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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ug 02. 2020

쓸모의 차원이 아닌, 인간과 관계 차원에서 사물을 보다

열 번째 시간- 『사물의 ;철학』(함돈균)

『교사 인문학』이라는 책을 읽다가 함돈균 교수의 강연 부분에서 그의 저서 『사물의 철학』을 알게 되었다. 제목도, 잠깐 소개된 내용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서 그 길로 바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질문으로 시작하여 사유로 깊어지는 인문학 수업’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프롤로그의 첫 문장이 ‘사물(事物)이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우리가 생활에서 너무나 흔하게 만나는 사물들을 쓸모의 차원이 아닌 인간과 삶의 의미를 포괄하는 ‘관계’의 매개물로서 설명하고 있다.      


총 88개의 일상적 사물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사고가 담겨 있다.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던 사물들로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사물 이야기 몇 개를 소개해 본다.

           



가로등

희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의 ‘양’이 아니라, 빛의 ‘방향’이다. 일반적으로 가로등은 가늘고 긴 몸통 위에 빛이 발산되는 머리가 밑으로 구부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즉 가장 전형적인 가로등은 빛의 얼굴을 한 어떤 존재가 마치 땅을 굽어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굽어보는 얼굴의 빛은 아래로, 그러니까 낮은 자리로 발산되며 가능한 제 주위를 평등하고 넓게 비추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리는 희망을 필요로 하는 삶의 절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가로등의 힘, 가로등의 희망은 그것이 발산하는 빛이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18쪽)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는 문장은 절박한 현실에서 아주 작은 희망을 보았을 때, 관용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문장이다. 저자는 여기서 ‘빛’이라는 것이 희망을 뜻한다면, 가로등의 형상과 희망을 연결해볼 것을 제안한다. 가로등의 불빛은 그 양의 차원보다, 방향의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가로등이 제가 서있는 자리보다 언제나 아래로 빛을 퍼트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로등 위는 어둡지만, 가로등 아래는 언제나 주변보다 환하기 마련이다. 제 몸을 굽혀 제 주변을 평등하게 비추는 가로등을 통해 본 ‘희망’, 누군가가 저보다 낮은 자리를 향해 제빛을 나누어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이다.


매일 밤이면 제 몸의 불을 켜 주변을 밝히는 가로등을 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었다. 가끔 기사를 통해 어려운 형편에 있는 분들이 더 어려운 곳에 써달라며 자신이 평생 모든 재산을 기부하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대체 그런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사는 분들인지 궁금했었다. 아마도 그런 분들이 바로 ‘가로등’ 같은 분들일 것이다. 언제나 제 아래로 빛을 비추는 가로등처럼 자신보다 더 어렵고 절박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빛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희망’이다. 희망의 빛은 ‘양’의 차원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사실, 마음에 새기고 싶은 문장이었다.  



골대   

그러나 내가 요즘 눈여겨보는 것은 자기편-상대편 골대 위치가 전반전이 지나 후반전이 되면 ‘정반대 방향’으로 바뀐다는 새삼스럽고 간단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올인을 요구하는 어떤 ‘목표(goal)’가 있다면 한 번쯤 다시 살펴볼 일이다. 가능한 재원을 다 쏟아붓고 오직 그것만이 목표인 듯이 돌진하는 삶들이 있다면 잠깐 멈춰볼 일이다.
방향은 실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일 수도 있다.(35쪽)       


마지막 한 문장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나는 어떤 목표가 생기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는 성향의 사람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목표가 정해지면 시간과 체력, 정신력을 모두 한곳에 집중하여 올인하는 것을 스스로 장점이자 강점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다 중간에 힘이 빠지기도 하고, 맥이 풀리기도 했지만 목표의 방향이 완전히 잘못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전반, 후반 골대의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는 축구 경기를 통해 저자가 보여준 철학적 사고는 ‘골대의 방향’부터 다시 점검하기를,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맞다. 방향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일 수도 있는 거다.           



마스크

분자생물학의 한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숙주로 삼아 개체변이를 거듭하는 미세 존재들인 ‘바이러스’다. 마스크는 지구에 인간의 눈으로 포착되지 않는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들의 세계가 상존함을 환기한다. 실체가 확인되지는 않으나 ‘존재(하는 것)’의 기습에 의해 촉발되는 기분을 어떤 철학자는 ‘불안’이라고 불렀다.(79쪽)

     

“마스크 쓰고 나가야지!” 요즘 내가 아이들에게 가장 자주 외치는 말 중 하나다. 살면서 이토록 입과 코를 막는 데 병적으로 집착한 적이 있었을까. 신종 플루가 유행했을 때도, 메르스가 유행했을 때도 어찌 된 일이었는지 그때 나는 그런 바이러스들에 매우 무감했다. 당시에 감염된 환자들의 치사율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처럼 잠깐의 외출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날들은 없었다. 그것은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의 전염성이 너무나 강하고, 팬데믹이 선포될 정도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는 이 바이러스의 직격탄을 맞아 수천 명이 감염된 도시이기도 한 데다, 아주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이다 보니 ‘불안’의 강도가 높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 무더위에 잠깐도 벗어던질 용기조차 나지 않는, ‘마스크’라는 존재는 어쩌면 나의 ‘불안’을 드러내는 사물일지도 모르나, 지금으로써는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유일한 사물이기도 하다.          



손수건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던 오래전 어느 날, 한 친구가 손수건을 건네던 순간이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의 흔적이 밴 손수건에 내 눈물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내 눈물은 휴지로 버려지지 않고, 이 사물을 통해 그에게 다시 건네 졌다. 세탁하더라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타인의 흔적에는 다시 그의 몸의 흔적이 밸 것이다. ‘공감(empathy)’이라는 말은 한 감정 속으로 다른 한 감정이 ‘배어들어’ 간다는 뜻에서 나왔다. (151쪽)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키우면서부터였다. 아이들은 자주 침을 흘렸고, 콧물을 흘렸다. 언제나 그 흔적을 닦아낼 사물이 필요했으므로 파우치 안에는 항상 깨끗이 빨아서 말린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나에게 손수건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마음이었다. 저자는 손수건에서 ‘공감’이라는 감정을 읽어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나름의 서글픔과 속상함을 잔뜩 실어 눈물과 콧물을 쏟아낼 때도 나는 항상 깨끗이 빨아진 손수건으로 그것을 닦아내주었다. 그리고 꼭 안아주었다. 아이들에게 나의 ‘공감’이 잘 전해졌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 사물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사유는 서너 쪽을 넘지 않는다. 철학적 사유를 담은 책이지만, 읽기에 부담스럽거나 힘든 부분도 거의 없다. 오히려 일상적 사물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더 재밌게 읽기 위해서는 목차를 보며 그 사물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먼저 써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철학적 사유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그저 그 사물의 쓸모보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나름대로 한 번 생각해본 뒤 글을 읽어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책을 덮으며, 주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사물들을 바라본다. 사물마다 의미를 담아 바라보니 어떤 사물도 의미 없는 사물이 없다. 책의 힘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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