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체험한 이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즉 의롭게 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특별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간과해버리기 쉬운 말씀입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하여 전하는 첫 설교에서 이 본문을 택한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 앞에 당면한 주요 안건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오직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는 식상한 말씀을 반복해서 말할 이유가 있을까?” 여러분, 정말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오늘 본문 말씀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깊이 고무시켰던 고귀한 생각에서 끝없이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적인 목표는, 사도 바울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던 은혜의 복음을 우리 역시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 하나님의 열심과 선하심이 계시되어 있는 칭의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하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칭의로 인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헛된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상반된 길,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길은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하나는 “행위”라고 일컬어지고, 다른 하나는 “은혜”라고 일컬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길입니다. 이 두 가지 길은 마치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기적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행위”라고 칭하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길”이라고 칭하는 첫 번째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안한’ 마음입니다. 불안한 마음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불안한 마음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고양시키는 모든 정신의 뿌리가 됩니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가장 깊은 의미이자 피를 끓게 하는 힘입니다. 인내심을 잃고 신경을 곤두서게 할 뿐인 소멸하는 인간적인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찾아가는 불안한 마음이 바로 종교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공포나 두려움, 동경이나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불안하게 하며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찾아가게 만드는 무언가를 그 영혼에 품고 있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허무한 자기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영혼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무한한 것에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해야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영혼은, 자기 안에 영원한 것을 받아들이며 영원한 것에 대한 권세를 얻음으로써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영혼은 영원으로 가는 길에 오르기 원하며, 영원을 자기 손에 움켜쥐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불안에서 놀라운 철학이나 예술 작품이 싹트고 자라게 됩니다. 플라톤과 헤겔의 변증론, 메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베토벤의 현악 4중주나 교향곡, 고딕 양식의 성당, 렘브란트의 그림들, 괴테의 [파우스트]와 ‘프로메테우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모두 영원히 불멸하는 것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림을 그리고 건축물을 만들며, 조각을 하고 문학 작품을 쓰는 가운데 마음에 일어나는 초조함과 불안을 해소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영원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인류의 선봉에 서서 인간 윤리를 가르친 사람들, 플라톤이나 칸트와 같은 인물들, 아주 엄격한 규율대로 살고자 한 바리새인들은 자기 마음의 요구를 매우 충실히 따랐을 것입니다. 도덕규범에 따라 살고자 애쓰면서 영원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또한 영원으로 가는 길을 찾는 가운데, 스스로 영원에 속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종교는 이러한 마음의 불안과 초조함에서 나온 가장 웅장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불안하게 하는 영원한 수수께끼를 알아내려고 영혼 스스로 영원에 이르기까지 은밀한 영적 교류를 지속할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불안에서 기인한 종교를 통해 인간 정신의 가장 섬세한 꽃이 피어나고, 영원한 것에 복종하는 종교에서 영원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인간은 어두움, 불안, 수수께끼와 같은 곤경, 시간의 덧없음에서 빛, 기쁨, 영원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그들 영혼의 꽃을 바라보며 자부심을 느껴도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은혜는 은혜라는 한 가지 사실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환상과 문명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 혼란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오래전 바벨탑 신화를 우리 눈앞에 재현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영원으로 가는 우리의 길은 여전히 막혀 있고, 우리가 철학과 예술, 도덕적인 삶과 종교를 통해 벗어났다고 여겼던 그 깊은 심연 속으로 다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또 다른 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에게로 향하는 하나님의 길, 계시와 은혜의 길, 그리스도의 길,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길입니다(사55:8).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