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내 딛었다
엄마, 내가 오늘 **했는데 이겼어. 응? 그게 뭔데? 엄마 알잖아. 엄마는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말해주면 안 돼. 안 말해줄 거야! 엄마 알면서 아는데 왜 모른다고 해?! 엄마는 어른이잖아 다 알아야지! 안 말해줄 거야.
아이가 유치원에서 게임을 했는데 이겼다. 아이는 나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서는 그게 어떤 게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 유치원에서 하는 게임을 내가 어떻게 다 알 수가 있나?
아이는 최근 모른다고 하는 엄마에게 부쩍 화를 낸다. 어른은 다 알아야지! 알면서 왜 모른다고 해? 아이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은연중에 엄마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아이에게 내가 참 크구나. 나에게 많이 기대고 의지하는구나. 그런 내가 흔들리고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에겐 많이 불안하고 두려운 거구나. 말해주지 않을 거야! 토라진 아이의 등을 보며 나의 무게를 느낀다.
아이의 등을 보며 떠오른 기억, 공항이었다. 로마에 여행을 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 옆에는 외국인 가족이 앉아있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누군가 다가왔고 그는 아이와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초등학생 정도, 나의 아이와 크게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말로 이야기를 마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의 나라의 언어로 내용을 전했다. 아이는 여기서 태어나 자란 아이인 듯 이탈리아 말에 능숙했다.
아이는 아이의 몸을 하고 어른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불안을 담은 어린아이의 눈을 하고 자신의 아이가 들려주는 말에 집중했다. 마치 마법에 걸려 엄마와 아이의 영혼이 바뀐 듯.
문제가 해결되었나 보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은 어른의 눈을 한 아이 때문이었을까 아이의 눈을 한 엄마 때문이었을까?
유치원에서 12 색깔 사인펜과 연필을 거의 다 써가니 새것을 준비해달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한 엄마가 자기 아빠가 사인펜 공장을 한다고 이번에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사인펜이 바로 해결됐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다시 연필이 아직 준비가 안 된 아이가 있으니 연필을 준비해 오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사인펜이 해결되면서 끝난 줄 알았지 연필은 따로 준비해야 하는 줄 몰랐다.
Le matite라고 연필을 복수로 써놨길래 당연히 이번에도 12색 색연필이겠지 하고 사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2색 맞아? 하고 단톡 방에 물었다. 그러자 아니, 까만색 하나만 필요한 거야 하고 답이 올라왔다. 그리고 내 개인 톡으로 한 엄마가 이런 거 말하는 거야, 하고서 일하다 사진을 찍어보네 준거다.
못 알아들으면 부끄러워서 궁금해도 묻는 게 부끄러워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한 척, 숨기고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이 정도에요 많이 부족해요 나 잘 몰라요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나 못 알아듣겠어요 좀 천천히 말해주세요. 입 밖으로 내뱉으니 사람들은 그래 넌, 외국인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우리가 더 천천히 자세하게 설명해줄게. 그래도 모르겠다면 이렇게 보여줄게라고 다가왔다.
결국 날 부끄러워한 건 나였나? 하긴, 이탈리아 사람들이 물어보면 알려주길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해결을 해주길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날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 될 때면 이렇게 생각해본다. 내가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고 가정하고 한국에서 이탈리아 엄마가 아이를 키우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할까? 분명 나도 연필 사진을 찍어 보낼 거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할 거다.
모른다는 나에게 역정을 내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_이안, 엄마는 한국 사람이야. 엄마는 아기 때 한국에서 자랐어. 이안이는 이탈리아에서 학교를 다니지만 엄마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어. 그래서 이탈리아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다 알지 못해. 그리고 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아이였기 때문에 그때 놀았던 게 잘 기억이 안 나. 그래서 잘 모를 수 있어. 그러면 이안이가 엄마에게 알려주면 안 돼? 대신 엄마는 이안이도 선생님도 모르는 거 많이 알아! 저번에 한글학교에서 연 만들었던 기억나지? (3,1절 100주년 행사로 로마 한글학교에서 연마 들기를 했다.) 그때 연에 그렸던 게 뭔지 기억나? 맞아 태극기. 그게 우리나라 국기야. 그때 외쳤던 거 기억나? 대한독립만세. 아주 오래전, 한국을 일본이 빼앗아갔어. 일본은 우리가 우리말도 못하고 우리 이름도 못쓰게 했어. 그런데 3월 1일에 모두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쳤어. 우리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친 거야. 대단하지? 덕분에 이안이도 엄마도 이안이 말을 하고 이안이 이름을 쓸 수 있는 거야. 이안이 말이 없으면 터닝 메카드도 다이노 코어도 어떻게 보겠어? 대단한 거야. 그런데 이안, 그거 알아? 우리말을 만든 왕이 있어. 그 왕의 이름이 뭔지 알아? 이도야!!!! (이도는 둘째의 이름이다.)
_설마!!
_진짜야!!
_엄마, 내 이름은? 나 또 이야기 듣고 싶어. 또 해줘.
부족함을 고백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이에게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고백을 하자 용기가 생겼다. 나약함을 고백하는 용기.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용기. 혼자 애써서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 굳이 가득 채우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먹을 수 있는 용기
엄마라는 무게에, 사람들의 시선에, 부족함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는 법은 알지 못한다. 고백하는 법을 알았으니 한 발 내 딛었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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