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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Sep 14. 2017

생의 1/4이 여름방학이다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2

여름은 끝났다.

66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었다. 이탈리아는 국가 재난을 선포했다. 1800년대부터 끝임 없이 흘러나오는 로마 곳곳의 나소니를 멈춰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거리의 온도계는 40도에서 내려갈 줄을 몰랐다. 10년의 로마 생활에 더위는 이제 문젯거리도 아닌데 올 여름은 정말 강력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 밤새 엄청난 비가 내렸다. 이틀 하늘이 뚫린 듯 비를 퍼붓더니 삼일 째 되는 날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구름이 달라졌다.

가을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왔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봄과 가을은 마음이 울렁이다 정신을 차리려니 지나가 버린다. 더워서 여름방학이 있고 추워서 겨울방학이 있다. 방학이면 바닷가 할아버지 집에 갔다. 수영복을 입고 가족 모두 함께 바다에 뛰어든 건 몇 살까지 였나?  


초등학교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기억이 없다. 바닷가 할아버지 집의 추억은 이상하리만큼 물놀이의 기억은 아련해지고 기억이 온전한 시점부터는 바다보다는 회를 즐기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살면서 여름이 두근거릴 만큼 기다려진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살면 살수록 신기하게도 강렬한 태양과 더위가 무색하게 더욱더 간절하게 여름을 기다리게 된다는 거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 금세 다음 여름이 그리워진다.  


그렇다고 여름에 대단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아이들 방학에 남편의 일은 더 바쁜데 어떻게 보면 가장 치열한(?) 시즌임에도 여름이 기다려진다.

그렇다. 이유는 단 하나다.

여름의 바다 때문이다.   


아들의 방학이 끝나고 SNS에 ‘드디어 아들 방학 끝!’이라고 올렸더니 한국의 친구가 '방학 한번 징하게 길다 '라고 글을 남겼다. 생각해보니 진짜 길다. 여름방학이 6월부터 9월까지다. 한해의 1/4 아닌가!!


사실 여름방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웃기다. 그냥 여름 = 방학. 결국 사계절 중의 여름은 방학으로만 존재하는 하는 것이다. 여름의 존재가치는 방학인 것이다. (겨울방학은 따로 없다. 일주일간의 크리스마스 방학이 있다.) 즉, 성인이 되기 전 이탈리아 아이들의 생의 1/4 은 여름방학이 차지한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방학은 3개월이나 부모의 휴가가 3개월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조부모의 집으로 향한다. 부모의 휴가기간에는 매년 어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짧은 시간도 아니다 보니 대다수 매년 향하는 곳이 같다.


처음 이탈리아에선 매년 같은 장소에 휴가를 가는 이들이 좀 의아했지만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던 우리 부부도 아이들이 생기니 동일한 장소를 선호하게 된다. 이제 겨우 4년의 생을 산 아들 조차 여름이면 당연히 자신이 기억하는 바다와 호수로 향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탈리아 아이들은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여름 휴가지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만들어진다.   


방학이 길다고 애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던가 선행학습을 시켜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부모들에게 없다. 여름은 그냥 방학이다. 유럽의 미술관 순례나 인문학 소양을 쌓아줘야 한다는 욕심도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 예술, 역사 그리고 유적이 곧 유럽의 역사인 것을. 학교 공부로 충분하다. 여름은 그저 바다다.


눈뜨면 바다에 가고 바다에서 놀고 해변에 자고 해변에서 먹고 바다에서 자고 쉬고 다음 날 눈뜨면 또 바다에 간다. 이른 아침 바다에 도착하면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비치타월을 깔고 태양 아래 눕는다.


태어나서부터 매년 왔던 바다다. 누구보다 이 바다를 즐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다. 태양이 뜨겁다고 아이들에게 유난스러운 부모도 없다. 그들 역시 평생 온 이 바다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태양이 더 뜨거워지면 아이들은 바다에 뛰어든다. 모래성을 쌓는다. 집에서 싸온 피자나 파스타를 먹고 부모들은 낮잠을 즐기거나 썬텐을 한다. 씨에스타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그믈을 손에 들고 어부가 된다. 분명 처음 만난 아이들이다. 그런데 평생 호흡을 맞춰온 듯 함께 물고기를 잡고 게를 잡는다. 아이들의 몸은 더없이 아름다운 구릿빛이다.


성인이 되기 전 모든 생의 여름날을 바다에서 보내며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들이 어디에서 즐거움을 얻는지를 깨달았다. 바다는 아이들에게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최고의 선생님이 된다. 여름 내내 바다에서 놀던 아들은 징그럽게도 끝나지 않던 아토피가 가라앉았다. 기침을 하는 아이, 피부가 좋지 않은 아이를 보면 이탈리아 어른들은 무조건 바다에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한다. 바다는 학교이자 병원이다.   


내가 만난 이탈리아 사람들은 참 솔직하고 다른 이에게 칭찬함에 있어 자연스럽다. 멋진 자동차를 보면 멋지다고 말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칭찬에 거침이 없는 건 자신이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할지라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까? 자동차도 외모도 아니라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무엇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서? 마치, 내가 성인이 되기 전 18번의 여름을 바다에서 보내며 무엇이 나에게 행복을 주는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아서 이젠 타인에게 흔들림이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처럼.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해가진다. 하루 종일 최선을 다해 논 아이들은 차에서 곯아떨어진다. 그러면 남편과 이야기한다. 감사한 하루다. 행복한 여름날이다. 다음 여름에도 또 오자. 내년이면 둘째가 오빠 손을 잡고 해변을 뛰어다니겠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신기하다. 난 정말 샘도 많고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여름 그리고 바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지다니...


더 좋은 바다 더 좋은 장소를 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 여름 우리가 있었던 이 바다에 다음 여름에 다시 온다는 생각만으로 행복해지는 거다.

그래, 그래서 여름이 자꾸만 기다려지는 거다. 여름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었던 거다.  

난 이 사실을 이탈리아에서 살면서야 깨닫게 된 거다.    



2015년 이탈리아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방학숙제를 내준다.


1. 가끔 아침에 혼자 해변을 산책하라.

햇빛이 물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네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라. 행복해져라.


2. 올해 우리가 함께 익혔던 새로운 단어들을 사용해 보라.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게 되면 더 자유로워진다.


3. 최대한 책을 많이 읽어라. 하지만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지는 마라.

여름은 모험과 꿈을 북돋우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날아다니는 제비 같은 기분이 들 거다.  

독서는 최고의 반항이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를 찾아와라)


4. 네게 부정적인, 혹은 공허한 느낌을 들게 하는 것, 상황, 사람들을 피하라.

자극이 되는 상황과 너를 풍요롭게 하고,  

너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찾아라.


5. 슬프거나 겁이 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여름은 영혼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너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일기를 써 봐라. (네가 수락한다면, 개학 후에 함께 읽어보자)


6.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어라.

집 근처의 댄스 플로어에서, 너의 방에서 혼자 추어도 된다.  

여름은 무조건 춤이다. 춤을 출 수 있을 때, 추지 않는 건 어리석다.


7. 최소한 한 번은 해가 뜨는 것을 보아라.

말없이 숨을 쉬어라. 눈을 감고 감사함을 느껴라.


8. 스포츠 활동을 많이 해라.


9. 너를 황홀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에게 최대한 진심으로 정중하게 말해라.

상대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너의 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한다면 2015년의 여름은 황금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 이게 잘 되지 않았다면 8번으로 돌아가라.)


10. 우리 수업에서 필기했던 것을 다시 훑어보라.

우리가 읽고 배웠던 것들을 너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비교해 보라.


11. 햇빛처럼 행복하고 바다처럼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12. 욕하지 마라. ​

늘 매너를 지키고 친절하게 행동하라.


13. 언어 능력을 기르고 꿈꾸는 능력을 늘리기 위해 가슴 아픈 대화가 나오는 영화를 보아라.

(가능하다면 영어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고 영화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너의 여름을 살고 경험하며 다시 한번 너만의 영화를 살아보아라.


14. 빛나는 햇빛 속이나 뜨거운 여름밤에 네 삶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꿈꾸어 보아라.  

여름에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꿈을 좇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다 하라.


15. 친절해라.


매년 여름을 맞이하며 나의 생을 다해 완성해야 할 여름방학숙제처럼 다시 읽어본다.  

처음 이 방학숙제를 보았을 땐, ‘햇빛처럼 행복하고 바다처럼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올해 다시 읽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진 것은 여기였다.  


빛나는 햇빛 속이나 뜨거운 여름밤에 네 삶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꿈꾸어 보아라.  


아직은 아이들이 어려 바다에서도 아이들을 챙겨야 하기에  휴가를 가게 되면 아이들이 아직 깨지 않은 이른 시간 홀로 산책을 한다.  아니면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늦은 시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바닷소리를 들으며 나의 꿈을 그려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이들 덕분에 이 고요한 시간을 맞이 할 수 있음을  

혼자 꿈꾸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음을  


그러다 문득   

왠지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면서 막 벅차오르는 것이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름날이 지나가고 있음이 너무나 아쉬워지는 것이다.


https://youtu.be/X2xWaV07TjE

Youtube@로마가족



written by_iandos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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