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 : 카페 라테에 담긴 한 끗
2004년, 민주의 남편, 재선은 이탈리아 투어 가이드를 시작했다. 2023년 현재 20년 차 가이드이다. 누구나 알만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여행 중 우연히 귀동냥한 투어에 반해 로마로 훌쩍 떠나왔다. 2006년, 민주가 로마에 도착했고 직장 선후배로 연애를 시작했다. 당시 민주 눈에 그는 어마어마한 경력의 소유자로 보였지만 재선은 갓 3년 차에 접어든 가이드에 불과했다. 그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앞섰고 체력은 우주를 찔렀는데 손님들의 열정과 체력은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뿜어져 나와 그와 함께한 여행객들은 혀를 내둘렀다.
대~~~~ 애단하다!
세월이 지나, 민주는 첫 아이를 임신하며 가이드를 그만두었다. 어느 날, 참 오랜만에 가이드 인생의 강산을 두 번을 넘긴 이제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재선의 투어를 듣게 되었다. 민주가 느낀 감정은 경이로움이었다. 그의 투어를 듣는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열정에 노련미가 더해졌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완벽하게 전할 바를 담으면서도 최적의 동선을 놓치지 않았고 인원 모두를 아우르는 연륜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누가 투어를 받는다 해도 '이 사람은 보통이 아니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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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담당하는 투어는 주로 이탈리아 남부다. 남부투어라는 것은 엄청난 변수가 발생함을 뜻한다. 남부의 교통상황, 날씨에 따른 만족도의 현격한 차이, 여기에 배시간을 완벽하게 맞춰야 하는 시간 구성까지 겹치면 가이드에겐 단순한 인솔을 넘어 고도의 임기응변의 기술을 요구된다. 민주는 7년의 가이드 생활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 변수의 압박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이런 투어의 압박을 견디며 투어 전, 함께할 모든 고객들에게 개인 톡으로 일정을 안내하는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투어 중간중간 다음 일정에 대한 안내를 한다. 안내라고 하지만 가이드와 개인 연락을 하게 되는 순간 여행자는 이 통로를 통해 개인적인 여행의 문의를 하게 되니 결국 정식 투어 이전에 가이드의 업무는 이미 시작되어 버린다. 이것은 회사의 요청 사항이 아닌, 수년간 그가 스스로 해오는 일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집 안에 커피 향이 퍼졌다. 처음엔 모카 포트로 에스프레쏘를 뽑는가 보다 했는데 이 커피 향이 끝나질 않았다. 이후 냉장고 안에 가득 채워진 카페라테를 발견했다. (그의 모카포트 에스프레소로 만든 카페 라테의 맛을 기가 막힌다.) 남부투어는 이른 아침 출발하기 때문에 로마에서 남부 도착 전에 휴게소에 들러 간단하게 아침을 먹을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남부의 교통 사정 문제로 다음 날 휴게소에서 오래 머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미처 아침식사를 하지 못할 손님들을 위해 아침 식사가 될 만한 간식을 준비하면서 직접 30인분의 카페 라테를 만들었다. 그리고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연락을 했다. 남부에서의 최적의 시간 활용을 위해 7시로 예정된 출발 시간을 6시로 변경하여 출발하자고. 신입 가이드가 자신의 부족함을 매우느라 쏟는 정성은 이해가 가지만 20년 차 노련미의 가이드가 전 날 카피를 타는 일은 꽤나 의외다. 그것도 한 번에 고작 에스프레소 4잔이 나오는 모카 포트를 몇 번을 반복해 끓여내서 말이다.
다음 날, 새벽 5시 그는 간식과 30인분의 카페 라테를 어깨에 짊어지고 어둠이 깔린 새벽 집을 나섰다.
민주가 딸, 이도와 잠들기 전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도가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1위는 아빠야.
아들, 이안이 와 카페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이안이가 말했다.
나를 100% 이해하는 사람은 아빠야.
아니, 얘들이 뭐래? 아빠는 일하느라 집에 있는 날도 거의 없고, 그나마 집에 있는 날도 투어에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기진맥진 대부분 누워있잖아. 여름 방학 3개월 내내 엄마인 내가 너네를 데리고 여기저기 그렇게 많은 경험들을 만들어줬는데! 이제 와서 아빠가 1위라니! 배응망덕한 것들!
이도가 말했다.
"아빠는 나랑 진짜 잘 놀아줘."
뭐시라? 고작 일주일에 한두 시간 같이 놀아 주는 것만으로 1위라고?
이안이가 말했다.
"내가 아빠한테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아빠는 아빠의 반을 줘. 내가 아빠에게 한 입만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제발 반을 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걸 아빠는 읽은 거야."
얼씨구! 몇 번 그런 걸 가지고 뭘 100%까지! 밥은 내가 더 많이 하는구먼!!
바야흐로 2023년, 자신의 성장기를 공유하고 실적을 공개하고 잘한 건 더 크게 드러내야 하는 세상이다. 보여주지 않으면 없는 거나 다름없는 드러냄의 시대다. 팬데믹 속에서 남편의 동료가이드들은 이직을 하거나 투어 회사를 차렸다. 그 안에서 민주도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민주의 눈에 남편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처럼 보였고 드러내지 않음이 무기력으로 느껴졌다. 더불어 사업을 시작한 민주를 지원해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다. 그가 서포트해 주면 민주는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여행객이 그를 칭찬하고 아들 딸이 1위에 그를 올려 주어도 어쩌겠는가?
민주는 아내인걸.
아내 눈에 남편이 위대해 보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아주 오래전, 여행에서 돌아오던 차 안에서 민주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꿈은 뭐야?
내 꿈은 가족에게 인정받는 거야.
그러고 보니, 가족 안에 분명 민주가 있을 텐데.. 민주 눈에 그가 성에 차지 않는 이상 그의 꿈은 어찌 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아직도 그의 꿈은 유효할까?
지난 3년 동안 아주 작지만 나름 사업자를 내고 일을 만들어나가던 민주의 시간들은 불안과 조바심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다 최근 민주의 마음은 생애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잔잔하다. 적절한 타이밍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의 크기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당장의 지출에 연연하지 않으며 나름 투자라는 것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시간의 우여곡절 덕분이라고 생각했기에 민주 스스로 참 대견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다. 민주 이 평온함의 가장 큰 이유를.
코로나로 인해 멈춰있던 여행이 재개되고 남편이 가이드 업으로 다시 복귀했다. 만 2년 만에 가족에게 고정수입이 생겼다. 그의 일복귀가 민주의 평정심의 가장 큰 이유였다. 작은 사업을 운영하면서 겪은 극단적인 심경의 오르막과 내리막의 중심을 잡아준 것 역시 시대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은 그의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 승리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민주의 일에 관여하지 않음으로 민주만의 활로가 생겼고 더욱 크게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묵묵한 건실함은 민주의 업에 보내주는 가장 큰 응원이자 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쉬는 날, 체력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은 그의 최상의 투어 컨디션을 위한 프로페셔널한 관리로 보였고 투어 안에서 그가 느끼는 극단의 긴장감을 집에서 푸는 철저하게 계산된 과정으로 보였다. 팬데믹을 겪으며 불혹에서 지천명으로 넘어온 그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업을 지속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바를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그가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타카마츠 미사키의 만화 [스킵과 로퍼]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과 친구가 체육관에서 배구 연습을 하는데 농구를 하겠다며 방해하는 선배 둘, 친구는 그 둘의 이름을 외워 자신의 원한의 노트에 적겠다고 이를 간다. 다행히 다른 선배가 그들에게 소리쳐주어 둘은 다시 배구 연습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주인공이 도와준 선배의 이름을 언급한다. 친구가 묻는다."너 그 선배 알 고 있었어?" 그러자 주인공이 대답한다. 신발에 적힌 이름을 외웠다고.
친구는 깨닫는다. 자신이 그들을 화나게 한 두 선배의 이름을 외워 복수할 생각할 생각을 하는 동안, 주인공은 그들이 받은 친절에 집중하여 도와준 선배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음을.
너무나 오랜 시간 민주는 남편을 통해 불평할 것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두 아이조차 보고 있던 친절을 민주는 보지 못했다.
일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접하는 이야기가 한 끗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사이
성공과 실패의 사이
리더와 직원의 사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한 끗이다.
그 한 끗은 '왜 그렇게 까지 해?"라는 말을 듣는가? 아닌가?라는 말을 존재의 유무에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렇게 까지?’ 란 뭘까?
아들의 말속에 답이 있었다.
한 입을 달라고 했는데 반을 주는 것.
어느 날 남편의 투어를 보고 경이롭다고 느낀 날, 민주가 본 것이 그 한 끝이었다. 지난 3년 사업을 통해 민주가 얻은 것이 아주 조금 넓어진 그릇이라면,
그가 자신의 업에서 한 끗을 펼칠 수 있도록 긴장이 풀리고 마음껏 기진맥진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집이라는 공간 안에 담는 일에도 그 그릇의 쓰임이
있지 않을까?
비단 남편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집이라는 안전지대 속에서 민주 역시 자신의 업을 단단하게 뿌리내리며 한 끗을 펼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
*주의 : 이 글에 등장하는 민주네 가족의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지만 가명입니다. 내용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기억에 의해 과장되거나 조작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