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24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금요일 아침이었다. 로마의 모든 사람은 여름을 즐기러 떠난 듯했다. 우리만 빼고. 6월의 마지막 금요일 휴일에 뜨거운 태양까지 더해졌다. 친구들 단톡 방엔 로마를 떠난 이들의 교통체증 소식뿐이었다. 별 다른 계획도 없고 날은 덥고 일어나서부터 줄곳 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뒹굴뒹굴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벨을 눌렀다. 아.... 그날 난 왜 문을 열었을까?
전기와 가스요금을 내는 지점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이탈리아는 전기와 가스요금을 내는 곳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 통신사처럼 더 저렴한 요금 혜택 등의 프로모션이 난무한다. 물론, 좀처럼 한번 선택한 것을 바꾸지 않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바꾸고 싶어도 이게 좀 귀찮은 게 아니다.
인터넷의 경우를 예로 들면 더 좋은 가격이 나와서 다른 회사로 옮기고 싶어도 그 과정이 한 달은 넘게 걸린다. 21세기에 인터넷 없이 한 달을 버틸 자신이 있는가?! 하루도 힘들지. 그냥 비싼 요금 내고 쓰자. 언제나 결론은 같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뭔가를 바꾸지 않으니 집으로 잡상인(?) 이 찾아온다. 찾아다니며 홍보를 하는 거다. 더 좋은 요금을 제시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를 쓰자고 한다.
문제는 이 경우 대부분 사기인 경우가 많다는 거다. 돈을 빼내간다기보다 덜컥 사인을 하고 나니 지점이 다른 회사로 바뀌어 있다던가(분명 같은 회사라고 해놓고!) 더 비싼 요금제로 바뀌어 있다던가 이상한 전자제품을 구입하게 되기도 한다.(이탈리아는 가스, 전기 요금을 담당하는 곳에서 에어컨, 보일러 등의 전자제품을 판매하고 요금 절감의 혜택을 제공한다)
잡상인들은 보통 남, 여 젊은 사람이 2인 1조이며 마지막 요금을 냈던 세금 용지를 요구한다. 여기에는 거래번호가 있는데 이게 있으면 거래처를 바꿀 수 있다. 보여 주기만 했는데 거래처가 바뀌어버리는 거다. 공략 대상은 노인이나 외국인이다. 계약 내용을 잘 이해 못하는 사람들. 이들이 집에 주로 머무는 때가 오전, 휴일 또는 여름휴가철이다.
자, 이 정도면 뭔가 감이 올려나? 휴일, 외국인, 오전의 벨소리.
그렇다 우리 집이 당첨된 거다. 난 주변에서도 누누이 이야기를 듣은 바 문도 잘 안 열어주고 바로 관심 없다고 돌려보내는데 이날은 귀신이 홀렸나 보다. 문을 열자 건장한 남자가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서있다.
_아 내가 휴일에 이게 뭐냐? 진작 진작 와서 사인하면 얼마나 좋냐? 이렇게 직접 와야겠냐? 얼른 끝내고 우리도 바다에 가자!
_어?
_요즘 여기저기서 회사를 바꾸게 하려고 사람이 오지 않냐? 그거 안 바뀌게 하는 싸인과 함께 지금 너네 집에 요금제가 비싸다. 바꾸라고 안내 못 받았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바꿔주겠다.
_나 너네 회사로 이미 전기, 가스세 내고 있는데?
_안다. 그러니까 온 거 아니냐?
옆에 있던 여자가 태블릿을 켜고 내 이름을 치니 회사에 등록된 신상명세가 떴다. 확 믿음이 간다. 아이고!! 내가 몰라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네, 하고 덜컥 사인을 하고 보냈다.
문을 닫고 몇 분 뒤에 정신이 드는데 기분이 싸하다.
찜찜하다.
어? 나 지금 뭘 한 거니?
구글링과 괴로움으로 잠 못 이루는 휴일과 주말이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유모차를 밀고 지점으로 갔다. 상황을 이야기하니 아직 전산 상 바뀐 게 없단다. 그럼 나 어떡하냐? 하니 다음부터는 네가 확신이 없으면 절대 사인하지 마!인심 쓰듯 충고해줬다.(그런 말을 듣자고 이 더운데 유모차를 끌고 온건 아니지 않겠니?)
집으로 돌아오는데 순간 확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럽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스멀스멀 무언가가 올라오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 그래,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궁극의 자괴감이었다.
10년을 넘게 이탈리아에 살았으면서 이렇게 어이없이 당해버리다니! 길에 주저 않아 울어 버리고 싶었다. 나름 자신 넘치는 해외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뭔가? 결국 난 멍청한 호구 이방인이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다. 내가 저지른 일 내가 수습해야 한다. 바로 지점 중앙 번호로 전화를 했다. 장황한 자동안내 목소리를 들으며 억 겹의 시간이 지나서야 상담원 연결번호안내가 나왔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역시나 아직 전산상의 변화는 아무것도 없단다.
며칠 뒤 다시 전화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틀이 지나 의문의 전화한 통을 받았다. 일전에 사인한 내용에 대한 확인 전화였다. 알고 보니 바뀐 요금제는 매달 고작 1센트가 절약되는 것이었다.(축하드립니다!! 매달 1센트가 할인되시겠네요!!!라고 상담원이 말했다!!!! 아.... 뒷골 당겨!!) 거기에 전기 관련 보험이 추가되어 매달 5유로씩 빠져나가도록 되어있었다. (큰 사기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거에 사람을 며칠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냐?)
싸인을 한 건 맞는데 그때 제대로 이해 못했다. 취소해달라. 하니, 취소되었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뭐야?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거였어? 그럴 리가 없지. 통화 이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왜 취소하느냐의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끝나질 않는다. 문자, 전화 난리가 났다.
다시 상담원 연결을 시도해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는 상세 내용을 적어서 팩스로 보내야 한다 했다. 그건 또 어떻게 하는 거냐? 당황하니, 상담원이 내용을 불러주겠단다. 아, 그럼 천천히 부탁해하고 종이에 따라 적었다. 팩스를 보내고 일은 일단락되었다. 드디어 휴대폰이 잠잠해졌다.
내가 일 저지르고 수습하고 삽질도 이런 삽질이 없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 상담원이고 직원이고 거리에서 만난 동네 사람들 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거다. 진짜 모르고 사인했다. 너무 걱정이 돼서 며칠 잠을 못 잤다. 악몽이었다. 큰 사기 일까 봐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 진짜 그런 거 문 열어 주고 사인하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귀신에 홀렸나 보다. 어쩐지! 사인하는데 아들이 잘 놀다가 막 짜증을 내더라구!! 아들은 뭔가 느꼈나 봐.
어? 이거 완전 내가 그렇게 답답해하던 딱 이태리 사람들 모습이잖아? 여기가 일처리가 늦은 건 사람들이 느려서가 아니라 말이 많아서다. 분명하다. 슈퍼를 가도 캐셔분들이랑 계산하면서 엄청 이야기한다. 관공서에 가면 업무 안 보고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뒤에서 서서 기다리면 속이 터진다.
그런데 성질 급한 이태리 사람들 누구도 화를 안 낸다. 다들 똑같거든. 최근 딸 애가 팔을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이 말을 건다. 옷을 사고 계산하다가도 직원들이 뭔 일이냐 묻고 이야기해주면 조카 친구 자식 다친 이야기 다해준다.
세상에 세상에 내가 속 터지는 이태리 사람들처럼 말이 많아진 거다. 이태리는 아직도 대다수의 정보는 사람과 사람을 통해 얻어야하며 발품을 팔아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한 번에 해결되는 법은 없으니 이리저리 물어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의 답답함이나 힘듦을 그 누구보다 이들이 제일 잘 알 테니 위로도 이들이 가장 잘할 수밖에 없나 보다.
그것을 떠나서 (이 것을 오지랖이라고 부른다 해도) 이탈리아 사람은 공감하고 위로함에 있어서는 단연 일등이다. 얼굴도 모르는 상담원은 나의 하소연을 다 듣고는 걱정마라 다 해결됐다. 이젠 편히 잘 수 있겠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난 달 둘째가 놀다가 팔꿈치에 금이 갔다. 병원에서 깁스를 푸는 예약 날짜를 주면서 엑스레이는 따로 전화해서 약속을 잡으라고 했다. (이거 그냥 한 번에 다 해주면 안 되나는 건가요?) 병원 중앙 번호로 전화를 하니 병원 부서 안내가 나오는데 병원 용어들이 당최 어렵기만 했다. 예약 번호 누르라기에 누르고 뭘 누르라고 눌렀더니 네, 예약이 성공적으로 취소되었습니다. 하는 거다 어?! 어!!!??? 그렇다. 내가 직접 기존의 예약까지 취소해버린 거다.
다시 전화를 걸어 상담원을 연결하고 예약을 살리고 엑스레이 예약까지 완료했다. 또 하소연했다. 내가 외국인인데 이렇게 전화 예약 너무 어렵다. 취소해 버려서 얼마나 당황한 줄 아냐? 하니 전화 속 상담원이 걱정마라. 예약 잘했고, 그 날 와서 잘 치료받아라 했다.
아직 수습이 되지 않았던 토요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슈퍼에서 장을 보고 나가려는데 아이가 따라오질 않았다. 빨리 와! 하고 소리치는데 오히려 캐셔분이 날 불렀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돈만내고 물건을 안 담은 거다.
_고마워, 이안이 아니었음 큰일 날뻔했네.
엄마,
엄마는 언제나 너무 급해.
급하면 자꾸 놓치지.
아이 손을 잡고 걷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의 일을 겪으며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헤맨다 싶어 주눅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주눅 들고 삽질을 하고 해결해 나가야만 하는 걸까? 답답했다.
집, 차, 학교, 수많은 새로운 일들을 처리하면서 개운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적어도 세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답을 얻어야만 한다. 그렇게 결정을 해도 불안하다. 내가 잘 처리한 걸까? 또 묻고 묻는다. 무엇에 관련된 것이든 계약서는 여전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고 전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번 망설이게 된다. 10년이 넘은 해외살이에 어째서 아직도 이렇지?
그래도 돌아 돌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해결해나가다 보면 의연해질거다. 주눅 들면 사람들에게 말하자. 위로해 줄 거다. 이탈리아는 그래도 이방인의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곳이잖아. 급하면 놓치지. 한 발 한 발 너무 늦는 것 같고 이 과정들이 내 능력에 부대껴 부담스럽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고 있음에 감사하자.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전화 개통 하나에도 이해 못할 내용들 투성이였다. 성인 되어 처음 접하는 일 , 부모가 되어 알게 된 낯선 일, 결국은 타국이라 힘든 게 아니다. 어른이 되어 겪는 모든 일들이 낯설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살아온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살고 있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새로 겪는 모든 일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서툰 거다. 당연한 거다. 급할 거 없다. 그냥 마음만 급할 뿐이다.
손을 잡고 걷던 아이가 멈췄다.
_엄마 우리 저기서 달콤하고 시원한 거 마실까?
아이들과 자주 가는 카페 그늘에 앉았다.
엄마, 좋지?
난 나와서 먹으니 상큼하고 좋아.
그래, 살면서 이런 일이 왜 또 없겠는가? 그럴 땐 이렇게 시원한 그늘에 앉아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잔뜩 넣어 마신 뒤 심호흡하고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되는 거다. 그러면 주눅 든 마음도 금세 상큼하고 좋아질 거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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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혹은 목요일 원고 발행됩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아이 방학과 함께 쉽지 않습니다. 주 1회 글쓰기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