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19
_웃기지도 않네.
_뭐?
_웃기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다고!
_봐봐. 멋지잖아. 엄마는 재밌는데......
_ 난 더 보고 있지 못하겠어. 참을 수 없어!
_이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더 보면 재밌을 거야.
_재미있지 않다고! 엄마, 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고!
야심 차게 준비한 서커스 공연이었다. 아이는 종종 서커스를 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로마에는 몇 개의 서커스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어릴 적 연휴 아침이면 언제나 외국의 서커스 공연이 티브이를 통해 방영됐다. 어린 마음에 가슴을 졸이며 보던 기억이 난다. 어느 순간부터 티브이를 통해 서커스를 보기 힘들어졌지만 이탈리아는 아직도 연말과 연초에는 서커스 공연이 성황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늦은 밤, 가족 다 같이 서커스를 보러 갔다. 붉고 노란 조명과 함께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엄마에게 기대어 졸던 것과 공연 도중 아빠가 화가 나서 중간에 집으로 돌아갔던 것.
그때 왜 아빠가 화가 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우리를 서커스에 데리고 갔던 부모님의 마음은 알 것 같다. 우리에게 무척 보여주고 싶었을 거다. 이안이 처럼 오빠와 나 중에 누군가 서커스를 보고 싶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난 졸고 오빤 재미없다고 했던 걸까? 모처럼 아이들을 위한 외출이 생각처럼 되질 않아 아빤 속상했던 걸까?
서커스가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혹평만을 쏟아 내던 아이가 마지막 경고를 했다.
_난 더 이상 있을 수 없겠어. 나가고 싶어.
_조금만 더 참아. 아직 남았잖아.
_아니, 난 더 이상 있을 수 없겠어.
중간 쉬는 타임이 되고 불이 켜졌다. 난 결국 vip 좌석을 뒤로하고 아이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오래전 그날의 아빠처럼 말이다. 내 손에 이끌려 쭈뻣쭈뻣 따라오던 아이가 중얼거렸다.
_코끼리가 공 타고 나오지도 않고. 웃긴 아저씨도 없고. 재밌지도 않고.
(웃긴 아저씨는 아마도 피에로인가 보다.)
네 살인 아이는 갈수록 취향이 확고 해진다.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 더 좋지,라고 했지만 매일 아이와 부대끼는 입장에선 그저 좋지만은 않다. 엄마의 아이러니다.
개성 강한 아이로 크길 원하면서도 한편으론 무난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도 무난하게 모든 아이들과 친하면 좋겠고, 내가 무언가를 보여주면 무난하게 즐거워해 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난하게 적응하면 좋겠다. 그러다 너무 무난해 보이면 또 고민하겠지. 없는 걱정도 만들어한다며 혀를 차는 남편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번 달에는 유난히 생일파티가 많다. 지난주엔 비올라의 생일이었다. 이탈리아는 아이들 생일 파티에는 animatore라고 하는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초대된다. 생일 파티는 부모들은 수다타임이 되고 아이들은 땀에 범벅이 될 때까지 춤추고 게임을 한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지만 아이들은 매번 신이 난다.
이안이는 흥이 많지만 생일 파티에서 크게 즐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은 것은 일 년 전부터다. 초반에 아이들과 놀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뛰느라 정신이 없는 순간이 되면 아이는 흥미를 잃곤 했다. 그래도 왔는데 적당히 놀다 가면 될 것을 아이는 그러질 못한다.
아이는 몸으로 놀기보다 무언가를 만들고 이야기가 있는 놀이에 더욱 집중했다. 자신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장소에선 바로 빠져나오길 원한다. 그냥 좀 있으면 안 되나? 하긴 나나 남편이나 그러질 못하는 성격이면서 우리 자식에게 그걸 바라는 것이 말이 되질 않지. 게다가 네 살 아이가 아닌 척, 하는 척, 해주길 바라는 것도 웃기다.
그런데 쉬이 넘겨버리려다가도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넋을 놓고 즐기던 아이들, 생일에서 깔깔 거리며 웃는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혹시 이안이가 이탈리아 식의 즐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아닐까?
여기에 나의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어느 날 이문세의 노래를 듣다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은 이탈리아에서 자라지만 이런 감성도 공감하면 좋겠다. 한글을 알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책도 함께 읽어야지. 여기서 자라도 한국의 감성을 가지고 자라도록 한국문화도 놓치지 않고 접하게 해주어야겠어! 다짐했다.
그 시작은 뽀로로부터 시작된 한국 애니메이션이었다. 한국문화의 힘이란 대단했다. 색감부터 내용까지 더 화려하고 흥미롭다. 다시 말해 여기 아이들이 접하는 것들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라는 거다. 아이는 바로 사랑에 빠졌다. 아이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한국말도 놀라울 정도로 늘어갔다.
난 기뻤다. 그런데 어쩌면 난 그와 동시에 아이 나름대로는 이탈리아 문화와도 사랑에 빠지길 원했나 보다. 한국말이 늘면 당연히 이탈리아 말도 늘길 원했고 집에선 한국식 밖에선 이탈리아식으로 즐기길 원했던 거다.
한 번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물었다.
_이탈리아에서 자라면서 정체성의 혼란 같은 거 느껴본 적 있어?
_다 느끼죠. 중학교 때 가장 심한 거 같아요. 그런데 자신이 확실하게 알아요. 그 이후엔 거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거 같아요.
_이탈리아 사람, 한국 사람, 그런 거야?
_음... 그거랑은 좀 달라요. 이탈리아 취향인가 한국 취향인가의 문제예요.
_그래서 답은 뭐야?
테이블에 함께 앉은 네 명이 같은 대답을 했다.
_한국이요.
취향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음식, 문화, 연애까지. 최근 로마에선 한인 청소년들의 밤이 있었다. 광란의 밤이 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탈리아 친구들을 초대했고 밤새 kpop에 열광하며 춤을 추었단다.
난 아이가 한국의 정서와 취향을 가지고 이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지 궁금하면서도 마음이 쓰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유치원에선 그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을 거다. 유치원 친구들이 터닝 메카드나 뽀로로를 알리가 없지. 분명 유치원에선 그곳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만, 난 때때로 아이의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다.
한국말이 즐겁다는 아이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탈리아 말은 즐겁지 않다는 속내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어미의 마음을 언젠가 아이 커서 내 글을 읽게 된다면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셨구나, 한심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다.
간섭하지 않겠다고 지켜봐 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내 마음처럼 아이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난 자꾸만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속상하다. 아이는 씩씩하게 자신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데 걱정 많은 엄마는 커가는 아일 따라가질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난다.
차가운 바람이 불던 오후, 유치원에서 나온 아이에게 사탕을 하나 쥐어준다. 하트 모양의 사탕이다.
_엄마 마음이야.
_엄마 마음을 먹어도 돼?
_그럼,
_엄마, 이건 따뜻한 마음이야.
_그래? 어떻게 그걸 알아?
_왜냐면, 엄마 마음을 먹으니 따뜻해졌거든.
아이에게 마음을 준다. 아이가 내 마음을 먹는다. 혹여 그 마음을 먹은 아이가 따뜻해지지 않아도 속상해 말자. 마음을 준 내가 따뜻해졌다면 그걸로 된 거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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