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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ug 22. 2020

멋진 신세계가 있다면, 어떤 곳일까

열다섯 번째 시간-『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과연 '멋진 신세계’라 부를 만한 곳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과연 ‘멋진 신세계’란 어떤 곳일까.   

   

책을 읽기 전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었다. 워낙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이므로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은 반어적 의미를 담고 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멋진 신세계’에 대해 먼저 그려보게 되었다. 멋진 신세계가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라면, 누구나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곳, 사회가 구조적으로 안정된 곳, 인간적 자유가 보장된 곳, 완벽한 복지 제도의 실현으로 생활이 어려움이 없는 곳 등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책장을 넘기며, 내가 생각한 ‘멋진 신세계’가 작가가 그린 신세계와 너무도 닮아 있어서 1차적으로 놀랐고, 다음으로는 그런 생각들이 작가가 그린 방식대로 실현된다면 유토피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섬뜩했다.    

 



수정 단계부터 철저하게 관리되어 병 속에서 태아로 자란 뒤 ‘부화’된 인간은 자라는 동안에도 수면 교육과 조건 반사 교육을 통해 완벽하게 만들어진다. 수정 단계에서부터 이미 정해진 계급(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이 있고, 그 계급이 ‘부화’된 이후에 맡게 될 일에 필요한 능력과 욕구만을 가지도록 조건화된다. 그 모든 것을 지시하고 감독하며 관리하는 ‘총통’이라는 인물에 의해 문명사회라 일컬어지는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완전무결한 기계와도 같다.


조건화되지 않은 욕구는 존재하지 않으니, 욕구가 좌절되어 겪는 불행도 있을 수 없다. 각 계급에 따라 다른 욕구를 느끼고, 그 욕구들은 완벽하게 채워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행여 그것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불행을 느끼지는 않게 도와주는 ‘소마’라는 약물이 있다. 지극히 안정된 사회이고, 그 안정을 뒤흔들 요소는 전혀 없다. 모든 인간은 행복함을 느낀다.     


헨리나 패니처럼 자신이 속한 계급(알파 플러스 계급)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욕구를 누리며 아무 생각 없이 사회에 스며든 인물들은 그저 행복하다. 우리 눈에 안쓰럽게 보이는 노동자 계급인 델타와 엡실론 계급의 사람들 역시 이미 그렇게 조건화되었으므로 소마 몇 알로 충분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헨리, 패니와 같은 계급에 속하지만 그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기며 한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레니나와 같은 인물도 있다. 물론 그녀가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할 수도 있는 씨앗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멋진 신세계에서는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는 슬로건 하에 여러 사람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 사회에서도 자신이 속한 계급 안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며 혼란을 겪고 있는 버나드와, 어쩌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사는 헬름홀츠같은 인물도 있다. 두 인물은 모두 알파 플러스 계급에 속하지만, 버나드에게는 육체적 결함이 있고, 헬름홀츠는 의식의 과잉 상태를 겪고 있다. 두 인물은 가장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계급에 속해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며 ‘과연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불행으로 밀어 넣는 것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열망, 남들과의 비교, 욕망하는 것에 대한 좌절 등이다. ‘멋진 신세계’에는 그런 열망이나 비교, 좌절의 감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불행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을 견디며 노력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끝내 자신의 욕구에 도달하였을 때에서야 진정한 행복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동물처럼 제시간에 먹이를 주고, 적절한 환경에서 잠을 자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육체적 고통이 있을 때에는 마취제로 고통을 잊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멋진 신세계가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욕구를 한 사람 혹은 어떤 사상으로 모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자와 난자를 수정하고 배양하여 태아로 ‘부화’하는 과정까지는 통제가 가능할지 몰라도, 그 인간들이 자라며 사회의 일원이 될 때쯤에는 결코 모든 욕구와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 이 ‘신세계’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최소화하도록 조건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조건화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조건화 교육을 받아온 레니나가 야만인인 존에게 아주 짧은 시간만에 사랑에 빠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두 사람만 모여도 ‘관계’가 맺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는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감정과 그로 인한 욕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육체적인 결함이 있는 버나드가 외톨이가 된 것 역시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들과 다른 외형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로 버나드를 은근히 따돌리는 알파 계급 인간들의 모습은 조건화 교육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결국 태생적인 외로움을 지닌 버나드로 인해 문명사회 전체를 뒤흔들만한 인물인 야만인 ‘존’이 등장하게 되는 것 또한 통제 범위 바깥의 일이었다.      




‘문명사회’와 대척점에 있는 곳은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명명되는 인디언 부락이다. 야만인 보호구역에는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자연스럽게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들이 살고 있다. 문명사회의 조건화된 인간들에게는 그저 미개해 보일 뿐이다. ‘존’은 그런 곳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존의 어머니인 린다는 원래 문명사회에서 베타 계급의 사람이었다. 린다는 문명사회에서 만난 남자와 잠시 들른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길을 잃고, 그 뒤에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영영 문명사회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살게 된 인물이다. 존은 인디언들과 함께 자라며 그들의 문화를 동경하고 그들 속에 스며들고 싶었지만, 백인이고 어머니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유로 철저한 외톨이로 지낸다.      


존은 버나드에 의해 문명사회에 오게 되는데,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아주 큰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문명사회의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문명사회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모두 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나, 죽음과 같이 슬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현상 앞에서도 아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것, 불행한 감정을 달래기 위해 ‘소마’라는 약물에 의존하는 것, 사랑이나 희생의 숭고한 가치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육체만 탐하는 남녀 관계에 대한 것, 예술과 과학과 진리와 종교 등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 등을 보고 겪으며 문명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이러한 존의 생각은 총통과의 대화 장면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총통은 문명사회를 마치 신과 같은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문명사회의 바깥세상(조건화되지 않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이 있고, 가끔 그곳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의 의식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하고 그가 말했다. (304쪽~305쪽)          



존이 말하는 ‘불행해질 권리’란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고 느껴졌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든다. 원하지 않더라도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도 있으며 신이 아닌 이상 미래의 일을 알 수도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소마’가 주는 단순한 행복과 바꿀 만큼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뿌려진 불행의 씨앗은 어떻게 일구고 가꾸느냐에 따라 행복의 꽃을 피우는 영양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결코 지배자 한 사람이나 어떤 사상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스타파 몬드(총통)는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행복을 내세웠지만 그 행복이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의 세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야. 강철이 없이는 값싼 플리버 승용차도 만들 수 없어.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중략)
안정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희생인 것이야. 우리는 행복과 소위 말하는 고도 예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돼. 우리는 고등의 예술을 희생시킨 셈이지. (279쪽)          



총통은 안정을 얻기 위해 지불할 대가로 예술 외에도 진리, 종교, 과학, 극기 등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안정’이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킬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신의 임무만을 수행하며 생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에 대한 논리는 일정하다. 예술과 진리, 종교, 과학 등은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을 일으킬 수 있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다. 그것은 사회의 안정을 방해하고, 안정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반드시 불행이 싹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고의 선(善)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켜 마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예술을 즐기고, 진리와 과학을 탐구하며 신을 섬기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며 더 나은 ‘나’를 위해 자신을 단련하기도 한다. 그 과정은 명쾌하지도, 단순하지도 마냥 즐겁지도 않지만 그것이 지닌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가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이 동물이나 기계와 다른 점이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진보가 미래에 가져올 인간적 비극을 경고한 충격적인 작품”     

20세기 기계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진보가 전체주의 사상과 밀착될 때 어떤 인간적인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가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기술의 과도한 발전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한 반유토피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헉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계문명이 극한까지 발달하고 인간 스스로 발명한 과학의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해, 마침내 모든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할 지경에 도달하는 비극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작가 헉슬리의 주장은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면서 기계문명 발달에 도취된 현대인들을 통렬히 공격하고 있다.           



책의 뒤편에 적혀 있는 책의 소개말이다. 이 소설이 1930년대에 쓰인 것이라 생각하니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학 발전과 기술 문명의 발달은 그의 예측만큼은 아니지만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획기적인 단계에 와있다. 작가가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현대 사회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성이 상실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추구해나가는 주체는 인간이다. 또한 과학과 기술이 제아무리 발달한 사회라도, 그 안에서 더욱 인간답게 살고자 예술 활동을 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쉬이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수는 과학이 보장해주는 윤택한 삶을 기반으로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낭만적인 상상을 해본다.  



    

책장을 덮으며, 처음 제목을 놓고 했던 생각들을 돌아보았다. 진정한 ‘멋진 신세계’란 누구나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곳, 사회가 구조적으로 안정된 곳, 인간적 자유가 보장된 곳, 완벽한 복지 제도의 실현으로 생활이 어려움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누구나 ‘불행할 권리’를 갖고 불행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세계, 그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행복을 찾아가는 ‘개인’이 존재하는 세계, 그 개인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지하는 세계가 진짜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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