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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Apr 08. 2023

10. 이탈리아 시장을 뚫는 모험 2

2편 :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된다

“이번에 볼로냐에 오기로 했던 한 분이 못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볼로냐 도서전 티켓이 한 장 남는데 민주 씨가 오세요.”


영이 말했다. 영은 민주 가족의 만화책시리즈를 제작하는 출판사 본부장이다. 볼로냐 도서전은 민주가 언제나 꿈꾸던 곳이었다. 그런데 매번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이탈리아에 산 18년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어긋났지만 올해는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라도 다녀와야지 했지만 결국 포기했었다.


“남편이 일을 빼야지 갈 수 있는데 가능한 날이 하루뿐이라….”

“당일치기는 힘든가요?”


응? 로마에서 볼로냐까지 기차로 2시간 남짓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당일 치기가 어려울 이유가 무엇인가? 당일로 왕복 14시간의 이탈리아 최남단도 종횡무진했던 민주가 언제부터 이렇게 몸을 사리게 되었지? 하루 볼로냐를 다녀오면 그 뒤 며칠은 체력이 후달릴 것이 분명하니 지례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민주는 최근 수영을 시작했다. 당일치기 여행에도 흔들림 없는 체력을 만들기 위해. 수영의 효과를 테스트해 볼 절호의 기회가 왔다. 민주는 남편 재선에게 하루 볼로냐에 다녀오겠노라 했고 재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선은 겉으로 크게 민주를 응원하는 남자는 아니다. 속으로 응원을 하는지도 알 길을 없지만 그는 민주의 즉흥에는 항상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다.


볼로냐로 향하는 새벽


며칠 뒤 새벽 민주는 코트깃을 여미며 집을 나섰다. 볼로냐 출장을 떠나는 신여성이 된 것 같아. 민주는 경쾌한 발걸음을 우아하게 고쳐 잡고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지하철 계단을 또각또각 걸어내려갔다. 섹스 엔 더 시티의 주제가가 크게 울려 퍼졌다. 민주에게만 들렸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민주의 세계에선  민주가 주인공이다.


볼로냐 풍경

도착한 볼로냐의 아침은 푸르고 청명했다. 기차역에서 나서는 사람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민주는 본능적으로 도서전으로 향하는 이들임을 알았다. 다들 어깨에 세상 어딘가에 있는 책방의 에코백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버스 정류장. 엄청난 인파가 도서전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는 바로 구글맵을 펼쳤다. 걸어가면 30분 정도. 영 본부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 내에 도착하기엔 충분하다. 민주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도서전을 향해 걸었다.


기차로 두 시간만 북쪽으로 달려와도 이렇게 공기가 다르다.  볼로네제 파스타의 미식의 도시, 볼로냐. 미로 같은 회랑(포르티코)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볼로냐를 대표하는 인물인 움베르토 에코는 볼로냐에서 평생을 보낸 화가 모란디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모란디의 그림은 척 보기엔 똑같은 붉은색이 집집마다 거리마다 미묘하게 다른 볼로냐를 걸어본 다음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모란디의 그림 속을 걷듯 미묘한 붉은색들 속에 민주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서전에 도착했다.


볼로냐 아동 도서전 일러스트 월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열리고 있었던 이수지 작가 개인전

도서전 입구의 전광판에서 한국 작가들의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민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리고 눈앞에 엄청한 장면을 마주했다. 벽전체에 빼곡히 붙어있는 전단지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림과 명함들이었다. 남아있는 자리가 없어 보임에도 어떻게 눈에 뜨지 않는 자리까지 찾아내서 주저앉아 그림을 붙이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후에 영이 말해주었다.


“볼로냐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이에요. 일러스트 월이라고 불러요. 볼로냐 도서전 첫날 오픈을 하면 다들 뛰어서 가장 좋은 자리 붙여요. 그러면 도서전 기간 중에 방문하는 출판 관계자들이 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명함을 가져가서 그림책 작업에 의뢰를 하는 거예요.”


민주는 그제야 자신의 심정이 강하게 뛴 이유를 알었다.  모두가 검색어 노출 등 온라인 세계 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혈안인 시대의 한가운데서 현실 세상에서의 아주 작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우연의 기회가 펄떡이며 살아 움직이는 세계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거대한 일러스트 월이 감싸고 있는 태풍의 중심에 그녀의 작품 전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작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그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개인전이었다. 마치 그림책 세상의 끝판왕 같았다. 때마침 이수지 작가의 북토크가 민주가 방문한 날 예정되어 있었다. 한마디 말이라도 나눌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러스트 월을 지나자 본격적인 도서전이 펼쳐졌다. 아뿔싸! 여길 애들을 데리고 오려고 했다고? 민주는 서울 도서전이나 로마 도서전처럼 다양한 책을 만나고 구입할 수 있는 행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단히 착각했다. 여긴 저작권을 사고파는 분 단위로 미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출판 비즈니스의 숨 막히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뛰어다닐 나이의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모차와 수유를 하는 엄마들은 많이 보였다. 유모차를 끌며 젖을 물리며 엄마들이 비즈니스의 세상 속에 서 있었다.


30건의 미팅이 잡혀있다는 영을 드디어 만났다.

“이번 한 건 미팅이랑 다른 작가 미팅 마치면 어느 정도 시간 확보가 가능해요. 자, 그 시간에 우린 로마가족의 유럽살이 책을 팔아봐야죠. 그 책방 분이랑은 연락이 되었어요?”


그 시간에 이수지 작가 북토크가 있어서 가고 싶었는데… 아냐! 민주야 정신 차려! 민주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 만화책을 이탈리아에 팔기 위해서다. “내가 아는 출판사에 소개해 줄게.”라는 책방지기 데보라의 말 한마디에 볼로냐까지 왔다. 민주는 데보라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이 넓은 박람회장에서 뛰어다니며 그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디 있어요? 문자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민주는 주저앉아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저 볼로냐에 왔어요. 그때 출판사 소개를 해준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우리 출판사 담당자와 함께 이탈리아 출판사와 미팅을 하고 싶어요. 전 오늘 하루만 시간이 가능해요. 저녁 기차로 다시 로마에 돌아가야 합니다. 꼭 연락 주세요.”


그리고 몇 분 뒤 답이 도착했다.


“Ciao, sono al caffè degli illustratori per sentire gli 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

(안녕,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카페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상 수상을 들으려고 와 있어요.)


볼로냐 도서전 안내서를 펼쳤다. 일러스트레이터 카페가 어디 있지? 지도상엔 없었다. 아마도 도서전 관계자들끼리 이야기하면 통하는 장소인 듯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민주는 여기 묻고 저기 묻고서야 그 장소에 도착했다. 민주가 도서전에서 처음 마주했던 곳. 일러스트 월이 감싸고 있는 그 안을 사람들이 일러스트레이터 카페라고 불렀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올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수상자를 듣기 위해. 그 사람들 속에서 민주는 데보라를 찾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시상이 끝날 때까지 그녀 곁에 서서 그녀가 혹여 어디 날아가 버릴까 주시하며 기다렸다. 수상자 발표는 직접 수상자의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알렸다. 영상 통화도 아니고 그냥 음성 전화를 걸어 올해의 그림책 작가가 되었어요. 하니 울먹거리는 감사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장내에 모인 이들이 기쁜 눈물지었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 시상인데 파도처럼 감동이 밀려들어왔다.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낭만이 살아 움직였다.


행사가 끝났고 데보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소개해 주기로 한 출판사 부스까지 향하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했는지 모른다. 어디 책방 주인, 어디 출판 관계자, 어디 작가 그녀가 전화를 받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안내한 출판사 앞에서 민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서전은 출판사의 유명세와 크기에 따라 위치와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는데 그중 가장 크고 좋은 위치에 있는 출판사였다. 민주도 익히 알고 있는 출판사였다. Tunuè. Peratoons라는 이탈리아 국민 만화 시리즈를 출간하는 곳이다. 이안이와 이도가 스스로 읽었던 첫 책이기도 했다.


미팅을 했던 tunuè 출판사 부스


데보라는 tunuè 의 치프 편집장을 민주와 영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즉석에서 미팅이 성사되었다. 그가 묻고 영이 대답하고 민주가 통역하고 때로는 민주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로마가족 만화책을 펼치는 순간 민주와 영은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에선 너무나 익숙한 학습만화의 그림체가 유럽 시장 안에서 꽤나 낯선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마치 이탈리아의 쇼 무대에 한국의 아이돌이 나와서 춤을 추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일전에 영이 말했다.


“같은 아시아 권에선 한국의 학습만화 수출이 활발한데 유럽은 아무리 뚫으려고 해도 안 돼요. 학습만화 자체가 왜 필요한지 느끼지 못하고 무엇보다 그림체를 너무 생소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그 말을 현장에서 고스란히 느꼈다. 그러나 데보라도 민주의 지인들 모두 이탈리아에서 꼭 출간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모두가 동일하게 그림이 너무 귀엽다고 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분명 그리 느껴서 하는 말이었다.


민주는 개인의 눈과 그 산업 속의 사람들이 보는 시장의 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한국 시장에서 이 만화책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달성했는지가 키포인트였다. 그러기엔 민주가족의 만화책은 숫자로서 보여주는 결과물이 약했다. 영이 말했다.


“민주 씨가 해 봐요. 우린 이탈리아 시장을 잘 알지 못하니 민주 씨가 여기 출판사를 컨택하는 방법도 있어요.”


민주와 영이 방금 진행했던 미팅은 첫 시도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데 민주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안 될 것 없다는 기분.


우리 만화책이 이탈리아에서도 번역이 되어 출간되면 좋겠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생각은 현실의 민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었다. 그 점에 닿기 위해선 그 사이에 무수한 점을 찍고 이어야 하는데 대체 어떤 점을 찍고 그 점을 연결하는 선은 어찌 그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마구마구 점을 찍었다. 그 점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흐지부지 사라지거나 그나마  그어진 선들은 죄다 꼬여있다. 꼬여버린 선은 불안을 낳고 조급함을 낳다가 무기력을 낳아 우울에 도달했다.


첫 시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 선들이 툭툭 떨어져 흩날려가고 하나의 방향을 향해 점들이 찍혔다. 상상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들이 겉히고 선명한 상상이 그려졌다. 구체적인 상상은 손이 잡히는 현실처럼 느껴졌다.


콘텐츠가 낯설다면 이 것이 이탈리아 시장에 어떻게 어필되는지 보여줄 내용을 정리하자. 만화책은 아직 한 권이 출간되었고 총 10권의 시리즈를 완성해 가며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한 권를 수출하는 것보다 몇 편이 쌓이고 어필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 당장 결과물을 얻겠다고 안달하지 말자. 그 사이 더 견고하고 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자. 결국 지금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더 좋은 내용, 필요한 내용을 담을 것인가?”이다. 그리고 이것을 닿게 하기 위해서 내가 연결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볼로냐에서 로마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민주는 벅차올랐다. 민주는 아주 멀리 아주 큰 점을 찍었다. 로마가족의 유럽살이 유럽진출이 아니라 한국의 학습만화의 유럽진출이라는 큰 꿈 말이다. Kpop처럼 한국의 학습만화는 한국 특유의 k출판이다. 지금은 생소하지만 분명 이 문도 열릴 것이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갈 것이다. 앞으로 민주의 시도는 점점 더 쉬워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좌) 코드네임 X, 시공주니어 /  (우) 티나의 양말, 한솔북스

다음 날, 민주는 아이들과 동네 대형 서점에 갔다. (한국의 교보문고 급의 이탈리아 대형 체인 서점, la Feltrinelli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민주는 소리를 질렀다. 이안이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코드네임 x]와 이도에게 꼭 읽어주고 싶었던 [티나의 양말]이 이탈리아에 출간되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여있었다. 질투했냐고? 전혀! 민주의 저 멀리 생각의 큰 점이 좀 더 가까워졌는걸! K출판이 성인 소설에서 청소년 물로 확장되고 있다! 코드네임을 출간한 출판사와 티나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를 메모했다. 여기도 우리가 문을 두드릴 출판사 리스트에 넣자.


그때 문자가 도착했다.

데보라였다.

오늘 저녁에 이수지 작가와 저녁 먹을 건데, 너도 우리랑 함께 갈래?


이것 봐. 점이 제대로 찍히고 있어! 남편 재선에게 오늘 저녁 외출해야 할 것 같아, 하고 민주가 말했다. 재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주의 즉흥에 항상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다.


민주는 이수지 작가 옆에 앉았다.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출판, 도서관, 박물관, 책방 관계자들과 로마 백반집에 앉아 웃으며 먹고 마셨다. 이수지 작가와 이야기도 나누고 그녀의 책에 사인도 받고 민주가족의 만화책도 전했다.


그녀의 첫 책을 출간해 주었던 이탈리아 출판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되었다. 그녀의 첫 출간이 한국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20년 전, 런던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미완성 작품을 들고 볼로냐 도서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작품을 눈 여겨본 이가 이탈리아 출판사에 그녀를 소개하고 그곳에서 그녀의 첫 책이 출간되었다. 이수지 작가가 볼로냐 도서전이 자신에게 정말 큰 의미를 가진다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수년 전 동네 도서관에서 그녀의 책을 만났지만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을 때야 바로소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한국에서 유명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갔다 생각했다.


민주는 20년 후의 큰 점에 닿은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민주가 보는 것이 20년 후의 이수지 작가라는 것을. 그녀가 품은 의미들이 20년 동안 쌓인 것이지 20년 전 시작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 빅물관에서 열린 이수지 작가 행사

다음 날, 로마의 한 박물관에서 이수지 작가의 북토크와 아이들을 위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녀의 작업에 담긴 서사와 의미들이 아름답고 부러웠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신이 만드는 꼴에 담아 널리 전할 수 있는 지점에 닿아 있는 이에게선 빛이 났다. 반짝반짝.


아이들 행사 역시 아름다웠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자 책에 영감을 받은 작업이었다. 너무나 능숙한 진행과 멋진 작업에 찬사를 보내자 아이들 행사 진행을 맡은 파올라 말했다.


“우리가 이수지 작가의 책으로 아이들과 이런 작업을 해 온 게 15년이 되었어. 그런데 정말 그 작가 앞에서 하게 되다니 정말 떨렸어.”


아아… 여기에도 15년이 쌓여있다.


행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이수지 작가가 묻고 답하는 시간이 있었다. 민주에게 간단한 통역을 부탁했는데 엄마의 통역이 못마땅했는지 딸, 이도가 앞으로 나와 통역을 자처했다. 그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행사를 마치고 파올라가 다음에 아이들을 위한 한글 행사도 함께 진행하면 재미있겠다 말했다. 흘려보내는 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이 될 수 있게 민주가 집적 구체적으로 모양을 만들어 제안하면 된다.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시장에서 원하고 있다는 신호임을, 민주를 스치는 기회들임을 이제는 안다.


민주는 다음 날 포포포 대표 유미와 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며칠간의 이야기를 유미는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며 들었다. 흥분된 대화를 마치고 유미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 매거진의 고정 칼럼을 맡아주시는 건 어때요? 여름에 오시면 재밌는 거 많이 하고파서 대구에 계신 엄마대표님과 판을 짜고 있어요. 몸만 오세요!


점이 찍히고 선이 그어진다.

우연한 우연으로 우연에 우연이 닿아,

우연하게 우연이 또 만들어진다.

그 우연이 저 멀리의 아주 큰 점으로 향하고 있다.


이 여정은 가까이에서 보면 점이지만,

멀리에서 보면 선이다.

엉키고 엉켜 비틀린 아름다운 나선이다.



다음 편에 계속..


*주의 : 이 글에 등장하는 민주네 가족의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지만 가명입니다. 내용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기억에 의해 과장되거나 조작될 수 있습니다.



popopo 매거진 7호: 다양성
이수지 작가 인터뷰 중에서

: [여름이 온다]를 만들던 때가 떠오릅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것이 눈앞에 보였어요. 이걸 내가 실제로 해보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발전시키며 필요한 것들을 모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 그러나 그 순간은 찰나예요.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하는 나머지 일은 모두 말 그대로 ‘일’이고, 생각처럼 잘 풀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하지만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나의 마음 상태를 만들고, 음악을 틀고, 재료를 준비하는 평범한 순간들 또한 매일의 기쁨이기도 했어요.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훨씬 많지만, 그건 언제나 같이 가는 세트라 생각하죠. 중간에 막혀서 도저히 안  풀리고, 몸에 피로가 쌓여 아프고,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도 일이 하나도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막막함에 휩싸이지만, 또 묵묵히 다음 날을 위해 종이를 폅니다.

책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 또 미래의 일들을 함께 도모하면서 가는 이은 힘들어요. 하지만, 그냥 갑니다. 어떤 것의 완성된 꼴을 마음속에 그리고, 그 결과물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냥 필요한 것들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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