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Aug 17. 2020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열네 번째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정여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여기서 말하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만 알고, 자신의 행복만을 중요시하는 이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 즉 자존감을 말하는 것이다. 콤플렉스, 트라우마, 스트레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번아웃 등의 말들이 유행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울림이 있을 만한 책을 만났다.      


1.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2.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당신까지도
3. 마음의 안부를 물을 시간이 필요하다
4. 슬픔에 빠진 나를 가장 따스하게 안아주기

     

이렇게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과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러 심리학적 용어들과 이론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는 저자의 열망대로 저자는 이론적인 치유의 길을 제시하기보다는 스스로가 겪은 수많은 상처들을 담담히 고백하고 그것을 통해 저자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 과정을 고스란히 밝히고 있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동안 나 스스로 내면의 상처를 돌아보고, ‘나의 내면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자존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다. 책을 읽다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나는 언제나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던가?’ 답은 ‘아니다’였다.


콤플렉스나 트라우마와의 대면이 아픈 일만은 아니다. 마침내 나의 그림자와 만난다는 것, 그것은 평생 달의 앞면만 보던 삶을 뛰어넘어 달의 뒷면까지 탐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전체성과 만나 마침내 더 빛나는 자기실현의 길에 이르는 것이 대면의 궁극적 지향이다. 심리학적 대면은 자신의 좋은 점만 부각하는 지나친 긍정심리학의 유아성과 결별하는 것이다. 대면은 상처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차별 없이 끌어안아, 마침내 더 크고 깊은 나로 나아가는 진정한 용기다. (86쪽)               


내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어릴 적 내게는 참 버거운 콤플렉스들이었다.


첫 번째 콤플렉스는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모든 순간에 아버지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조차 없이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질문에 ‘나는 아버지 안 계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엄마 혼자 키워주셨거든.’이라고 말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외국에 돈을 벌러 갔다고 했고(어린 내 생각이었는지, 엄마가 그렇게 말해줬는지는 이제 기억조차 없다), 중학교 때는 어쩐 일인지 부모님의 이혼과 관련한 아무런 에피소드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와서 아주 친한 친구 중 하나가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 부모님은 이혼했어.”라고 말하는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친구의 자연스러운 말투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 뒤로는 나도 누가 묻든 “우리 부모님은 이혼했어.”라고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지극정성으로 키워주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계셨기에 별다른 빈자리도 못 느끼고 살았으면서도 그 말을 내뱉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엄마는 그게 나의 아킬레스건이 되지 않도록 종종걸음으로 사셨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반적이지 않은 가정’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있던 이혼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기가 참 버거웠다. “우리 부모님 이혼했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된 그 날 이후, 나는 얇지만 견고했던 알 하나를 깨뜨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이혼에는 나의 책임이 없으며, 그것이 나를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데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 꽁꽁 숨어있던 내면아이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대면한 최초의 기억이다.



두 번째 콤플렉스는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엄마 혼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사는 삶이 부유할 리 없었다. 다행히 외가 식구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우리 세 식구를 돌보아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금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는 생활보호대상자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그 가난의 이름이 어린 나이에는 가볍지 않았다. 외가 어른들과 엄마로부터 엄청난 심리적 지지를 받고 자랐기에 ‘나는 괜찮아’라고 되뇌며 살았지만 사실 괜찮지 않은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는 가난이, 누군가에게 들통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두 개의 기억을 고백하며 내 슬픈 기억 속의 내면아이와 마주하려 한다. 학교 일과 중에 굉장히 많이 아팠던 날이 있었다. 내내 양호실과 진통제에 의지하며 하루를 버티고는 하교 후 병원에 가려고 하는데 친한 친구 한 명이 굳이 따라가 주겠다며 가방을 들고 나섰다. 몸의 컨디션으로는 누구에게라도 기대어 병원까지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병원비를 계산할 때 턱없이 낮게 나올 그 금액을 친구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병원 앞까지 부축해준 친구를 엄마가 곧 온다는 핑계로 기어이 돌려보내고 혼자 진료를 받고 병원문을 나서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또 하나의 기억은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학 전공과 적성이 잘 맞았던 나는 그 해 어쩌다 보니 과탑을 하게 되었다. 학점 4.5, 올 A+라는 엄청난 성적을 받았다. 당연히 학교에서 주는 성적장학금의 수혜자가 되었다. 하지만 성적 장학금은 전액 장학금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나는 3.5라는 학점만 넘으면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학과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에, 성적 장학금은 2순위에게 미루겠다고. 그 전화를 걸기까지 참 오래 망설이고 참 오래 괴로웠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이라는 나의 콤플렉스는 나를 한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일하고 공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책을 읽으며 그때의 나는 나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그것을 끌어안아 더 크고 깊은 나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배제되었던 그날, 나는 엄마 몰래 참 많이 울었다. 나의 의료보험에 엄마 이름이 오르고, 더 이상은 국가의 지원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힘으로 올곧게 일어설 수 있게 된 그 날 나는 참 행복했다.   

   

상처 입은 내면아이 속에는 온갖 억울함과 안타까움으로 중무장한 채 한 번도 제대로 소리쳐 울어보지 못한 또 하나의 내가 숨겨져 있다. 내면아이에 대한 강의를 할 때마다 자주 받는 질문은 ‘우리 안에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어떻게 위로하냐’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출발은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다. (130)          



책을 읽으며 나의 지난 삶이 그래도 꽤 괜찮았음을 느낀다. 내 내면아이가 갖고 있던 그림자를 잘 끌어안아 여기까지 잘 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 오랜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던, 열여덟의 나와 스물둘의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진아야, 잘 있니? 혹시 많이 울지는 않았니?" 그리고 그때의 나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 이제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다. 토닥토닥 등을 쓸어 주고 싶다.     

      


상처를 극복하는 내면의 힘은 자신도 모르는 면역력처럼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단련되어온 회복탄력성이다.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일상 속의 길은 뭘까. 나는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내면의 희열, 즉 블리스(Bliss)를 가꾸는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이라고 믿는다.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모든 기쁨이다. (92쪽)          



요즘 나는 내가 꽤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에게는 아주 강한 힘을 지닌, 블리스를 가꾸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읽고 쓰는 일’이다.


육아의 짬짬이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의 책을 읽어내고 감상을 써 내려간다. 일상의 순간들을 메모해두었다가 시와 수필로 쓴다. 별것 아닌 일들이 일상 속에서 잊고 살던 빛을 찾아주고 있다. 견디기 버겁게 느껴지는 일들을 글로 써내려 가다 보면 의외로 별것 아닌 일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머릿속이 번잡할 때는 나의 일상과 아주 괴리된 책을 꺼내 차분히 읽어 가다 보면 일상의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들이 생긴다. 읽고 쓰는 일을 통해 얻는 블리스는 생활 속에서 내가 받는 수많은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상처에 대처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상처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다 결국 그것을 마음과 기억에 새겨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로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상처를 대면하고 그 상처를 극복할 내면의 힘을 길러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나는 상처에 나를 내맡겨 겨우 찾은 나의 자존감을 뿌리째 흔드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부지런히 읽고 쓸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는 무관한, 오로지 나 스스로의 희열, 블리스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나 자신도 아니다.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고통이 나를 공격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이 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이 마음의 운전대를 제멋대로 조종하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괴로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향한 집착이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237쪽)          


살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고통 앞에 되뇌고 싶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라고.


그리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가장 소중한 것은 그대, 당신 자신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