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단계 : 실전_끝이 기약 없는 운송 파업
4단계 : 실전_끝이 기약 없는 운송 파업
"비지니스는 결과가 전부다. 과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며 노력한들 성과를 내지 못하면 실패다. 반대로 빈둥빈둥 놀아도 성공하면 승자다. 과정에 노력을 쏟아부어 칭찬받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이고, 그런 과정을 호소하는 것은 단순한 응석에 지나지 않는다."
_호리바 마사오, 2009년 닛케이 비지니스 인터뷰에서 (출처 : LongBrack)
가리비 관자를 썰고 있던 참이었다. 한가운데를 썰어 입으로 넣자 입안에서 풍미가 팡팡 터졌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민주는 눈을 감고 음미했다. 민주는 오늘 마흔 살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재선에게 생일날엔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고 누차 말을 했다. '나는 생일날 그런 걸 원치 않으니 너는 안 해줘도 돼. 그러니까 나도 안 할 거야.'라는 철옹성 같은 논리로 무장 중인 재선이었다. 하지만 재선은 민주의 마흔 생일엔 예외를 두기로 했다. 다음 예외는 민주의 여든 살 생일일까? 여하튼 40년을 살아낸 덕분에 민주는 재선에게 엎드려 절을 받았다. 가리비 관자는 바싹 엎드릴 가치가 충분한 맛이었다. 적어도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가리비 관자를 한 입 더 먹으려 다시 눈을 감던 민주의 전화가 울렸다. 오늘은 민주의 생일이자 2주 전 주문받은 올리브 유 수백 캔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올리브 농장에서 한국으로 출발하기 위해 밀라노 공항으로 향하는 날이기도 했다. 민주는 자신의 마흔과 사업의 성공적인 안착을 축하받고 싶었다. 가리비와 와인, 식당의 조명 온도 습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적어도 전화 내용을 듣기 전까지.
민주는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이탈리아 운송업체였다. 민주는 흡사 미드의 주인공 같았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업에 도전해 CEO로 삶이 탈바꿈된 모습. 와인을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민주은 이미 취해있었다. 자아도취.
“대표님, 아직 올리브 유가 농장에서 출고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물류 파업입니다. 이 파업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파업 종료 후 픽업 스케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정이 나오면 최대한 빠른 스케줄로 항공 부킹을 하겠습니다.”
가리비의 다음 코스는 까르보나라 파스타였다.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한 고급진 식당은 까르보나라 파스타로 유명했다.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잘하는 식당일 것. 재선에게 민주가 당부한 요건이었다. 생일이라는 것을 안 식당에서 주문하지도 않은 디저트를 아름답게 세팅해 선물했다. 진한 쵸코렛 푸딩에 바삭하고 붉은 라즈베리가 아름답게 뿌려져 있었다. 하지만 가리비 반쪽 이후의 맛은 느끼지 못했다. 이탈리아 물류 파업이 기사를 검색하니 도로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멈추어 있는 컨테이너 운송 트럭들이 보였다. 유류비 상승으로 거리에 멈춰 파업 중이었다. 신선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식재료 들은 그대로 썩어 버려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며 민주는 머리는 감쌌다.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울음이 터졌다. 식품 수입 업자로 사업자를 내고 올리브유 수입을 성사시키기까지 9개월이 걸렸다. 이를 위해 셀 수 없는 서류와 허가와 거절과 면허가 필요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지 못했으니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은 짜릿했다.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는 과정마다 전율이 흘렀다. 마치 대단한 사업가가 된 것 같았다. 중반부를 지나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끝이 없어 보였다. 속이 탔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이미 통과해온 과정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포기를 마음먹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라고 결심을 할 때마다 앞서 용을 쓴 것이 무색하게 허무하도록 쉽게 해결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포기하기엔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업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 과정만 넘기면 쉬워진다고 말했다. 구입한 올리브유의 인보이스, 패킹 리스트, 해외 제조업자 등록서류, 제작한 한국어 표시 사항, 사업자등록증, 수입식품판매 면허증, 사업장 허가서와 제조 공정도까지 발송을 마무리하며 모든 벽들을 허물어뜨렸다 생각했다. 그런데 또 울 일이 생겼다. 이번 울음엔 무서움이 담겨있었다. 이전까지는 시작을 위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민주가 얻은 것들은 책임을 지는 일을 시작하기 위한 허가를 받았다는 의미였다. 민주는 돈을 받았고 올리브유를 믿고 구입한 사람들에게 제품을 전달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민주가 그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 세계는 과정이 인정을 받지만 거기까지, 결과로만 책임을 져야 했다. 규모가 작고 큰 것을 떠나 민주가 들어선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실감한 두려움이 담긴 울음이었다.
민주는 사업을 진행시켜나가며 새롭게 자신을 알게 되었다. 스트레스에 극도로 예민했다.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그릇이 너무나 작았다. 이런 작은 멘탈의 용량으로 사업이라는 것을 하려고 했다니 주제 파악 실패다. 재선에게 말했다. “난 이번 건만 해결하면 이제 수입사업은 안 할 거야.”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고 답을 하겠지. 재선의 모토다. 하기 싫은 건 하지 말자.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여기까지 왔는데….”자신이 내뱉은 말과 달리 민주의 마음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참을 이불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민주는 눈물을 닦고, 생각했다. 파업 종료는 기약이 없다.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사람들에게 지연 안내를 하자. 이 상황을 사실대로 전하자.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문하면 쓱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받을 수 있는 한국에서 기약 없는 지연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은 뭘까? 환불? 해 드리자. 그러면 재고는? 팔아 낼 수 있을 거야. 일처리가 미흡하다고 사람들이 비난할까? 부족한 건 사실이잖아. 이 정도밖에 안되는데 돈을 받고 물건을 팔았다고 욕할까? 잠깐, 이건 내 일이 아니야. 메일을 받은 후의 고객들의 피드백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리 그려보지 말자. 우선 지연 메일을 보내고, 그 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다리는 것.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지금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음 결과에 따라 또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민주는 ENFP다. 상상력이 심하게 풍부해 언제나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상상했다. 여러 상상 속에 올드보이의대사가 떠올랐다. '인간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깐 상상을 하지 말아 봐, x나 용감해질 수 있어' 민주의 두려움의 8할은 상상을 기반으로 했다. 민주의 상상은 극적이고 극단적이다. 그 상상이 극적일 땐 무지갯빛처럼 화려하고 생생했다. 이는 과거의 많은 도전과 모험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상이 극단적일 땐 어둡고 축축한 악몽 같았다. 이 악몽은 민주를 갉아먹었다. 민주는 시작에 앞서서는 극적으로 상상했고 막상 시작이 되면 극단적으로 상상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극적인 상상은 구현되었지만 악몽은 대부분 불발되었다. 민주가 사업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믿어야만 했다. 민주의 악몽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민주의 악몽은 매번 실제보다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민주는 상상을 멈췄다. 이내 생각도 멈췄다. 모든 것이 멈추자 비로소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 로마는 새벽 4시였다. 한국은 정오가 되었다.
민주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물류 파업이…..
죄송합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물류 파업이…..
죄송합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물류 파업이…..
죄송합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물류 파업이….
……
메일을 다 보내기 전에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기다림까지 제가 지불한 상품이고
설렘은 선물입니다.
수십 건의 주문 중 취소는 선물을 위해 주문했지만 날짜가 지나버려 환불을 요청한 단, 한 건이었다.
이번에도 악몽은 현실에 발을 내딛지 못하고 불시착했다.
일주일이 지나 이탈리아 물류 파업이 종료되었다. 종료 소식과 함께 물류 운송 지연으로 인해 항공편도 연쇄적으로 지연이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민주는 자신을 예민하게 하는 수많은 일들의 범주를 좁혀가고 있었다. 날이 섰다가 무뎌지는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관대하고 민주는 평균 이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걱정을 가불하지 말자. 섣불리 악몽을 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민주의 안달을 무너뜨렸다.
생계를 위해 사업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와 다음 문들을 하나씩 열어나가며 민주의 모난 부분들이 그녀도 모르는 사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주의 : 이 글에 등장하는 민주네 가족의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지만 가명입니다. 내용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기억에 의해 과장되거나 조작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