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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ug 29. 2020

합리적 개인주의자를 꿈꾸며

열일곱 번째 시간-『개인주의자 선언』(문유석)

‘개인주의자’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그리 긍정적인 함의를 가진 단어가 아니다.      


개인주의자
 국가나 사회보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사상과 태도. [네이버 지식백과] 개인주의 [Individualism, 個人主義] (두산백과)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는 어떠한 가치 판단도 포함되지 않으나, 현실에서 쓰일 때에는 부정적인 가치 판단을 전제하에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인주의자’라는 말에 가장 어울릴 법한 수식어는 ‘이기적인’, ‘저밖에 모르는’, ‘제 이익만 추구하는’ 등이 아닐까?   

  



중학교에서 초임 근무를 하면서 모든 일에 서툴렀던 나는 선배 교사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업무에 서툴 때, 학생 지도에 어려움을 겪을 때 주변의 선배 교사들은 동생이나 딸을 대하는 마음으로 나를 보듬어주었고 그들 덕분에 업무에도 학생 지도에도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끔 선을 넘는 분들이 계셨다.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임에도 옆에 딱 붙어 앉아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잔소리를 하시는 분도 계셨고, 말썽을 부린 학생들을 데리고 교무실로 가면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더 큰 목소리로 아이들을 대신 혼내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분들의 마음을 알았기에 고맙기도 했지만, 불편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의 나는 노크도 없이 불쑥 나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타인들에게, 괜찮으니 이제 그만 나가 달라는 정중한 거절의 표현을 하지 못했다. 챙겨주고 도와주는 선배의 호의를 거절한다는 것이, 마치 개인주의자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다 고등학교로 옮기게 되었을 때 선배 교사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충고는 ‘고등학교 문화는 개인주의라서 다들 제 할 일만 딱딱하고 서로 도와주고 챙겨주는 게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걱정한 선배들의 말임을 알았고, 그 충고에 약간의 두려움도 느꼈다.


고등학교에서 경험한 문화는 전혀 달랐다. 제 할 일을 하면서도 타인의 도움 요청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주는 교사들이 있는가 하면,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길 즐기는 교사들도 있었다. 또 제 할 일만 하고 타인의 요청에 무조건 거절 의사만 표하는 교사도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차이였지, 고등학교 교사 집단의 문화가 아니었다. 나에게 충고를 한 교사들이 왜 그런 충고를 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음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에 와 그 충고를 다시 떠올리니, 그만큼 앞뒤가 안 맞는 말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다 ‘개인주의’가 그런 오해를 받게 되었을까?  




 

‘세상과 전면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가 내 초기 상태다. 사춘기 소년이 아니니까 ‘세상과 일체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망상이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누구는 세상으로부터 전면적인 인정, 사랑,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구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는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19쪽 나라는 레고 조각)          


저자는 스스로를 인간 혐오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만큼, 철저한 개인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그냥 그런 모양의 레고 조각이라고.      


아이들이 자라며 집에 각종 레고 장난감들을 들이게 되었는데, 와르르 쏟아보면 저마다 모양이 다 달랐다. 물론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의 레고 조각도 있지만 그건 한 통 속에 몇 개 되지 않는다. 직사각형, 정사각형은 기본, 납작한 것, 높이가 높은 것, 둥근 것, 문 모양, 동물 모양, 꽃 모양, 나무줄기 모양 등등 너무나 다양하다. 레고로 무언가를 만들다 보면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만약 모든 레고 조각이 다 같은 모양이라면? 너무 시시해서 만드는 즐거움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또 만들 수 있는 전체 구성물도 너무 단조로울 것이다. 다양한 모양의 레고 조각이 공존하기 때문에 다채로운 모습의 완성품을 만들 수 있다.


인간 사회도 그와 다를 바가 없다. 개인의 개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모여 만들어낸 하나의 사회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이 제대로 섰을 때 비로소 조화로운 사회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문화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집단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물론 과거보다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섬뜩하리만큼 거대한 집단주의에 도취된 것 같이 보인다. 어떤 문제도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순간 진영 논리가 파고들어 빨간색과 파란색,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선과 악으로 딱 양분되어 그 속에서 죽어라고 목소리를 내는 개인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집단의 문제로만 인식된다. 이제 겨우 서른일곱 해를 살았지만, 요즘처럼 모든 일이 이분법적으로 해석되고, 첨예하게 대립되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선거권을 처음으로 가졌던 때만 하더라도 이토록 무조건적인 이분법의 세상은 아니었다. 집단의 논리에 개인의 존재는 사라진 지금의 세상이 가끔은 무섭기까지 하다.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24쪽~25쪽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링에 올라서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라는 제목 자체가 좋았다. 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부분이었다. 그만큼 전적으로 공감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사회도 '상명하복, 집단 우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교사 집단은 폐쇄성이 강한 집단이라 집단 안에서 개인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지방 학교에는 특정 지방 대학교 출신의 교사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학벌주의도 꽤 심각했다. 그 속에서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저 혼자만 잘난 척한다'는 낙인에 찍히기 일쑤였고, 그저 그런대로 별 사고 없이 집단에 묻혀 가는 것이 '좋은 교사'의 기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부터도 '개인주의'라는 단어를 알게 모르게 더욱 '불온적'으로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는 오랜 세월에 거쳐 단단한 뿌리를 내린 서구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랫동안 집단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가 뿌리내린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해서, 곧바로 개인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더 이상 집단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무조적으로 희생하고 불합리한 문화도 고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이해관계를 따져 오로지 자신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문제를 해석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자유는 누리려 하며, 개인의 권리는 요구하면서 의무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비합리적인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개인주의의 모습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합리적 개인주의’는 온전히 자신의 두 발로 세상을 딛고 설 수 있는 개인들이 모여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 누리는 자유와 권리만큼이나 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개인주의자들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사회가 될 것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22쪽~23쪽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우리 사회의 자살률이 높고,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서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좌절하고, 어쩌면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며 주어진 생을 흘려보낸다.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 행복한 것도,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 아등바등 매달리는 것도 결국 집단이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힌 국가들에서 개인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사회 내부에 빈부 격차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과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성숙한 배려의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260쪽) 때문이라고 한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듯, 부유함이 자랑거리도 아닌 것이다. 그저 개인마다의 삶의 모습이 있고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였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도 있음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비록 내 친구들, 주변 사람들 중에는 없더라도, 설령 전체 이십 대 인구 중에 현재에 만족하는 이들이 더 많더라도, 분명히 어떤 젊은이들은 백화점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고, 종일 알바 후 1.5평 고시원에 누워 희망 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 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 두터운 현재를 갖고 있지는 못하기에 서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118~119쪽 변한 건 세대라 아니라 시대다)     



언젠가부터인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소확행’을 느낄 거리를 갖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혼맥 하기, 당일 여행 가기, 작은 장식품 모으기 등 많지 않은 월급으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낸 것이다. 소확행, 개인에게 확실한 행복을 주는 것들임에는 틀림없다.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이 그렇게라도 현재의 행복을 찾아가는 현상을 비판할 수도 없다. 다만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그것이 지속 가능한가이다.


내가 소확행을 누리며 현재의 행복에 만족하는 사이,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들의 고통과 삶의 무게를 공감할 만한 감수성을 지니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그런 인지와 감수성은 ‘나’라는 개인과 ‘사회’를 단단하게 이어주는 고리가 된다. 개인주의라고 해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279쪽 에필로그 우리가 잃은 것들)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이 늘어난 세상은 이기적이고 배려심 없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그런 사회가 아니다. 자신만의 분명한 기준을 갖고 타인을 인정하며 나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사회, 나의 권리와 타인의 권리가 부딪히는 지점에서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회,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는 일일지라도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개인이 존재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꾼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는 집단과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전근대적인 사람에 가깝게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나의 목소리가 집단의 가치에 반할 때 그저 묻어두고 살아온 과거와 달리, 내 목소리로 인해 나를 포함한 소수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면 과감하게 소리 내어 보고 싶다. 누군가가 내 영역에 허락도 없이 마구 드나들 때, 정중하게 불편하다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삶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오지랖을 부리고 싶을 때, 타인의 영역을 인지하고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매너를 겸비하고 싶다. 나와 다른 존재를 '나쁘고 틀렸고 이상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저 '다른 것'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니고 싶다. 나의 행복에 도취되어 타인의 불행에 눈감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삶에서 고통받는 또 다른 '개인'이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하며 살고 싶다. 저자의 마지막 말처럼,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서로의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성숙한 '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진정한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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