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영을 시작한 이유
나는 휴대폰 중독이다.
2023년에 그리 충격적인 커밍아웃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하루 스크린 타임이 평균 8시간이다. 보는 시간만 그런 거지 귀에 꽂고 있는 시간까지 모두 합치면 하루 종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디오북을 듣다 잠들고 있으니 잠자는 순간까지 접속 중인 셈이다. 급기야 이탈리아 어 수업 중에 아무 이유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냥 화면을 툭 치고 새로운 알림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 멈췄다.
"엄마? 내 이야기 듣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했어!"
"응? 뭐라고? 엄마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줘."
"싫어! 엄마 지금 다른 거 듣고 있잖아!"
"아냐~ 엄마 안 듣고 있어."
"그럼 귀에 꽂은 거 빼!"
들켰다. 아이는 나의 애원에도 끝까지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안하고 궁금하고 쪽팔렸다.
하고 있는 일이 한국과 연결되어 있다 보니 유럽시간 한국시간 미국시간 종횡무진 휴대폰과 접속한다.
하루에 한 시간 비행기 모드로 두기, 외출할 때 휴대폰 두고 나가기, 별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휴대폰 없이 외출을 하자 정말 볼일만 보고 집으로 달려와 휴대폰을 확인하는 어처구니없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긴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길어야 글이 길어지는데 진득하게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무언가를 보던가 무언가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이 중독의 원인이 불안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이유 없는 불안. 막연한 불안은 자꾸만 누군가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성장하려면 나보다 먼저 더 크게 성장한 사람을 보아야 한다.’는 무수한 자기 계발서에 발맞추어 팔로우를 하고 그들의 업적(?)을 스크롤한다. 비교가 시작되고 불안은 우울이 된다. 내가 했던 일과 하는 일과 하려던 일이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진다. 불안과 우울을 동반한 무기력이 찾아왔다. 결국 어떤 것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아니다. 한 가지 행동은 꾸준하게 했다. 누군가를 들여다 보기는 멈추지 않았다. 단, 5분이라도 강제적으로 접속을 차단할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수영
오래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수영이 담겨있었다.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유독 또렷한 기억이 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해변에서 수심이 낮은 물에서 놀고 있었는데 정말 한 순간에 쑥 하고 빨려 들어갔다.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모래 언덕이 실제로는 수심이 깊은 곳이었던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날 보지 못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깜깜한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데 어느 아저씨가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 이후의 일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 대한 공포는 뾰족하게 남았다.
이 공포를 이겨내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한 것은 이탈리아에 온 첫 해의 한 해변 마을에서였다. 2006년 이탈리아 지도를 들고 여행을 다니던 시절, 배가 고파서 멈췄던 작은 마을이 polignano a mare(폴리냐노 아 마레)였다. 지금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물론이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꽤나 유명해진 곳이지만 당시엔 로마의 친구들에게도 생소한 작은 마을이었다. 점심을 먹고 우연히 찾은 해변은 절벽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자갈 해변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데 젊은 소년들이 끊임없이 절벽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버였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저 동굴 너머에 무언가 있는 걸까?
조심조심 들어선 작은 동굴의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소년들은 동굴을 지나 깎아지른 절벽으로 올랐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발하나 겨우 놓을 공간의 절벽에 등지고 서서 옆으로 옆으로 천천히 발을 옮겨 더 높은 절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으로 뛰어든 소년들은 이내 바다 위로 올라와 상체는 공기 중에 하체는 바닷속에서 부유했다. 눈앞에는 셀 수 없는 소년 소녀들이 파도와 하나가 되어 일렁였다. 발이 닿지 않는 수심의 바다였지만 깊이는 알 수 있었다. 깊은 물속 바닥의 자갈 하나하나까지 모두 들여다 보일만큼 바다는 맑고 푸르렀다. 이 바다라면 나의 공포를 가져가 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13년이 되었고 난 첫 아이를 임신했다. 부른 배를 어루만지면 산책을 하던 중 작은 수영장을 발견했다. 수영장은 천정으로 하늘이 보였다. 햇살이 닿는 트랙에 평형으로 나른하게 나아가는 여자가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을 한 장면 같았다. 여기다. 아이가 태어나면 여기서 수영을 배워야지.
시간이 지나 2023년이 되었다.
버킷리스트에는 이탈리아에서 수영 배우기가 여전히 담겨있었고 그 옆에 괄호하고 (30)이라고 적혀있었다. 30대에 해야 할 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40대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휴대폰에 중독된 40대가 되었다. 수영이라면 휴대폰 중독 재활로 완벽하다. 귀에 뭘 꼽을 수도 없다. 그 길로 곧장 수영장으로 찾아갔다. 10년 전, 그 수영장이다. 등록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블루 스위밍 수영장 초급반이 일상에 자리 잡았다. 월요일과 수요일 두 아이를 등교시키고 수영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뉴진스의 ‘Ditto’를 재생한다. 우후우우~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 아, 몸도 움직였던가?
수영을 하는 1시간 동안 휴대폰 생각은 1도 하지 않는다. 생각할 틈이 없다. 물을 먹어도 너무 먹는다. 이러다 수영장 물에 물을 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영을 마치면 허겁지겁 휴대폰을 찾을 줄 알았는데 그럴 틈도 없다. 샤워기 물이 어찌나 뜨끈하지 몸을 지지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수영장 입구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다. 이탈리아에도 커피 자판기가 있다. 안타깝게도 맥심은 아니고 에스프레소가 나온다. ‘초콜릿이 들어간 카푸치노’ 버튼을 누른다. 80센트다. 설탕이 먼저 나오고 우유가 나오고 플라스틱 막대가 나오고 에스프레소가 나오고 쵸쿄시럽이 마지막으로 들어간다. 커피를 꺼내어 작은 플라스틱 막대로 휘 젖는다.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에 살짝 덜 마른 머리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눈을 감으면 대구의 우리 집 앞 ‘원 목욕탕’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햇살은 이미 봄이다.
두 시간, 완벽하게 휴대폰과 분리되었다.
진짜 기분 좋다.
그럼, 다시 접속하자.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