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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ug 11. 2020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마냥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열세 번째 시간-『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 황선우)

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진중하지만 무겁지 않은 두 여자의 동거 이야기였다. 40대에 들어선 두 여자는 자신들이 하는 일에서 일정 이상의 커리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만큼 경제적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비혼주의자라기보다는 현재의 ‘독신’ 생활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커리어우먼들이다. 결혼을 하지 못해 둘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기간 혼자 살아온 삶에 지쳐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기존에 ‘가족’이라 명명되는 가족 형태와 전혀 다른, 새로운 가족 형태를 보여준다. 저자들은 자신들이 꾸린 가족 형태를 ‘조립식’이라고 표현했다. ‘조립식 가구’를 떠올려 보면, 각각의 부품들이 제 역할을 하면서 서로 제자리에 맞게 탁하고 맞춰졌을 때 전혀 새로운 모습의 가구로 재탄생한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던 두 자아가 만나, 서로 탁하고 아귀를 맞추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냈다.          




올해로 결혼 생활 5년 차, 부부싸움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나와 너무 다른 신랑을 보며 실망하고 때론 절망하던 때에 이 책을 만났다. 제목만 봐도 그저 행복할 것 같았다. 마음 맞는 동성 친구와 둘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발상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가까운 동생 한 명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하는 이야기가 “야, 다음 생애는 우리 둘이 살자. 결혼 같은 건 절대 하지 말고 그냥 우리 둘이서 재밌게 살자.”다.(그 동생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네 살 난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 우리의 로망을 현실화한 이야기라니! 읽기 전부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녀들의 삶이 얼마나 즐거울지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면서는 전혀 다른 생각과 마주해야 했다.

      

누구와 살든,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두 여자는 참으로 닮았다. 나이도 6개월 차이로 거의 비슷했고, 고향도, 고향에서 살았던 동네도, 좋아하는 음악도, 술을 좋아하는 기호도 너무나 닮은 점이 많았다. 그녀들은 서로의 닮은 점들을 확인하며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살면 그저 좋을 것 같다고 상상했다. 물론 같은 집에 살기 전부터도 서로의 차이점을 일정 부분 알고 있었지만(한 사람은 정리왕, 한 사람은 파괴지왕과 같은) 그것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두 여자는 참으로 달랐다. 한 사람은 버리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 한 사람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지 않는 미니멀리스트였다. 한 사람은 싸워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사람, 한 사람은 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서로의 비슷함을 발견하고 놀라워했지만 이후 서로의 다름을 깨달으며 더 크게  놀라게 되었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것도 매일매일 끝없이 들고 나는 파도처럼 이어질 ‘생활습관’이라는 거대한 영역에서.
각자가 40년에 걸쳐 쌓아 온 생활습관이란 결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 옳다는 답도 없고, 여러 개의 조항을 지키기로 합의한다고 해서 해결이 나는 것도 아니다. (109쪽)     

같이 살겠다고 해놓고 보니 우리는 모든 게 달랐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의 양과 너에게 적절한 물건의 양이, 집 안이 덜 정돈되었을 때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여행 가기 전날 집 정리에 투입하는 노력의 강도가 같지 않았다. 그 세세한 차이 하나하나가 다툼의 거리가 되기 시작하자 내가 서 있는 여기와 네가 서 있는 저기 사이에 굴러 떨어져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우리는 싸우는 방식 때문에 더 싸웠다. 나는 모로 피해 얼음 벽을 치는 사람이고, 김하나는 정면으로 불화살을 쏘아대는 사람이다. (113쪽)          



부부 사이와 다를 게 없었다. 나와 신랑도 생활습관 하나하나까지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서로를 수직선 양 끝에 닿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도리어 우리 부부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이제껏 부부 사이의 거리가 자꾸만 넓어지는 것 같은 마음에 괴로울 때면, ‘내가 왜 이런 결혼을 해서 고생을 하나, 내 마음과 꼭 맞는 친구랑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었다. 그러나 그랬다고 한들 지금 우리 부부 사이에 놓인 것과 같은, 사소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누구든 자신과 다른 타인과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대상이 남편이든, 아내든, 친구든, 심지어 형제자매나 부모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 타인과 생활방식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참으로 현명하게, 또 성숙하게 눈앞에 놓인 문제들을 하나씩 마주하며 잘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은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115쪽)          



그녀들의 삶이 참으로 좋아 보였던 것은 그녀들은 ‘혼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글 곳곳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기의 세계에 전혀 다른 누군가를 들이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살아낼 힘이 있었다.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의 미혼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결혼은 언제 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결혼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스스로 아무리 괜찮다 생각해도, 주변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질문들을 들으면 정말로 자신이 괜찮은 건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순간이 온다. 나의 삼십 대 초반도 그랬다. 감사하게도 우리 엄마는 그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직장 선배들은 그렇게도 나의 결혼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의 신랑을 만나 연애를 한 것이 딱 서른둘이었다. 신랑과 결혼을 결심한 것에는 물론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이 가장 큰 이유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라 불리는 나이였고 결혼을 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고 있었으니 ‘당연히’ 이제는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와 신랑은 둘 다 미성숙했고,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는 일조차 버겁던 때였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고 한 공간과 같은 시간을 온전히 나누어가며 살게 되었으니, 우리 두 사람의 전쟁 같은 신혼생활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불행의 구덩이를 팠다고 생각했고, 신랑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면서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안녕을 살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시간을 건너온 나로서는 그녀들의 성숙한 동거가 마냥 부러웠다.     



누군가와 함께 살면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나와 상대의 다른 점이 더 또렷하게, 자주 콘트라스트를 이루므로, 그 다른 점을 흥미롭게 여기고 나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겠다. 나에 대해 깨닫고 나자 오히려 동거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다. 우리가 세상을 똑같이 지각하는 게 아님을, 애초에 당신과 나의 세상이 다름을 알게 되었으므로.(180쪽)      


그렇다. 생각해보면 신랑과 살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은 부부 관계를 개선하는 데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무엇에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은 신랑과의 극명한 차이점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결혼 생활도 일정 부분 평화의 시기를 맞이했다.(지금은 육아라는 새로운 미션을 받아 다시 전쟁 같은 나날들이긴 하다만.)  

        



책에는 두 사람 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종종 등장하는데, 서로의 가족과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게는 번외 편처럼 느껴진 에피소드들이었지만, 그중에 인상 깊은 내용들이 있었다.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 아닐까? 관습과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려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이 나리 모든 며느리, 사위, 장인, 장모, 시부모들에게도 원래의 마음은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왜곡 없이 이 원래의 마음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열무김치와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먹는 우리가 역시 위너인 것 같다.(233쪽)     


그녀들은 서로의 가족에게 ‘의무감’이 없다. 그저 좋은 마음, ‘호의’만 있을 뿐이다. 그건 그녀들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사실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 간에도 충분히 가능한 마음이다. 내 자식과 함께 사는 며느리, 사위는 내 자식의 평생 친구이다. 그러니 그저 고맙고 좋을 수 있는 관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관계를 맺기가 참 어렵다. 호의보다 의무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일까. 그녀들이 서로의 가족과 맺고 있는 건강한 관계가,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에서는 왜 불가능한 건지, 곱씹어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 집 여섯 식구는 외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망원동에서 엮어가는 호의적이고 느슨한 연결망 속에 W2C4라는 하나의 모듈로 서 있다.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끔 얼굴을 보는 친척들보다 더 친근하고 반갑다. 그리고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끌어주고 챙기는 것보다 더 담백하고 따뜻하다. (264쪽)     


그녀들이 터를 잡은 망원동에는 그녀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들이 있다. 고작 55세대인 작은 아파트에만 세 식구가 있고, 근처 술집, 단골 카페 등의 사장님들과도 이웃으로 지낸다. 그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그들의 끈끈하면서도 느슨한 연대가 참 부러웠다. 자주 보지 못하는 핏줄보다 더 친근하고 반가운 이웃이 있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느낌이 들만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살아갈수록 손 닿는 곳에 나와 마음 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끼게 되는데, 현실에서는 그런 이웃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아이가 커가면서 나의 연대는 주로 아이의 친구 엄마들로 확장된다. 그러나 나에게서부터 출발한 관계가 아니다 보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그녀들처럼 손 닿는 곳에, 갓 해낸 온기 가득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필요를 부담 없이 채워줄 수 있는 소중한 이웃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이웃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삶은 기대와 달리 아주 현실적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낭만적이기도 했다. 제도에 묶이지 않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의 형태는 자유로웠지만 나름의 규칙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아주 성숙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의 삶이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지면서도, 한편 영 딴나라 이야기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싶다가도 '우리 부부는 왜 그녀들처럼 살지 못할까' 싶기도 했다. 가볍게 읽었지만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던 건 비슷한 삶에 모습에서도 묘한 괴리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저자인 김하나 님과 황선우 님께 죄송하지만, 처음에는 그냥 아주 가벼운 에세이일 거라고, 그저 두 여자가 재밌게 살아가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펜 한 자루 쥐지 않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내 형광펜을 찾아내 에피소드마다 몇 문장씩, 때론 한 문단 전체를 밑줄 그어 가며 읽었다.


주변에서 결혼을 종용하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인생 미션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이 버거운 사람들에게,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나와 너무도 다른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이 지친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생각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만 달리 보면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나처럼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마냥, 그저 낭만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자신 곁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갈 것인지를 새롭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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