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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Jun 04. 2021

타란툴라가 세상에 왜 필요한 거야?

부정적인 감정은 독인 걸까?

“엄마, 타란툴라가 세상에 왜 필요한 거야?”

“무슨 뜻이야?”

“타란툴라는 독으로 사람을 죽이잖아. 세상에 있을 이유가 뭐야?

“타란툴라의 독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독은 타란툴라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거지. 그 독으로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고 다른 동물을 죽게 할 수도 있고 영원히 쓰지 않을 수도 있지.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만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아?”


세상에 필요하니까 태어나는 게 아니야?


“그냥 세상에 있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야. 태어난 것이 세상에 있는 이유의 전부야. 태어났으니까 세상에 있는 거야. 세상에 어떤 필요가 될지는 살면서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거야. 그럼, 이안이 넌 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

“음... 귀여워서? 아니다, 멋있어서?”

“그럼 이안인 세상에 어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난 친구에게 필요한 사람.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계속 친구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난 친구들에게 장난을 많이 치는데 그러면 친구들이 화내서 요즘은 장난 많이 안치고 웃게 해 주려고 노력해. “

“엄마 아빠는 세상에 어떤 필요한 사람일까?”

“나를 태어나게 하기 위한 사람?”

“그럼 이안이는 엄마 아빠에게 어떤 필요한 사람이야?”

“난 엄마 아빠에게 사랑은 담아주는 사람이야.”

“어떻게 담아주는데?”

“엄마랑 아빠가 싸우면 내가 웃게 하고 이도에게 화낼 땐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라고 말해서 사랑을  담아주는 거야. 아, 그런데 킬러가 뭐야?”

“킬러? 킬러는 살인마야. “

“사람을 죽이는 사람? 그런데 정말 세상이 있어?”

“응, 세상에 있어.”

“정말? 그거 지어낸 이야기 아니야?”

“아니야, 진짜 있어. 왜 킬러가 정말 있다니까 걱정돼?”

“응, 난 죽기 싫거든. 내가 예수도 아닌데 죽으면 부활도 못하잖아. 난 사는 게 너무 즐겁거든. 그리고 추억도 많고.”

“그럼, 넌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어디서 살 거야? 이탈리아? 한국?”

“음.... 한국에서 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냥 이탈리아에 살래. 난 우리 집이 너무 좋아. 추억이 진짜 많아서. 만약 우리 집을 한국에 가져갈 수 있으면 한국에서도 살 수 있어.”

“넌 뭐가 그렇게 추억이 많니?”


이안이는 부쩍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다.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의 존재의 이유가 궁금하다. 나의 7살도 이런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나?


나도 요즘 질문이 많다. 부부관계, 인간관계, 일, 돈, 직장, 동료 지난 일 년 동안 코로나를 겪으며 이전엔 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코로나 이전, 남편이 생업에 종사하던 그 시절, 나 역시 작가라는 이름으로 돈을 벌고는 있었지만 사회생활의 최전선에선 살짝 물러나 있었다. 남편 역시 직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온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절하게 보호받았다. 우린 보호의 테두리 밖으로 내몰리면서 삶의 많은 영역을 새롭게 정립해나가야만 했다.


부부로 십 년을 살았지만 1년 이상을 24시간을 온전히 함께한 적이 없었기에 “코로나 시대의 부부”라는 새로운 정의도 필요했다. 지난 1년간의 성장통은 아프고 쓰라렸다. 굳이 겪을 필요 없었을 쓰디쓴 경험들 고민들 걱정들을 안겨준 코로나가 참 원망스러웠는데 다시 생각해면 딱히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곧 마흔, 남편은 쉰을 바라보며 이 지점에서 반드시 치러야 하는 삶의 통과의례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도하기 두려운 마음, 하고 싶지만 내 몫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괴감,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관계, 결국은 내려놓아야 하는 인연, 자신에 대한 실망 또는 재발견을 거듭했다. 코로나가 연출한 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잔인하도록 온전히 나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겹고 괴로운 것이 었던가?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나약하고 겁이 많았다. 한번 사로잡힌 생각에서 쉬이 벗어나지를 못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선 끊임없이 집중할 도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것은  결국 또 다른 생각의 연장이었다.


남편은   정도야? 상황은  이래? 그들은  저러는 거지? 지난 질문들은 물음이 아니라 상황과 타인에 대한 질타였으니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답을 찾아 헤맨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질문은 답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했다. 답을 찾지는 못해도 적어도 제대로  질문을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 웃게 만드는 사람, 사랑을 담아주는 사람을 향해나가는데 난 덜 상처 받고 덜 손해보고 더 사랑받고 싶다고 끊임없이 묻고 기도했다. 올바르지 않은 기도였던 것일까? 좋은 질문은 좋은 방향을 향할 텐데 그릇된 질문으로 자꾸만 좋은 사람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두려웠다.


부부관계에 분노하고 인간관계에 지쳐가고 극으로 몰아치는 상황들에 울분을 터트리며 결국은 나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던 밉고 부끄럽던 밤, 쉬이 잠들지 못하다 아들의 일기 앞에서 마음이 멈췄다.


다들 어떻게 태어났어요?

아프고 -> 놀라고  -> 슬프고 -> 나쁘고 ->
엄청 기쁘고 -> 죽고


아프고 놀라고 슬프고 나쁜 마음은 내가 가진 독이라고 생각했다. 가져선 안 되는 마음. 이 감정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는 것이 옳은 삶이라고 몰아쳤다. 그런데 7살 아들이 이 모두가 생이라고 썼다. 분명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적어 내려 간 일기였겠지. 그러나 나에겐  “아프고 놀라고 슬프고 나쁜 감정은 모두 아주 기쁨을 향한다.”라고 읽혔다. 이 세상에 틀린 감정은 없어. 분명 그렇게 읽었다.


내 안의 마음들이 독이 아니라고 분명 그렇게 들렸다.


조금씩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고 유약한 질문들이 천천히 답을 찾아가고 있다고, 그 끝엔 아주 기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밤이었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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