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25
기나긴 여름 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 개학을 보름 앞두고 학부모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공립학교로 발령이 나면서 새 학기에는 새로운 선생님이 올 거라는 학교의 공문이었다.
이탈리아는 3년의 유치원 기간 동안 (몇몇의 사립 학교를 제외하고)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동일하다. 이건초등학교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5년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세상 어디에서나 선생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특별하지만 이탈리아의 이런 시스템 속에서 아이와 선생님의 관계는 특히나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어쩌면 부모만큼 오래 가까이에서 부대끼는 존재가 되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깊다. (물론, 아이가 선생과 맞지 않아 학교를 옮기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
이안이의 유치원은 사립인데 선생님이 공립으로 발령이 나면서 (급여의 부분은 잘 모르지만 복지, 휴가, 연금 부분에선 공립이 조건이 더 좋다고 한다.) 피치 못하게 담임선생님이 바뀌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발령을 받아 아이들과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학교를 옮겨야 하는 선생님도 엄마들도 많이 당혹스럽다. 2년간 함께한 선생님이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바뀌게 된 거다.
익숙할 데로 익숙해진 아이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의 목소리가 높았다. 한 엄마는 아이가 안쓰러워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바뀌고 내년에 초등학교를 가면 또 새로운 선생을 만나야 하는데 아이들이 감당하겠냐는 거다. 한 엄마는 어차피 새 학년이 시작하니 기존 학교에 있던 다른 선생님을 아이들 담임으로 학교에 요구해보자 그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래도 안면이 있으니 충격이 덜하지 않겠냐 했다. 여하튼 하루에도 수십 통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갖가지 우려, 다양한 의견들 엄마들은 거침없이 솓아냈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연말 선생님 선물을 정할 때도 여름방학 전 가족들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정할 때도 학교에 모기가 많다고 방역을 요구할 때도 아주 사소한 것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냄에 조금의 망설 임도 없다.
엄마 이전의 나의 삶 속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두 한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인연들은 한국 이탈리아 국제커플이었고 가이드일을 할 때도 한국사람들과 일해본 이탈리아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아이가 학교를 가고 이탈리아에서 학보모가 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진짜 이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학부모 단톡방에서 엄청난 의견의 홍수를 만났을 때의 기분은 어색함을 넘은 불편함이었다.
한국에서 학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한국의 엄마들은 어떤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학창 시절 대부분의 결정은 대표인 누군가가 정하고 따르는 것에 익숙했다. 로마 한글학교에서도 선생님의 선물을 준비하는 경우 반 대표 엄마가 알아서 구입하고 얼마씩 돈을 내시면 됩니다.라고 알려주는 식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엄마들은 선물 내용, 금액까지 세상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수백 통의 메시지가 며칠을 오고 가고서야 결론에 이르렀다. 그 대다수의 과정에서 난 수백 통의 메시지는 흘려보내고 마지막 결정에 오케이 이모티콘을 남기는 것이 편했다.
처음에는 대화에 껴보기도 하고 슬쩍 조심스럽게 농담을 날려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미묘하게 내가 겉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별로 정서적이 코드가 있을 텐데 그걸 맞추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서 엄마들 사이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아이의 인종차별사건이 있었을 때이다. (작년 유치원 연말 공연에서 이안이에게 중국인 역할을 주면서 율동으로 눈을 찢는 동작을 하라고 한 사건이 있었다.)
참고: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10
[절대 쓰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https://brunch.co.kr/@mamaian/11
언제나처럼 당연히 다양한 의견들이 오갈 줄 알았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탈리아 엄마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나와 같은 몇몇의 외국인 엄마 아빠를 제외하고 모든 이탈리아 엄마들은 선생이 아니라 마치 이탈리아 사람 전체를 대변이라고 하는 듯 절대 인종차별의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옹호했다.
그 동작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냥 마음이 아팠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그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구나, 아무리 부대끼며 지내도 어차피 우린 이들에게 이방인이구나 라고 느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항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구나.
그래, 엄마들에게 정 주지 말아야지. 건조하게 대할 거야.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딱히 정을 준 적도 없으면서 적극적이고 살갑게 다가간 것도 아니면서) 그 뒤 단톡 방에 수많은 메시지들이 올라올 때면 참여하려 노력하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사건 이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면서)
몇 달이 지났다. 연말 공연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고 계절이 바뀐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 단톡 방에 선생님이 글을 남겼다.
이틀 전,
N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아이들에겐 아직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N의 아빠는 이탈리아 사람, 엄마는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이안이 반에는 A의 일본인 엄마, N의 우크라이나인 엄마 L의 캐나다인 엄마 그리고 나, 넷이 외국인 엄마다. 자연스럽게 우린 학교 행사 때면 같이 앉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에도 난 그녀의 남편이 오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다른 이탈리아 엄마들은 꽤 알고 있었고 작고 크게 도움도 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도움을 청했을 거다. 아이들의 생일파티에서 N의 엄마가 다소 심각하게 다른 엄마, 아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난 내가 낄 이야기가 아니겠지 굳이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글이 올라오자마자 반대표 엄마가 화환을 준비하고 돈을 모았다. 장례일정이 나오고 시간이 되는 엄마 아빠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장례식엔 20명 남짓을 사람들이 있었다. 조용하고 소박한 마지막이었다. 고요한 성당을 채운 이들 중 반 이상이 반 엄마 아빠였다. 눈이 붉어져 눈물을 참는 그녀를 안아주며 다 함께 울었다. 남편의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그녀의 손을 잡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어린 시절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그저 설레고 꿈같은 모습이었다. 타지에서 희로애락을 겪는다는 것, 슬픔도 기쁨도 그곳이 외국이라는 것 만으로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삶의 뿌리는 내린다는 것은 생로병사를 감당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나나 일본 엄마가 아닌 이탈리아 엄마들에게 그녀의 사정을 이야기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 가장 도움될 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장례를 마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냥 그녀를 안아주었다. 뭐든 힘들고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장 화환을 준비하는 것조차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모른다.
다른 엄마들은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우리가 언제나 여기 있는 거 알지? 어떤 일이든 어려워 말고 무조건 이야기해야 해. 알겠지?
장례를 마치고 N의 엄마를 제외하고 엄마와 아빠들끼리 새로운 단톡 방이 형성됐다. 긴 투병생활 부부의 벌이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의 유치원 생활이 한해만 남았는데. N이 마지막까지 아이들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마지막 학년 학비는 우리가 함께 돈을 모아서 내면 어떨까?라는 것이었다. N의 엄마에겐 비밀로 하고 학교 측에서 배려하는 것으로 하자.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안의 연말 공연사건 때 이탈리아 엄마들이 말하고 싶었던 요지는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는 게 아니었을 거다. 우리가(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런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니 마음을 풀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을 거다. 자신들을 이해주길 바란 것이지 적어도 내가 느꼈던 감정을 외면하려 한 것은 아닌 거라고 믿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한 무지함은 있어도 혐오는 없다고 믿고 있다.
한국에서 내가 아이를 키운다고 가정한다면 같은 반 외국인 엄마가 같은 이유로 불쾌감을 가질 때 나 역시도 한국사람의 편에서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을까? 나의 일처럼 함께 분노해 줄 수 있을지 솔직하게 장담하지 못하겠다.
단톡 방은 또 불이 난다. 선생님의 발령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며칠 동안 단톡 방의 주제는 선생님과의 마지막 식사 날짜를 정하는 거였다. 수백 통의 의견이 오고 가고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으니 이젠 어떤 식당으로 할지 정할 일이 남았다. 다시 수백 통의 메시지 알람이 울릴 일이 남았다.
어린이집을 거처 유치원 2년이 지났을 뿐이다. 앞으로 남은 유치원 1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총 14년 둘째까지 생각하면 14년 이상의 시간 동안 수 없이 겪을 일이다. 불편하고 어색하다고 뒷짐 지고 한발 떨어져만 있을 수는 없다.
비록 지금껏 나의 삶에 비추어 익숙하지 않기에 불편했지만 한편으론 나의 아이들이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며 작고 큰 일들 앞에 솔직하고 가감 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드러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이참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본다면 좋겠다.
최근 읽은 글이다.
이것 때문에 이탈리아인과 외국인의 관계가 복잡해지기도 한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만난 외국 특파원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특파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는 이탈리아인이 북유럽인. 북미인을 바라보는 시작이 유럽인. 미국인이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다고 확신했다.
“동남아시아인이나 동아시아인이 우리를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우리는 감정이 결여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불가사의’하다고 치부합니다.” 그가 말했다. “이탈리아인이 바로 우리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놀람, 실망, 짜증의 감정 표현이 이탈리아인만큼 명확하지 않아서 우리의 의도가 이탈리아인에게 도저치 ‘포착되지 않는’ 겁니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자유롭게 성질을 내는 능력을 익히게 된다. 목청을 높이고 몸동작을 점점 크게 하노라면 이따금 상대방의 얼굴에서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과 함께 거의 유쾌한 놀라움이 뒤섞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 순간 내가 문헌학이나 의미론과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갑자기 저들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존 후퍼,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 :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 2017, 도서출판 마티
어쩌면 나만 그들의 거침없음에 불편하고 긴장하고 있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엄마들도 내가 쉽지 않았을 거다. 심지어 한국사람을 태어나 처음 만나본 엄마도 있었다. 다른 엄마들도 내가 어려웠겠다 생각하면 지난 시간 엄마들의 관계와 적응 속에서 헤매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조금은 덜 억울하다. (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르지만, 신경 쓰고 있었을 거야~ 하고 생각할 거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어, 이런 마음이 들자 이상하게 평온해졌다. 그들이 나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준다면 좋겠지만 그걸 기대하기보다 가장 편한 방법은 내가 다가가는 거다.
분명 그들이 날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더 쉬울 거다. 내가 밝고 유쾌한 사람으로 보인다면 그들에겐 한국인 자체의 이미지로 대변될 테니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의미를 부여해 보자.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선생님 발령 건에 우려하던 엄마들 사이에 F의 엄마가 글을 올렸다.
저는 아이들이 "바로 여기, 현재"에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이들은 그 순간, 그 장소에 바로 적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부모들의 생각이 아닐까요?
아이들은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같은 학교 친구, 같은 선생님(담임 선생님을 제외한)과 같은 보조 선생님입니다.
분명히 아이들은 카를라(담임선생님)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딸에게 이 일이 정말 심각한 트라우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분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이 헤어짐이 선생님의 건강상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놓아 줌"을 아이들에게 가르 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들 모두 평온해 보입니다.
우리 부부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선생님을 신뢰합니다.
글을 읽는데 유난스러워 보이던 이탈리아 엄마들에 대한 마음이 녹아내렸다. 엄마들은 그래, 우리 아이들은 강하니까 아이들과 학교를 믿자고 답했다. 나도 짧게 마지막 학년에 심지어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이니 더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실 거라고 믿는다. 글을 남겼다. 처음으로 엄마들에게 더 다가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동료 가이드가 물리치료 정보를 물어와 엄마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단톡 방에 로마의 좋은 물리치료사를 알려줄 수 있느냐 남겼더니 엄청나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심지어 학부모 중 물리치료사가 있어 바로 동료 가이드에게 연락할 테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어쩌면 이들은 먼저 이야기해주고 다가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안녕! 엄마, 저 친구 나랑 같은 학교야. 그냥 봐도 이안이 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오고 가다 마주쳤나 보다. 아이가 저기 학교 다녀요? 네, 같은 학교네요. 이안이 친구야? 응! 학교에서 봤어 그런데 이름은 몰라!
잠시 후 아이가 또 인사했다. 안녕! 엄마, 얘도 아는 친구야. 이번 엄마는 나도 안면이 있다. 유치원을 데려다 줄 때마다 매번 마주쳐 눈인사를 나누던 엄마였다. 이안이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그러자 그 엄마가 먼저 나의 이름을 물었다. 나도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신기하다 싶을 만큼 망설임 없이 다가간다. 또래보다 어휘력에 선 살짝 부족해도 별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말한다. 여느 이탈리아 사람들보다도 말이 많다. 인사를 하고 나이를 말하고 이름을 말한다. 자신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면 꼭 스펠링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이토록 유쾌한 이탈리아 말을 하는 한국 아이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어쩜 이 아이는 누가 알려주지 않았을 텐데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을 어떻게 저리 잘 알고 있을까? 그 방법은 아주 쉽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먼저 웃으며 인사하면 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알던 모르던 상관없다. 그냥 눈 마주치고 웃고 인사하면 예외 없이 다 웃고 인사한다.
여름 방학은 끝이 났다. 매일 아침 이탈리아 엄마들 아빠들과 만나는 일상의 시작이다. 난 아이와 걸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가장 크게 가장 밝게 인사한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모르는 그들이 우리를 알고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 우리가 이 동네 그리고 이 학교의 유일의 한국인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사에 웃으며 응답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다들 우리랑 인사하고 싶었던 거야.
개학 첫날 엄마들 단톡 방에 끊임없이 알람이 울렸다. 기나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엄마들의 기쁨의 이모티 콘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나도 폭죽을 터트리는 이모티콘을 올리며 Festa della mamma (엄마들의 축제날)이라고 남겼다. 거봐, 어려울 것 없어. 엄마의 마음은 어디에나 다 똑같은 걸.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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