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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Feb 01. 2018

다 복이다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18

엉덩이와 뒤통수에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주위로 사람들도 몰려왔다. 이안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수영장 샤워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발가락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기절한 거 같으냐 물었다. 난 대답 대신 아이가 괜찮은지 물었다.


아이는 걱정마라 기절했었냐? 다시 물었다. 그제야 실감이 나며 겁이 났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떨려왔다. 너무 아프다는 나의 말에 곧 응급차가 올 거라고 걱정 말라며 뒤통수에 얼음팩을 대줬다.


깜짝 놀랄 만큼의 통증과 함께 비정상적으로 부어오른 머리가 만져졌다. '머리가 부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정상일진대 순간적으로 뒤통수가 함몰된 것 아닐까 공포가 엄습했다. 기절할 듯 찌르는 엉덩이 통증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불과 몇 초전까지 완벽한 하루였다. 심지어 저녁엔 초복이라 회사의 삼계탕 회식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차가 도착하고 목보호대를 하고 전신이 고정되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병원으로 향하는데 로마 돌바닥으로 인한 덜컹거림과 함께 통증이 밀려왔다. 그 와 함께 수만 가지 생각도 밀려왔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매일 40도가 넘어갔다. 그날도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엄마 셋이 오늘은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말자 하고 아침부터 준비해 수영장으로 향했다. 각자 간단한 점심 과일도 준비했고 물총까지 완비된 아이들은 신이 났다.
 

버드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알록달록 아이들의 수영복 오후를 가득 채우는 웃음소리, 늦은 오후까지 쉼 없이 노는 아이들 더없이 행복한 여름날의 풍경이었다. 아빠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완벽한 솔루션이었다. 심지어 저녁엔 회사 회식으로 삼계탕도 기다리고 있으니 저녁 준비조차 필요 없었다.


수영을 마무리하고 샤워를 하려는데 물이 너무 찼다. 분명 아이가 물을 맞으면 질색을 하고 도망갈 것 같아 아이를 안고 빨리 물만 뿌리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17킬로에 육박하는 네 살 아들을 어쩌자고 안았는지......


물이 몸에 닿자 차가움에 놀란 아이가 순간적으로 나를 뿌리치며 두발로 밀쳐냈다. 이러다 아이를 돌바닥에 떨어뜨리겠단 생각에 아이를 힘껏 안았다.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날랐다. 엉덩이를 찍으며 땅에 닿으며 아이를 내려놓는데 그와 동시에 무게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몸이 젖혀지며 벽과 바닥에 뒤통수를 내리꽂았다.
 

찰나의 순간 엄마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교통사고의 순간 마지막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내가 보였다.
짧은 순간 간절히 바랬다.
절대로 아이에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제발. 제발.

병원은 추웠고 젖은 수영복 때문에 더욱 한기가 몰려왔다. 느려 터진 이탈리아, 이번만은 달랐다.
 

사고가 나고 10분 만에 도착한 응급차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날 데려갔고, 신분증 확인의 절차조차 없었고 전신 엑스레이 촬영까지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가장 심하게 다친 엉덩이와 허리 쪽 스캔을 하더니 목 촬영을 하기 위해 일어서라고 했다. 난 못 움직인다 했더니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고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무뚝뚝한 목소리가 큰 이상이 없다,라고 말하는 듯해 안심이 되었다. 촬영이 마무리되자 꼬리뼈 함몰 진단이 내려졌고 뒤통수는 찢어졌으나 꿰맬 것 까진 아니라며 한 달을 조심하라고 했다.
 
아직도 물기가 남은 비키니 위에 급히 챙겨준 친구의 원피스를 입고 응급실을 나서자 소식을 듣고 만사 제쳐두고 온 언니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함께 수영장에 갔던  가족들이 한 명씩 맡아서 데리고 갔다.


아직 수유를 해야 하는 둘째가 맡겨진 마르코네에 도착했다. 잘 있던 아이가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당시 생 후 7개월 이도가 가장 긴 시간 엄마와 떨어져 있던 하루였다. 이안이는 크리스티안 집에 있었다.
 

크리스티안 집에서 보내 온 사진

오늘은 집에서 재우고 내일 오후에 데려가겠다며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보내온 사진 속의 아이는 즐겁게 놀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엄마가 넘어지는 모습을 본 아이가 너무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머리를 다쳐 걱정이 된다며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며 마르코네 언니와 형부는 흔쾌히 부부의 침실을 내어주었다. 놓친 초복 삼계탕은 귀한 능이 버섯까지 넣어 끓여주어 배불리 먹었다.


남편에게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울며 오늘 하루의 하소연을 쏟아내고 싶지만 참았다. 3박 4일 투어로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까지 내려가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해봤자 손님들 두고 로마로 올라 올 수도 없는 노릇에 투어 내내 마음 써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고 나면 통증이 더 심해질 거라던 우려와 달리 하루가 지나자 거동이 가능해졌다. 다음 날 오후에 만난 이안이가 혹여 의기소침해져 있을까 걱정했지만 아이는 크리스티안 집에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말해주기 바빴다.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삼일을 회사 동료들이 집에 와 주어 이안이 유치원 등하교와 거동을 도와주었다. 사건 후 나흘이 지나 남편이 돌아왔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오열하는 아내를 안아주었다.

타국에서 온전히 남편과 나 둘이서 두 아이를 키운다. 두 번의 출산 후 산후조리도 남편이 해줬다. 남편이 일로 집에 없어도 운전도 못하면서 두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도 돌아다닌다. 주변에서 씩씩한 엄마로 통하지만, 시간을 돌아보니 우리의 이탈리아의 삶이 결코 둘이서만으로는 나아가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매 순간 우리 곁에 사람들이 있었다.


이태리 말이 엉망진창인 내가 임신을 하고, 병원 검진 날이 다가올 때마다 막막하고 두려웠다. 첫째를 낳기 전까지 모든 검진에 통역을 위해 친구가 함께했다. 아이를 낳고 매일 미역국을 끓여주고 찬거리를 냉장고에 채워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집 계약 문제로 밤을 지새우던 날 사방팔방으로 해결을 위해 뛰어주고 아이의 학교 문제에 나보다 더 분노하고 아픈 날 위해 아이들을 맡아주고 뛰어와주었다. 해외에서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순간만큼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느끼며 살 수 있음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겨울의 어느 날,
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남편과 점심을 먹으로 집을 나섰다. 둘째는 잠이 들었고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기다리다 남편에게 말했다.


 _요즘엔 그런 생각 많이 하는데, 난 우리 이탈리아 삶에 사람들을 만난 게 제일 복인 거 같아. 음.... 둘이서만 여기서 산다면 어떻게든 살아나가겠지.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산다는 건…. 우리가 인연을 맺은 가족들을 알지 못했다면 너무 힘들었을 거 같아. 당신과 나, 둘 모두 외국인으로 이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나 누릴 수 있는 삶은 너무 한정적이잖아.
 _결국은 제일 복은 네 친구인 거 아냐? 그 친구가 이탈리아 사람이랑 결혼한 덕분에 지금의 모든 인연이 생긴 거잖아.
 _그렇게 되나? 모두가 복이야.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다는 게 얼마나 고마워. 해외에서 이런 인연들 쉽지 않잖아. 당신은? 당신은 뭐가 제일 복인 거 같아?
 _응. 난 당. 신.
 _아.... 대답 정말 기계적이네ㅋㅋㅋ영혼 1도 없어 ㅋㅋㅋㅋㅋ
 _정말 솔직하게 말해줘?
 _응.
 _난 하나님이 복인 거 같아.


너무나 뜬금없는 대답이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신양심이 결코 깊다 할 수 없는 남편의 예상치 못한 대답. 그 대답을 듣는데 마치 모든 것이 복이고 감사할 일들 뿐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여름날은 지나갔고 영원할 것만 같던 엉덩이 통증은 이젠 아득한 일처럼 잊혔다. 지난날 끝나지 않을까 두렵던 삶의 통증들은 모두가 그렇게 흘러갔다. 물론 고마운 기억들 조차도 함께 바래졌다. 좋았다해도 좋지 않았다해도 기억들은 흐려진다.

 
붉은 노을이 지는 어느 늦은 오후, 아이를 안고 창밖을 바라본다. 저 멀리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면 흐려진 통증들이 모두 고마운 기억으로 탈바꿈한다. 이탈리아 어디에서든 해 질 녘이면 들려오는 이 평범한 종소리가 마법의 종소리가 된다.


그러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럼 그럼 다 복이지,
다 복인 거지.

복이 아닌 게 없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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