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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Dec 30. 2017

필요한 날이었다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15

이리저리 일처리를 하기 위해 다니다 보니 딸아이 밥 먹을 시간을 훌쩍 넘겼다. 길 한가운데 아이는 끝내 울음이 터졌다. 날도 쌀쌀하고 거리에서 마땅히 이유식을 줄 만한 곳도 없다. 눈이 보이는 아무 BAR에 들어갔다.(이탈리아는 커피를 파는 카페를 BAR(바르)라고 한다.) 


두 명의 젊은 바리스타, 서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넷, 세 개가 놓인 테이블 중 하나에 고운 옷차림의 할머니가 앉아있다. 급하게 카푸치노를 시키고 할머니 옆 테이블에 앉아 이유식 보온통을 꺼냈다. 보자마자 자기 밥이라고 아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배추랑 생선을 넣어 푹 끓인 죽이다. 아기새처럼 짹짹, 입에 밥이 들어가자 이제는 환호성이다. 할머니가 그 모습에 한마디 한다.


그래, 그래, 네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다 불러.
그럼, 그럼, 네가 하는 말은 다 옳아.


생선 냄새와 아이의 소리까지 혹여 방해가 될까 노심초사하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바리스타가 카푸치노를 가져와 내 자리에 놓는다. 꿀꺽꿀꺽 잘도 받아먹는 아이를 보고 어쩜 이렇게 잘 먹나 칭찬을 하더니 묻는다.

-이유식은 언제부터 하는 거예요?

-분유랑 수유할 때랑 다른데…..


어느 평범한 로마의 오후, 처음 들어선 바에서 난데없는 이유식 설명을 하고 있다.


-뭐뭐 넣어서 만든 거예요? 쌀을 넣었어요? 몇 개월이에요? 이름은?


순식간에 이 공간의 모든 관심이 아이에게 쏠린다.


-이름은 이도예요. 네,  알아요, 이탈리아에서 이도는 보통 남자 이름이죠. 우리가 성별을 알기 전에 이름을 먼저 정했거든요. 우리나라 글자를 만든 왕의 이름이에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복한 아이라는 뜻이죠.

-한국에서 왔으면…. 남한? 북한?


한국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대화의 흐름은 항상 이러하다. 아이는 계속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이 공간에서 가장 시끄러운 이들은 저 바리스타 둘이다. 할머니가 바리스타에게 앉아서 말한다.


-나 다리 안 좋은 거 알지? 돈 받아가~ 그리고 꼬르네토 하나 포장해 줘. 아! 그런데 내가 돈을 안 가져왔네?

-괜찮아요. 다음에 주세요. 걱정 마세요. 제가 기억하고 있을게요. 여기 꼬르네토에요.


그녀는 포장한 꼬르네토를 받아 들고 힘겹게 일어나 문을 나선다.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노신사가 문을 잡아준다. 이유식을 다 먹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나도 뒤따른다. 그는 우릴 보더니 계속 문을 잡고 서 있다. 고개를 끄덕 감사를 표하자 무심한 듯 살짝 미소 짓는다. 체크무늬 슈트, 겨드랑이에 꽂은 신문, 한 손에 에스프레소 잔, 살짝 들어오는 햇살과 매너, 완벽하다. 이탈리아 남자다. 막 문을 나서는데 커피를 뽑느라 분주하던 바리스타가 급히 고개를 들고 외친다.


-차오 이도!!! 안녕~ 또 와~


문이 닫히는 너머로 그가 앞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말한다.


-쟤 이름이 이도래, 왕 이름인데….


바람은 쌀쌀하지만, 햇살은 따뜻하다. 배불리 먹어 기분이 좋아진 이도가 날 보며 웃는다.


이도, 그거 알아?
엄마는 이래서 이탈리아가 너무 좋아.
너도 그래?




육아보조금을 신청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깜깜무소식이다. 이탈리아다. 답답한 사람이 직접 나서야만 해결되는 나라다. 아침부터 INPS(국민연금관리공단)로 향했다. 이탈리아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는 여기서 모두  보낼 각오를 하고 아이 이유식에 분유까지 챙기고 읽을 책도 하나 넣었다. 도착하니 역시나 나름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번호표를 보니 내 앞의 대기인원이 20명이 넘는다. 긴 하루 예상된다.


자리 잡고 앉으니 내 옆에 엄마는 아예 느긋하게 수유 중이다. 다행히 이도는 잠들었고 책을 꺼내어 드는데 한 여성이 우리 앞에 다가오더니 뒤 편에 업무를 보는 직원들에게 말한다.


-지금 하는 분들 일 마무리되면 다음에는 이 두 분 먼저 봐주세요! 수유 마치면 이 분 다음에 바로 들어가세요.


대기하고 있던 이들 그 누구도 별 반응이 없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자연스럽다. 바로 내 차례다.


육아보조금이 입금될 계좌가 내 명의가 맞는지 인증하는 서류가 누락되었단다. 바로 연락해줬으면 쉽게 해결될 것을 이걸로 6개월을 끌 일인가? 내가 직접 안 왔으면 어쩌려고 한 거야? 정말 일처리 참 이탈리아 스럽네.


그래도 명색이 연금관리공단인데. 뭐 큰 문제라도 있나? 맘 졸이며 속절없이 기다리던 6개월이 머쓱할 정도로 5분 만에 싸인 하나 하고 해결이다. 일이 안 돼도 이해가 안 가고 돼도 이해가 안 가는 나라다. 어쨌건 긴 하루 예상했는데 홀가분한 하루 선물 받았다.


보름 뒤, 반년만에 육아보조금이 입금됐다. 신청한 달부터 계산된다더니 돈이 들어와 주기만 하면 감사하겠다 했는데 이도가 태어난 달부터 계산해서 9개월치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목돈이 생기니 횡재한 기분이다. 차라리 앞으로도 이렇게 한꺼번에 몰아서 입금해주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6개월의 질척거림은 횡재수한 기쁨을 주기 위한 이탈리아의 큰 그림었다 생각될 지경이다.


 말도  되는 이유로 애간장을 녹이다  말도  되는 이유로 사람을 녹여버리는 나라다. 기약 없는 기다림의 빡침 시간들을 한순간에 잊고 당연히 받아야  우리 몫을 이렇게 감사하고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는  나라의 놀라운 능력은 매번 감탄을 자아낸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생활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삶의 형태는 결국 비슷해진다. 나의 삶이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힘듦은 감수하고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찰나의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행복은 아주 많은 불편한 상황과 감정들 사이에 아주 찰나의 순간 나에게 다가왔다.


매 순간 만족스럽고 외롭지 않은 삶이 어디에 있으랴. 이탈리아가 뭐라고 발만 내딛는 다고 행복이 샘솟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이기에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행복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로마의 삶은 딱 이 느낌이다. ‘로마는 정착하고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멋진 삶이다 싶죠? 음, 확실히 멋진 삶이었다. 막상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려니 온갖 현실적인 문제들이 말 그대로 꼬리를 물며 –흡사 롤플레잉 게임처럼- 닥쳐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것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운 시간 역시 당시의 나날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중에서]   


맞다, 그것들 모두를 메우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운 시간들이 우리의 나날들에 있었다.

세 번의 낮과 밤이 지나면 로마에서 맞이하는 열두 번째 해가 시작된다.   

지난 시간 모두가 필요한 날들이었다.


        

때로는 일상은 살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일상이 다시 살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살아내야 하는 오늘을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소중한 날로 이어지는 다리는 필시 평범한 날이라는 돌로 이뤄져 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돌 하나를 쌓은 밤이다.  
필요한 날이었다.    

최민석 [베를린 일기] 믿음사, 2016


written by iandos


*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 매주 수요일 혹은 목요일 원고발행 되나, 이번주는 남편의 부재와 첫째의 크리스마스 방학, 둘째의 콧물 콤보에 주 1회 글쓰기 다짐을 지킨 것에 의의를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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