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시간-『개인주의자 선언』(문유석)
개인주의자
국가나 사회보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사상과 태도. [네이버 지식백과] 개인주의 [Individualism, 個人主義] (두산백과)
‘세상과 전면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가 내 초기 상태다. 사춘기 소년이 아니니까 ‘세상과 일체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망상이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누구는 세상으로부터 전면적인 인정, 사랑,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구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는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19쪽 나라는 레고 조각)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24쪽~25쪽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22쪽~23쪽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도 있음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비록 내 친구들, 주변 사람들 중에는 없더라도, 설령 전체 이십 대 인구 중에 현재에 만족하는 이들이 더 많더라도, 분명히 어떤 젊은이들은 백화점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고, 종일 알바 후 1.5평 고시원에 누워 희망 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 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 두터운 현재를 갖고 있지는 못하기에 서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118~119쪽 변한 건 세대라 아니라 시대다)
한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279쪽 에필로그 우리가 잃은 것들)