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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Jan 10. 2018

처음 만나는 세계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16

이안이가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의 휴가 동안 아이는 백일을 맞이했다. 휴가 중 하루는 시댁 어른 들 모두 모여 김장을 하는 날이라 무주로 향했다. 덕유산에 눈 꽃이 한창이라 다녀오라는 어른들 말씀에 우린 이른시간 덕유산으로 향했다.


로마에선 좀처럼 눈을 보기가 힘들다. 2012년 로마에 폭설이 내렸다. 36년 만이었다. 제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로마는 단, 하루 내린 눈에 마비가 됐다. 로마 사람들은 죄다 거리로 나왔던 거 같다. 이런 로마에서 왔으니 덕유산 정상에서 만난 눈에 우린 너무나 신이 났다.  


그저 신이 난 우리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했다. _쯧쯧 애가 뭔 죄야 이 추운데 저 어린애를.....생후 100일 전에는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건가? 누가 뭐라 해도 좋았던 우리는 어묵 한 그릇씩 뚝딱 비우고 산을 내려왔다. 

2012년 2월의 로마 (사진출처 : instagram @eurobike_italia)
2013년 11월의 우리

돌아오자 김장은 마무리 중이었다 고모님이 _아니 다 끝내고 오면 어떡해~~ 하며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셨고 어머니는 _좋았지? 하시고는 김치를 찢어 입에 넣어 주셨다. 우린 솥에 삶은 수육에 갓 담근 김치를 올려 먹었다.


이건 이안이와 우리의 첫눈의 기억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기억이고 이안이의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으니 이안이의 생애 첫눈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는 요즘 뽀로로에 빠졌다. 뽀로로를 보면서부터 부쩍 눈 이야기를 한다. 눈은 보송보송하고 푹신하며 부드럽고 먹을 수도 있다. 잠들기 전 아이는 착한 티라노와 눈사람을 만드는 꿈을 꾸고 싶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끼고 두 주간은 이탈리아의 연휴 겸 겨울방학이다. 할아버지 산장에서 연휴를 보내는 친구네의 초대를 받았다. 이안의 단짝인 아들이 스키강습을 받을 계획인데 이안이도 함께하자고 덧붙였다. 연휴라 주차장도 풀이고 장비를 빌리는 줄도 기니 일찍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가 누군가? 가이드 가족 아닌가!! 일찍 출발은 걱정 마시라.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히 준비를 했다. 눈을 보러 간다니 금세 일어나는 아이. 너도 영락없는 가이드 아들이구나!


차를 타고 어둠을 달리니 이안이가 말한다. _우와 날고 있는 거 같아
터널을 지나는 동안 아이가 큰일이 났다는 듯 외친다. _마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거 같아. 아!!! 맞다 당근을 가져오는 걸 깜박했어!(눈을 뽀로로로 배운 아들은 눈사람을 만들려면 당근이 있어야만 한다!!)
숲 속을 지나는 동안 아이는 잠이 들었다

겨우 로마에서 한 시간을 달려왔는데 눈의 왕국이 나타났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인적 하나 없는 새하얀 세상이다. 사람들은 알까? 유적과 성당을 벗어나면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친구들과 약속시간은 9시 반인데 도착하니 8시다. 눈길에 지례 겁을 먹고 너무 서둘렀다. 아니, 10년이 넘게 로마에 살면서 처음 오는 스키장에 우리가 들떠서 그랬나 보다. 소풍 전날 아이들처럼 설레어 그랬나 보다. 눈을 처음 만난 아이보다 15년 만에 스키장에 온 남편의 눈이 더 반짝인다. 꽁꽁 얼어붙은 주차장, 사람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옷을 갈아입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주차장
불과 몇 분 후 가득찬 주차장
태어나 처음 눈을 본 아이
태어나 처음 눈을 밟아 본 아이

친구가 미리 예약해준 스키를 빌렸다. 흐리던 하늘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개인 교습을 받기로 했다. 이안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능숙하게 스키를 타는 모습이 놀랍다. (한국에서 스키장을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 적어도 한국의 티브이에서의 본 스키장 풍경은 젊은 이들의 장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난 스키장은 그야말로 모든 세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특히나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스키수업 모습은 무척 유쾌했다. 날이 더 좋아진다. 장갑 없이 스키를 타도 무리가 없는 날씨다. 한쪽엔 태양을 향해 앉은 무리가 형성됐다. 여름의 해변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소싯적 스키장에서 살았다는 남편이지만 자연설에서의 스키를 처음이란다. 30대 초의 스키를 마지막으로 40대 중반에 다시 오르는 스키에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서 그는 진작에 리프트에 올랐다. 다음번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와서 오전에 스키 타고 데리러 가면 되겠다고 신이 나서 말이다.

아이의 스키 강습 시간이다 금발의 너무나 아름다운 선생님이 오셨다. 약속시간보다 늦어 한마디 하려 했는데 뭐라 할 틈도 없이 함박웃음의 아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말한다.
 -Sei la mia amica speciale. (당신은 저의 특별한 친구예요.)
 

세상에!! 유치원에서 한 명, 오늘 함께 스키장에 온 친구 이렇게 딱 두 명에게만 친구라고 불러주는 아이가 언제 봤다고 친구란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아이를 보더니 친구가 _이탈리아에선 테니스랑 스키 선생님은 다 미인이야. 한다. 뭔가 되게 이탈리아스럽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바로 리프트에 올랐다!!! 오늘 태어나 처음 눈을 밟아본 아이를 바로 리프트에 태어도 되는 건가?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처음 수영을 배울 때 첫 달은 발 차기만 했었는데 이탈리아는 첫 수업부터 바로 다이빙을 시킨다. 그렇게 물속에서 아이는 스스로 물에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발차기를 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스키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40분 정도 지나 아이가 선생과 함께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날 보자마자 너무나 즐거웠다고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이안이 보다 한 두 살 정도만 많이 보이는 아이들이 폴도 없이 능숙하게 스키를 타고 내려온다.


친구가 말했다.
-난 10살이 넘어서 스키를 배웠어. 수영도 그렇고 그래서 아주 어릴 때 배운 친구들보다 즐기질 못했어. 난 우린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즐기면 좋겠어.


여름엔 바다에 뛰어든다.
겨울엔 눈산에서 미끄러져 내려온다.
자연과 계절이 주는 선물을 온전히 누리는 삶.
풍요로운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추운 것도 추운 곳에서의 스포츠도 질색하는 나이지만 행복해 보이는 아빠와 아들을 보니 다음엔 나도 스키를 배워보고 싶어 졌다. 이토록 따사로운 겨울날, 심지어 이탈리아에서의 스키 아닌가!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스키수업이 다 무슨 소용이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저 눈 산에서 온몸으로 굴러 내려오는 것이다.


우린 산길에 있는 식당에서 소박한 파스타와 양꼬치 살시체로 배를 채웠다. 뜨끈한 어묵 국물이 생각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버섯이 올려진 파스타를 싹싹 긁어먹고 나니 소박한 파스타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여기에 와인 한잔 곁들이니 몸이 나른해져 왔다.


페데리코 펠레니의 영화, 길이 촬영되었다는 거리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안이가 할아버지 집엔 언제 가냐고 물었다. 아이는 이 산을 친구네 할아버지 집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 산장의 작은 정원에서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산속 벽난로가 있는 할아버지 집.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추억이 매 계절 아이에게 쌓인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아쉬워하는 아이에게 매번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우면 어찌 또 놀러 오겠냐? 하니, 의젓하게 _다음에 또 눈사람 만들자. 하고 인사한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 다음에는 꼭 당근을 가지고 오자고 그땐 목도리도 있어야 한단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터널을 지나는 동안 잠들었다.

겨우 오후 5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 끝없는 눈밭이 펼쳐진 길 한가운데를 달리며 우린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이럴까 했다. 자동차의 빛을 제외하면 어둠뿐이다.


한국에도 이렇게 눈밭만 펼쳐지는 길이 있을까? 하니 아마 없을걸 하고 대답한다. 누가 알겠어? 로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지, 우리 참 감사하다. 다시 한번 되뇐다. 낮 동안 투명하던 하늘은 밤이 되니 다시 먹구름이 가득하다.


불투명한 밤하늘, 온통 눈으로 덮인 풍경들은 분명 눈 앞에 펼쳐져있는데도 아득해 보였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개를 넘는데 그가 성호를 긋는다. 나도 기도를 한다. 갈수록 일상은 소중해지고 우린 더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은 아마 같거나 비슷하리라.


written by iandos


*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 매주 수요일 혹은 목요일 원고 발행됩니다.


p.s. 스키장 정보


더 많은 정보는 -> https://blog.naver.com/akindozu/22118238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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