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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ug 28. 2020

‘글 쓰는 엄마’로 사는 삶

열여섯 번째 시간-『글 쓰는 엄마』(윤슬)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나는 조르바가 된다.
내게 묶여있는 끈을 잘라내고 나만의 산투르를 연주하는 기분이 든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나는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된다.      

나는 ‘글 쓰는 엄마’다. (11쪽 프롤로그)     


저자는 글을 쓰는 동안, 그 시간만큼은 조르바가 된다고 했다. 조르바!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사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 망설이고 고민하지 않으며 곧바로 행동하는 사람, 기분과 생각을 춤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조르바는 그런 사람이었다. 저자에게 글이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산투르’이며, 글을 쓰는 행위는 ‘산투르를 연주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생이면서도 자신의 생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난무한 이 시대에 오로지 ‘자신’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따뜻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에세이를 만났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 제목을 따라 1부는 ‘글 쓰는’, 2부는 ‘엄마’. 1부에서는 저자에게 ‘글쓰기’란 무엇이며, 왜 글을 쓰게 되는지,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지, 글쓰기를 통해 저자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었다. 2부는 ‘엄마’라는 역할을 해내며 만난 고난과 그것을 통해 깨달은 것, 엄마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도리어 배우게 되는 것, 엄마가 된 이후에 비로소 새롭게 바라보게 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마음, 자라는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내어보는 욕심 등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가능하면 하루 한 번 글쓰기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이들과의 감정싸움으로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날에도,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마음이 우울해진 날에도, 예상하지도 못한 선물에 감사한 날에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에 집중하면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나에게 글쓰기는 감정의 쓰레기통이며 감정의 회복을 도와주는 재생에너지원이다. 다시 말해 나를 다독이는 과정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글쓰기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쪽)          



매일 글쓰기를 실천하면서 나에게 글쓰기란 ‘채우는’ 과정이자 ‘비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글 쓰는 엄마』에는 ‘감정 쓰레기통이자 재생에너지’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어떤 글이든 꾸준히 써본 사람들은 반드시 알게 되어 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내 안에 쌓인 것들을 하나둘 비워내고, 새로운 에너지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임을, 그것을 통해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저 현재를 열심히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일임을 말이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확신하면, 때로는 숨겨놓은 모습을 발견하고는 당황해하면서, ‘나다움’을 찾아가고 있다. 이런 모습이 나다운 것이라며 안도하기도 하고, 또 가끔 저런 모습이 진짜 나다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와 ‘나다움’을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분별력을 갖추고 본능적인 것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말이다. (중략)

치밀하게 분석하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심사숙고(深思熟考)도 좋지만 ‘관심이 있어 한번 해 본다’라는 조금 낯선 행동이 진짜일 수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결과에 대한 평가, 그런 것은 뒤에 진짜 속마음이 숨어있을 수 있다. 특히 그러한 행동이 어떤 맥락을 지니고 있을 때는 정체성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힌트가 될 수 있다. (31쪽 ‘나다움’에 대해 고민하다)          



작년 말부터 매일 일기 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특별한 일 없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듯한 일상을 살아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일기를 쓰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약 7년 정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써왔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아마도 둘째의 입덧이 시작된 순간부터)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일여 년간 일기장을 펼쳐보지도 못했었다. 그때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버거워 하루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기록할 기운조차 없다고 믿던 때였다.


그렇게 일 년 반쯤이 그저 그렇게 흘러갔을까. 어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수없이 많은 질문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늘 바깥으로 향하던 질문이 어느 순간 안으로 방향을 틀자 대답할 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 해봐야 ‘엄마지,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지,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는 낙으로 살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엄마’라는 자리는 ‘나다움’을 오롯이 표현하지 못했다. 엄마라는 자리는 내게 새롭게 부여된 역할이었다. 물론 엄마가 되고 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달라졌고, 전혀 모르고 살던 나의 새로운 모습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그건 새로운 역할에 딸려오는 변화일 뿐이었다.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엄마’라는 역할은 어딘지 부족했다. 그렇게 ‘나다움’을 고민하던 때에 아주 감사하게도 ‘글쓰기’를 다시 만났다.     


우연히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인연이 글쓰기로 다리를 놓아주었다. 손 놓고 있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245일째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 독서모임의 개수도 두 개로 늘려 한 달에 두 권씩 책을 읽고 있다. 책장을 덮으면 화르르 흩어지는 생각들이 아쉬워 부족하나마 책 리뷰를 쓰게 되었다. 그러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글쓰기에 중독되고 말았다. 또 우연히 시를 써볼 기회가 생겨 재미 삼아 한두 편씩 쓰게 된 시가 나를 다른 글쓰기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브런치에 시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 시의 개수가 서른 편이 되어 브런치북 '엄마의 시간'을 발행한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를 쓰는 엄마가 되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결과에 대한 평가, 그런 것은 뒤에 진짜 속마음이 숨어있을 수 있다. 특히 그러한 행동이 어떤 맥락을 지니고 있을 때는 정체성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힌트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는 내 행동이 모두 ‘글쓰기’라는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자유로웠다. 물론 내가 쓰는 글의 80% 이상이 엄마라는 자리에서 얻어온 소재들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는 시간이 엄마라는 역할의 연장선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자리에서 잠시 일어서 ‘나’라는 자리에 옮겨 앉을 수 있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 ‘나다움’을 찾아가는 것이 마냥 설레는 일만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나를 만나야 하고, 그 안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 살아가지 않는 삶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죽음이라는 생의 마지막 장면을 만나기 전까지 결코 헤어지지 않을 존재는 오직 ‘나’뿐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이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나다움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33쪽)'는 말이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이 될 이유는 있다. 누구나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내야 하니까.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거듭 태어나는 방식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선택을 믿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나는 그 방식을 ‘글쓰기’로 결정했고 오늘도 그 길을 걷고 있다. (72쪽 ‘누구나의 인생, 저마다의 인생’)          


저자처럼 나 역시 나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찾았다. 아니, 찾아냈다. 고군분투(孤軍奮鬪) 끝에. 그러니 어떤 누구도 할 수 있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 선택하고 몸을 움직이는 존재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것이 무엇이든 오롯이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정말 엄마 노릇하는 게 쉽지 않다.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고 하지만, 마음대로 눌러앉아 기약 없이 시간을 보내는 손님의 무례한 태도에 종종 화가 난다. (82쪽 시간의 힘을 견딘 것은 아름답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새벽부터 잠이 깨서는 빨리 일어나라고 성화를 부리는 첫째 때문에 축 늘어진 몸을 질질 끌어 거실로 나와야 했다. 그 성화도 좀 예쁜 말로 부린다면이야 없던 기운도 쥐어 짜내 볼 텐데, 눈뜨자마자부터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아이의 감정에 다 맞춰줄 에너지가 내게는 없었다. ‘무례한 손님의 태도’는 아무리 내 아이라도 마냥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거실로 나온 아이는 계속해서 짜증을 내며 내 몸을 올라타고, 감기는 내 두 눈을 후벼 파며 눈 뜨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마음 같아서는 제발 그만하라고 같이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그래 봐야 내게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꾹 참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아이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 가장 편안하고 믿을 만한 존재인 엄마에게 감정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충분히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가 된 후로 한 번도 네 시간 이상을 연이어 자본 적이 없고, 삼시 세 끼에 대한 고민을 덜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내 끼니는 늘 고민에서 열외의 대상이었고, 휴식다운 휴식을 편안하게 누려보지도 못했다. 언제나 아이 생각, 아이 걱정이었던 나에게 아이가 무작정 쏟아내는 ‘감정’들은 너무나 무겁고도 서운한 '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 덕분이었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일어나 앉고, 서고, 걷기 시작했다. 울기만 하던 아이가 손가락질을 하고 몸을 내달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제보다는 어제가,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나은 날이었다. 힘들고 버겁던 순간들도 반드시 지나갔다. 지나고 돌아본 시간에는 잊힐까 두려운, 소중하고 향기로운 기억들만 남아 있었다. 그것이 나를 견디게 한 힘이었다. ‘시간의 힘을 견딘 것은 아름답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이유였다.


     

언젠가 내 품에서의 시간을 떠나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가르고 바람을 만들어낼 아이들,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 ‘힘’을 만드는 일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도움닫기를 할 때, 비행할 때, 잠시 숨 고르기 할 때, 날개를 모아 잠자리에 들 때라도 한 번쯤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면서, 사랑받으면서 살아온 추억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95쪽 짜파구리는 사랑이다)     



그 마음이다. 딱.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육아의 최전선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 요즘 들어 첫째는 미운 네 살이라는 말에 걸맞게 어찌나 미운 행동들만 골라하는지…, 참다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를 혼내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못난 엄마였음을 반성한다.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면서, 사랑받으면서 살아온 추억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것. 정말 그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실수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묻어두고, 내일은 조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표현해야겠다.


부쩍 제 이름의 의미를 자주 물어보는 첫째에게 ‘처음 엄마와 아빠에게 왔을 때처럼 언제나 한결같이 사랑받고, 받은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야’라고 말해준다.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제 이름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그렇게 사랑이 차고 넘치는 사람으로 말이다.       

         



‘글 쓰는 엄마’라는 제목부터가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고, 읽는 내내 ‘맞아, 이 마음이지. 이런 생각이지. 그래서 이렇게 행동했던 거지’라며 맞장구를 치게 되었다. 비록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이었지만 마치 저자와 작은 티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오래도록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나다움’을 찾아가는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막힘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것은 대화의 과정이라는 말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읽는 내내 작가와의 대화를 경험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과의 대화도 나눌 수 있었던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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