 다가 올 미래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대비책으로 만들어 놓을 만한 안전보장 장치란 없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나 기독교 전통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이 아이와 교회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허락하시고, 무엇을 취해 가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막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온전히 맡기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님이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어떤 우상이나 다른 무언가를 그분 옆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주 이상적인 것, 아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늘 이 세례식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히 이 아이의 하나님이시고자 한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신 긍휼임을 이 아이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늘 이 아이가 아직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며 선포합니다. 교회는 이 아이가 그 말을 이해하든 그렇지 않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이 말씀은 교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창조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결코 몽롱하게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있어야 할 존재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허망한 꿈과 소원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낮을 사랑하고, 낮의 일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헛된 환상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헛된 환상은 세상을 우상화하게 만들고,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고정시켜야 할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자신의 소원과 선입견이라는 색채를 통해서 보게 만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열려 있고, 미래를 위해 준비하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두려움 없이 미래를 직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밝은 낮을 있는 그대로 보고, 하나님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역사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피조물이 고통, 타인의 곤경과 무력함을 보며, 그가 요청하지 않아도 그의 필요를 조용히 채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원한 책임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이처럼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타인에게 악을 행하면서 자기 유익을 위해 교활하고 음흉하게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으로 부르셔야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서늘한 흙 위에 누워 잠들어 있던 아담을 하나님이 만지셔서 생명으로 불러내신 것과 같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말은 ‘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온전히 표현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대략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라.” 즉 가면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교에 능숙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가면 뒤의 모습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의 가면이나 절대적으로 만족하는 듯한 사람의 가면도, 도덕주의자의 가면이나 부도덕한 사람의 가면도, 경건한 사람의 가면이나 냉소주의자의 가면도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이지 그 어떤 가면도 쓰지 마십시오! 가면을 쓰지 말고 사십시오! 여러분, 산 자가 되십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신 뜻대로 그분 앞에서 사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살라’는 말은 명령일 수 없습니다. 살라는 말은 하나님 창조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이 말은 너는 이미 살아 있으며, 나를 통해서만 오직 내 앞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죽은 자들에 속하지 않는다. 너는 영원에 속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늘한 흙 위에 누워 잠들어 있던 아담을 한낮의 영광으로 깨어나게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 눈앞에 잠들어 있고 죽어 있는 이 어두운 땅에서 일어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이 땅 위에 단단히 뿌리박고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곤궁과 소망을 밝히 보여 주는 빛을 통해 세상을 조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아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곤궁과 비참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모든 곤궁 너머에 있는 마지막 소망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소망은 유일하신 세상의 주님께서 오셔서 그분의 사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삶으로의 부르심이 세례식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아이의 미래는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미래의 비밀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아이와 함께 걸어가시며 아이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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