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단계 : 사업을 즐기게 되는 구간 _행운의 표지
#7단계 : 사업을 즐기게 되는 구간 _행운의 표지
"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자네가 자아의 신화를 위해 살려고 하기 때문일세. 그런데 지금 자네는 포기하려 하고 있어."
"영감님은 사람들이 그런 순간에 처해 있을 때면 항상 나타나시나요?"
"늘 이런 모습은 아니지만, 안 나타난 적은 없지. 때로는 순간순간의 훌륭한 생각과 좋은 해결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람들이 중대한 순간에 처해 있을 때 그저 그 일들이 조금 수월해지도록 돕기만 한다네. 나는 이 일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하지."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새벽 4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민주의 휴대폰 화면에 찍혀있는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 한국 번호?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기…. 올리브 유…"
"네? 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민주는 곧장 자세를 고쳐 앉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네… 저는 이번에 지인으로부터 올리브 유를 선물 받아서... 먹게 되었는데요…그런데 맛이… 제가 올리브 유는 정말 많이 먹어 봤는데… 이건 제가 먹었던 올리브 유들이랑 너무 달라서… 그래서... 궁금해서 여기 캔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했어요."
올리브 유에 붙여있는 한글표시사항의 사업장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이다. 이 번호로 정말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아, 그러세요. 뭐가 궁금하셔서...?"
"아니 이 올리브 유가 풀향이 강하고 신선한 게 확 느껴져서 어디 올리브 유인지 어떻게 이런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4시 한국에서 걸려온 낯선 이와 민주는 살짝 상기되어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오랜 시간 통화를 이어갔다.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공에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통화를 마치며 민주는 생각했다. 정말 좋다고, 이 일이, 그리고 이 올리브 유가.
의도된 시작이 아니었다. 민주와 재선이 함께 운영하는 가족 유튜브 채널, 로마가족의 라이브 방송 중 자연스럽게 올리브 유 이야기가 나왔다. 이탈리아 관련 이야기 중 8할은 음식 이야기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채팅창의 흐름에 따라 올리브 유 이야기를 하던 중 민주와 재선은 자신들이 구입해서 먹는 올리브 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남쪽 로마에서 쉬지 않고 달려도 7시간이 넘게 걸리는 최남단, 풀리아 주의 오래된 올리브 농장. 아들, 이안이 뛰어다닐 무렵부터 재선이 투어로 인연을 맺게 된 이곳은 매년 여름 민주네 가족이 머물다 가는 여름의 추억이 가득 담긴 곳이기도 했다. 재선이 처음 이 농장의 올리브 유를 집으로 가져와 맛 보여준 날을 민주는 잊지 못한다. 쌉싸름한 풀향, 기름이라고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의 신선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올리브 '유'를 기름으로 분류했지만, 100% 올리브를 착즙 한 올리브 주스라 불러도 무관하지 않은가? 몇 초 뒤 따끔따끔한 느낌과 함께 매캐하고 쌉싸름한 향이 훅 올라와 코끝을 찡그렸다. 파릇한 루꼴라, 구수한 아몬드, 들꽃들과 알 수 없는 허브들이 뒤섞인 듯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입을 맴도는 향과 맛을 음미했다. 만성 역류성 식도염과 편도염을 달고 사는 민주는 이 올리브 유를 삼킬 때 마치 상처에 소독약을 뿌린 듯 찌릿하고 따끔한 느낌이 좋았다. 하나의 의식처럼 매일 잠들기 전에 올리브 유를 삼켰다. 덕분에 민주는 속 편히 잠들었고 평온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이 올리브 유가 역류되는 나쁜 기운을 잠재우고 내적 평화를 선사하리라. 어느새 이 의식은 민주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시작하는 주문이 되었다.
라이브 방송을 참여하던 사람들이 이거 공구 한번 합시다,라고 먼저 제안했다. 여행은 불가능했고, 여행이 가능하다 해도 이 올리브 유를 이 먼 곳까지 와야지만 구입이 가능하니 이탈리아 내에서 구입이 쉽지 않다. 그럼, 한국에 전달할 수는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주는 무작정 농장 주인이 코라도에게 메일을 보냈다.
'한국의 사람들이 이 올리브 유를 궁금해하고 구입을 원한다. 당신들이 한국으로 배송만 해준다면 너무나 멋질 것 같다. ' 코로나 이전에도 종종 재선과 투어를 함께했던 고객들이 이 올리브 유 배송에 대해 물었다. 농장을 방문한다 해도 일정 수량 이상의 구입은 여행객에겐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농장에선 매번 한국으로의 배송을 거절했다. 그랬던 농장에서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일까?
그날 저녁, 답이 도착했다. 한국으로 배송을 하겠다.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도 코로나의 확산이 심각했고 해외는 물론 이탈리아 내에서도 지역별 이동이 불가능했다. 농장에서만 직접 판매를 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올리브 유 판매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주의 제안은 대부, 돈 꼴리오네 급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홀린 듯 자연스럽게 올리브 유 공구가 시작되었다. 날짜를 정해 한번에 주문을 받고 주문서를 종합해 농장에 보내면 농장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방앗간에서 병입을 했다. 마치 시골 마을의 장인 방앗간에서 찐한 참기름을 병에 바로 담아주는 것처럼. 두세 달에 한 번씩 공구를 진행했고 주문량은 매 회 늘었다. 개별 배송이 어려워 자주 주문을 받지 않는 대신 8캔 구성의 한 박스로 판매를 했더니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의 주문자가 되었다.
올리브 유를 판 돈은 민주네 가족이 지난 2년을 버텨내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독자 중 한 분이 이거 어서 한국 독점 판매 계약을 하셔야 합니다. 했다. 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격하게 방향을 튼다.
하루는 민주가 단골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민주의 건너 테이블엔 국제 커플이 앉아 있었는데 아시아인 여성에게 눈길이 갔다. 한국인인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는 민주에게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혹시… 로마가족?… 김 작가님…이… 세요?"
이것 봐, 생은 정말 예측불허라니까.
진경의 남편은 스페인 사람이다. 로마 땅에서 이방인 부부로 지내던 중 스페인 남편이 알고리즘의 인도로 로마가족 유튜브를 만나게 되고 자신 때문에 로마에서의 삶을 시작한 아내에게 소개했다. 낯선 땅에 자리 잡은 이방인 부부에게 로마가족 채널은 소소한 위안이었다. 그렇게 유튜브로 내적 친밀감을 쌓던 진경 앞에 민주가 나타난 것이다. 진경과 민주는 은은하게 친해졌다. 하루는 대화 중 올리브 유 이야기가 나왔다. 해외를 살면서 맞이하는 예상치 못한 일들에게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듯한 진경이 단단한 눈빛으로 민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주가 올리브 유를 직접 수입해보면 어떻겠느냐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민주는 그저 진경을 바라만 보았다. 알고 보니 진경은 오랜 기간 무역업에 종사를 했었고 현재 프리랜서로 수출입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이 로마 땅에 우연히 동네 카페에서 유튜버와 구독자가 만날 확률은? 심지어 우연히 들어서게 된 사업과 맞닿은 이를 만날 확률은?
"민주 씨 해봐요. 재미있을 거예요."
"..... 그럼..... 뭐부터 해야 해요?"
"우선 이탈리아 운송업체를 찾아서 견적을 받아봐요. 지금 민주 씨가 개별로 보내는 비용과 한 번에 수입해서 한꺼번에 보내는 운송 비용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시작해요. 밀라노에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운송 업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거길 찾아서 연락해봐요.”
진경과의 대화를 마치고 민주는 밀라노에서 사업을 하는 동생, 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정아, 너 사업하는 거 많이 힘드냐? 있잖아... 나도 사업을 해보려고. 전에 이야기했던 그 올리브 유 내가 직접 수입해보려고."
"언니!!!! 무조건 해. 세금이고 뭐고 돈 나가는 거 생각하지 마. 그냥 해! 시작해! 난 사업 시작하고 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사업하라고 하잖아. 나 사업 전도사야. 언니, 해! 언니 잘할 거야. 힘들어. 힘든데! 재밌어. 뭐? 뭐? 내가 뭐 도와줄까? 회계사? 한국 통관업체? 내가 바로 연락처 보내줄게. 내가 예전에 수입도 하려고 했었잖아. 나 이것저것 많이 해보려 했었지. 그때 알게 된 분들인데 진짜 좋아. 언니 그분들한테 다 물어봐. 다 알려줘. 정말 진심으로 도와주실 거야. 해! 무조건 해! 재미있어! 잘할 거야."
민주는 혜정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탈리아 운송업체를 찾아 전화를 했다. 다음 날 새벽, 한국의 회계사와 통관업체에 연락을 했다. 인터넷으로 독점 계약서 폼을 찾아 하나하나 조항을 직접 만들어 이탈리아 어와 영어 두 버전으로 작성했다. 며칠 뒤, 7시간을 달려 올리브 농장에 도착했다. 민주는 농장 주인, 코라도와 마주 앉아 한국 판매, 독점 계약서에 사인했다.
한국에서만 산지 직송이 있으란 법이 없지. 미리 수입해두지 않고 주문을 받고 병입하고 보내려면 시간은 걸리지만 한국에서 이탈리아 산지 직송 올리브 유를 가장 신선하게 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분명 특별해. 지금처럼 여행이 쉽지 않고 여행이 가능해져도 이탈리아 내에서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농장과 한국을 연결하는 일이 재미있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민주는 이 아이디어가 현실의 사업이 되기까지 9개월이란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처음에만 재미있었다. 실현이 되기까지 즐거운 줄을 전혀 모른 채 민주는 힘겹게 자신을 몰아 하나하나의 단계들을 넘었다. 매 단계마다 민주는 자신의 몫이 아닌 길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빠져들 때마다 어김없이 올리브 유를 구입한 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맙다. 맛있다. 선물하고 칭찬 많이 받았다. 언제 또 살 수 있냐. 올리브 유가 얼마 남지 않아 불안하다.
요즘 다들 강박적으로 보일만큼 브랜딩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데 이 올리브 유는 어떻게 알려야 할까?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민주는 고민이 깊어질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민주가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동안 이 올리브 유가 민주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닿아 다시 민주에게 돌아왔다. 올리브 유를 구입한 분들이 지인들에게 소개하고, 자신들의 sns에 올려주었다. 민주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아직 부족한 그릇으로 애쓰기보다 올리브유가 스스로 어떤 힘을 가지고 나아가는지 지켜보는 시간도 필요하겠구나 생각했다. 숨이 찰 정도로 극한의 노력을 해야 하는 구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잠시 속도를 늦추고 지난 노력이 어떤 물결을 만들어낼지 한번 지켜보자고. 과거의 노력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민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기에 오기까지 민주가 만난 이들. 공구를 제안하고, 독점계약을 고민하게 하고, 사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의심할 때마다 용기를 보내는 이들. 충분히 지나칠 수 있었던 눈에 보이지 않는, 흘러가면 그만일,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질 말들이지만 초심자인 민주에겐 모두가 표지였다. 그리고 그 표지들은 같은 방향을 향해있었다.
"보물은 어디 있는 거죠?"
산티아고가 물었다.
"이집트에 있다네, 피라미드 가까운 곳에."
산티아고는 몹시 놀랐다. 집시 노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노파는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려면 표지를 따라가야 한다네. 신께서는 우리 인간들 각자가 따라가야 하는 길을 적어주셨다네. 자네는 신이 적어주신 길을 읽기만 하면 되는 거야."
산티아고가 무슨 말인가 하려는 순간,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두 사람 사이로 날아왔다.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산티아고, 나비는 행운의 표지란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처음에는 민주에게 맛있는 올리브 유. 다음엔, 주변에서 궁금해하니 알려주고 싶은 올리브 유. 그다음엔, 사업 아이템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직접 판매해보자고 생각했던 올리브 유. 막상 시작해보니 자신의 그릇이 아니다 싶어 포기하고 싶던 올리브 유. 그런데 어느 순간, 민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올리브 유에 진심이 되었다. 그러자 제대로 알리고 잘 팔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경과 혜정이 했던 말의 의미가 이거였을까?
힘들어. 그런데 재미있을 거야.
민주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재미있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민주는 모든 일을 치열하게 했다. 항상 애가 탔고 스스로 끊임없이 심장을 조였다. 열심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든데 재미있고, 열심인데 즐거울 수 있지 않은가. 이 길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이 길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을 이들과 자꾸만 맞닿는 것이었다. 아들, 이안이 말했다. 행복은 돕는 것이라고. 내가 누군가를 돕고 누가 나를 돕는 것이 행복이라고. 민주는 사업을 시작하고 만난 이들은 자꾸만 민주를 돕고 싶어 했다. 그래서 민주도 돕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일은 민주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사람을 만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민주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올리브 유가 진심으로 좋아졌다. 그리하여 민주는 표지를 따르기로 했다. 표지를 따라 새롭게 깨치며 이 낯선 세계에 적응하기로 결정했다. 이건 확실한 민주의 의지였다.
진심으로 좋아지니 진심으로 팔고 싶어졌다.
제대로, 잘.
즐겁게.
다음 편에 계속..
*주의 : 이 글에 등장하는 민주네 가족의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지만 가명입니다. 내용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기억에 의해 과장되거나 조작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