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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Oct 23. 2018

과부하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28

갑자기는 아니었다. 과부하가 오고 있다고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여름 방학은 끝이 났고, 드디어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갔다. 새 학기 시작과 동시에 끊임없이 학부모 단톡 방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여름 내 멈추어 있던 업무들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과 부대끼는 것이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걱정거리는 오직 오늘 뭐 먹지? 였다. 여름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가면서 부대낌은 줄어들었지만 현실로 돌아온 일상은 매 순간 다음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했다.


이탈리아가 일처리가 늦어 느긋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 처리가 늦고 그 과정이 복잡하니 결국은 일 년 내내  끊임없이 처리할 일들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돌아가면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일치감치 무너졌다. 이탈리아는 9월이 학기의 시작인데 6월부터 여름방학이니 3월에는 새 학교 접수가 마무리된다. 이른 곳은 11월부터 접수를 시작을 한다. 6월에 시작한 여름방학이 9월 중순이 되어서야 끝이나 이제야 한 숨 돌리나 했더니 바로 다음 학년을 준비해야 하는 거다.


새 학기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벌써 11월이 코 앞이다. 작고 큰 일들을 처리하고 그 사이사이 쪼개어 내 시간을 확보해야 하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 보고 늦은 점심을 먹고 정신을 차려보면 금세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다.


 남편은 무조건적으로 날 지지하며 휴일은 온통 가족을 위해 시간을 보내지만 주 4일을 밖에서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집안의 모든 일에 있어 정보를 얻고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우리 둘 뿐일 때는 문제없었다. 아이가 하나일 때도 나름 괜찮았다. 아이가 둘이 되고 우리의 이탈리아의 삶의 모습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만큼 신경 쓸 일들이 두껍게 쌓여갔다.


혼자 일 때도 나름 적극적으로 이 곳에서의 삶에 임했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첫 애를 낳고 더 깊게 이 곳의 삶으로 발을 내딛으며 가족이 되고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순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즐거웠고 신났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만 둘째를 낳고 두 아이가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혼자라면 적당히 알아듣는 척, 어려우면 무시하고, 불편하면 잘라내고, 힘들면 미뤄왔던 수많은 상황, 인간관계, 문제들을 엄마가 되면서 마주 보고 부딪히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시작이었음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아니다, 여기는 고등학교는 서바이벌이니까 고등학교는 빼자.) 적어도 10년 가까이는 나의 삶의 대부분이 우리 네 가족의 이탈리아 삶의 대다수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순간이 될 거라는 것을 말이다.


체류, 학교, 집, 차, 세금, 의료, 학부모 회의, 반상회, 관공서, 서류, 여름방학, 학원, 문화생활, 한글학교. 부부 중 한 명이 현지인이라면 조금은 수월했을까? 매 순간 기적이라고 할 만큼 고마운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지만 결국 마무리는 나의 몫이었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끊임없이 고려하며 보내야 할 앞으로의 시간이 버거워졌다.


개학을 하고 여유로울 줄 알았던 일상이 예상과 다르게 펼쳐지자 과부하가 걸렸다. 그렇게 며칠을 멍 하게 지냈다. 언제나 씩씩한 나였는데 이번엔 바닥을 친 자신감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누구에게 하소연 하기엔 나조차 이 마음의 형체를 종 잡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려는 아이를 굳이 곁에 눕혀 상담을 시도했다.


_이안, 엄마는 종일 마음이 좀 그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_마음이 아파? 그러면 이렇게, 크게 숨을 세 번 쉬어 봐. 그리고 내일 아침엔 학교에 가지 마. 아빠 보고 데려다 달라고 할게. 엄마는 집에서 5분 쉬어봐. 휴대폰으로 5분 맞추고. 아! 두 번 해서 10분 맞추고 좀 쉬어. 그런데 그 이야기하려고 나보고 옆에 누우라고 한 거야? 이제 됐어? 나 자러 가도 돼?
_이안, 잠깐만! 그럼 이안이는 마음이 아플 때 어떻게 해? 학교에서 그럴 수도 있잖아.


아플 때 있지.
그런데 안 아플 때도 있어.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그래.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그런 거라고 5살도 아는 것을,  그 마음먹기가 이렇게 애가 쓰인다.


아이는 나보다 더 어른스럽고 의젓하다. 어느덧 아이는 내 고민을 털어놓는 존재까지 자라있었다.


며칠 뒤, 로마 여성회에서 뜨개질 수업이 있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뜨개질 수업으로 향했다. 잡생각을 좀 떨쳐보자는 마음이었다. 한국 식품점 2층의 작은 다락방이었다.


어두운 계단을 올라서자 작은 테이블에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난 로마 한글학교에서 공지를 보고 갔던 터라 내 나이 또래의 엄마들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곳에 계신 분들은 로마에 자리 잡은 지 평균 30넘이 훌쩍 넘는 원로(?) 들이셨다. 그분들 역시 어린(?) 내가 들어서자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옹기종기 앉아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배우는데 여기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는 나의 말에 한 분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_에휴 , 많이 힘들겠네.


예상하지 못했던 그 말이 마음으로 들어와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_나도 딸 둘을 키웠어. 다 알아. 많이 힘들지. 둘은… 힘들어.


곁에 앉아 있던 분이 나지막이 응수했다.


우린 알지.
우리도 그리 키웠으니.
힘든 거 우리는 알지.


처음 내 손을 잡아주신 어른께선 이 곳에서의 삶이 50년이 넘었다 하셨다.


_50년을 넘게 로마에서 살면서 한국을 한번 갔어. 그땐 그랬어. 그런데 어느 날 한국말이 안 나오더라고. 그래서 계속 책을 읽었어. 이만큼 한국말을 하게 된 건 다 책을 읽어서야. 모두들 책 많이 읽어. 책을 읽는 건 정말 중요한 거야.


둘러앉아 뜨개질을 하는 동안 마치 라디오 극장처럼 제목이 기억나지 않으신다는 영국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다들 눈은 뜨개질에 향하면서도 이야기에 웃고 놀라고 어린아이들처럼 다음 전개를 재촉했다. 한 분이 어머, 너무 좋아. 학생 때 같아. 하며 웃었다. 또 다른 분이 어쩜 코가 하나 빠졌네, 하고 속상해하자 옆에서 그거 구멍 생기게 하는 게 어려운 기술인데 대단하시네 하며 한바탕 웃었다.


구멍도 생기고,
헐렁하기도 하고,
너무 빡빡한 거 같아도,
길게 뜨면 다 예뻐요.


뜨개질 선생님의 그 말이 힘들고 어려워도 지나면 다 예쁜 시간이에요,라고 들렸다.

 

뭔가 홀가분해졌다. 분명 또 과부하가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가벼워졌다.

내가 살아온 생보다 더 긴 시간을 로마에서 살아온 이가 힘든 거 알고 있어 라며 건넨 위로에, 내가 로마에서 산 시간의 반도 살지 않은 아들이 아프다가 안 아프다 그런 거야 라며 무심히 던진 위로에, 마치 뜨개질 중간에 생긴 못생긴 구멍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마침내 예쁜 시간을 만들어 나갈 용기가 다시 생겼다.


뜨개질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남편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있다. 아등바등 지내는 내 곁에서 그 누구보다 안쓰러워하며 미안해했을 그다. 그래, 그래, 하고 듣고 있던 그가 집에서 봐, 하고 전화를 끊는데 그 말이 마치 이제 좀 편해진 것 같아 마음이 놓여. 라고 하는 듯했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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